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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줄기를 찾아서/전북의산 산행기

천반(天盤)의 명당과 정여립의 한이 서린 곳 - 천반산

by 두타행 2012. 6. 18.

頭陀行의 우리山河 나들이

 

 

천반(天盤)의 명당과 정여립의 한이 서린 곳 - 천반산
(진안군 동향면 섬계마을 → 철탑 → ×593 → 안부 → 천반산 → 전망바위 → 성터 → ×575 × 뜀바위 → 구량천 → 동향면 장전마을 입구)
- 진안군 동향면, 상전면, 장수군 천천면 -

 

 

☞  2012년 6월 9일(토요일), 더운 날, 친구와 둘이서.........

 

  산행지 교통이용편【자가용 이용】
▶  갈 때 : 집에서 → 진안군 부귀면 → 진안군 상전면 → 진안군 동향면 섬계마을 주차장
  올 때 : 갈 때의 역순

 

  산행거리 및 산행시간
- 산행시간 : 5시간 40분(중식 및 휴식시간 포함)
- 산행거리 : 11km(도상거리)

 

  지나온 흔적
▲ 08:45  집 출발
▲ 10:00  동항면 섬계마을 도착
▲ 10:10  섬계마을에서 산행시작(천반산 등산안내도, 천반산 성터 4.12, 천반산 2.92)
▲ 10:45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열원리 0.72, 섬계마을 1.30, 천반산 2.02, 천반산 1.62km)
▲ 11:02  첫 번째 철탑
▲ 11:13  두 번째 철탑
▲ 11:45  안부(이정표, 천반산 0.7, 섬계마을 2.62km)
▲ 12:10  로프지역
▲ 12:17  천반산 깃대봉(장전마을 입구 1.6, 성터 1.2, 죽도 3.3, 가막입구 2.7km)
▲ 12:33  노송 한 그루가 있는 바위전망대
▲ 12:35∼14:00  노송 한 그루가 있는 바위전망대에서 중식 및 휴식
▲ 14:16  말바위

▲ 14:30  천반산 성터(송판서굴 0.8, 천반산 1.2, 죽도 2, 장전마을 입구 2.8km)
▲ 14:42  송판서굴 갈림길
▲ 14:43  뜀바위 안내문(의자)
▲ 14:47  로프지역
▲ 14:50  뜀바위(10분 쉼)
▲ 15:47  구량천(산행종료, 죽도 병풍바위, 천반산 3.2, 성터 2, 송판서굴 1.8)
▲ 16:29  동향면 장전마을 입구(도로)
▲ 17:15  차량회수
▲ 18:20  집 도착

 

【지도】국립지리원발행 1:25000 지형도, 도엽명 : 대량

 

 

- 천반산 산행지도 1:25000(대량)

 

- 천반산 위성지도(이수영님이 제작한 것임)

 


★  頭陀行의 천반산 나들이 


선조 22년(1589년) 전라도를 반역향이라 하여 호남 차별의 분수령을 이루고 1천여명이 참변을 당한 기축옥사(己丑獄死)의 주인공

정여립(1546∼1589년)의 한이 서린 곳,
장수에서 흘러내리는 장수천과 또 동쪽 덕유산에서 시작된 구량천이 巴자형으로 휘돌아 가는 천반산,
천반산은 정여립과 기축옥사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산이며 이곳 천반산에서 역모로 몰려 최후를 마친 곳이다.
약 423년 전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이곳 천반산에서 자신의 꿈을 펼쳤던 산길을 올라가 보기로 한다.
예전에 가막마을을 기점으로 두 차례 원점회귀 형식으로 천반산을 오른 적이 있다.
이번에는 새로운 코스인 동향면 섬계마을을 기점으로 하여 구량천(죽도 병풍바위)으로 내려서는 코스를 선택한다.

 


친구와 나는 08시 45분경에 산행지로 출발한다.
지구의 온난화로 일찍 찾아온 더위,

오늘도 30도에 육박한다는 날씨다.
용담댐으로 인해 새로 조성된 상전면 소재지를 지난다.
용담호도 지속된 가뭄으로 인해 물 수위가 현저히 떨어졌다.
요즘 저수율이 40%대까지 떨어졌다고 하는데 물이 많이 필요한 농번기라 걱정이다.
농민의 마음을 적셔주는 흡족한 비가와야 할텐데...........
구량천을 따라서 동향면 방향으로 진행한다.
섬티교를 지나니 우측으로 섬계산장이 나오고 바로 위쪽에 천반산 등산안내도와 함께 들머리가 보인다.
차는 들머리에서 50미터 떨어진 섬계마을 주차장에 주차한 후 산행길에 오른다.
등산안내도가 있는 들머리에서 천반산까지 2.92km로 되어 있지만 우리가 오르는 ×593봉을 거쳐가면 거리는 더 될 것으로 생각된다.
등로는 초반부터 완만한 사면 길로 첫 번째 갈림길까지 이어진다.
이정표가 있는 첫 번째 갈림길이다.
여기서 천반산 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거리가 짧은 길은 사면으로 난 길이고 거리가 조금 더 먼 길은 ×593봉을 경유해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우리는 여기서 능선 길인 직진하는 길을 선택한다.
능선 길은 뚜렷하고 좋으며 두 군데의 철탑을 지난다.
×593봉에 도착하니 처음으로 천반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후 내려서면 이정표가 있는 안부에 다다른다. 여기서 사면으로 난 길을 따라 섬계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
천반산을 향해 오르다 보니 답답하던 조망도 트이고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593봉이 눈에 들어온다.
로프지역을 지나서 조금 오르다 보니 천반산 정상인 깃대봉에 도착한다.
정여립이 훈련할 때마다 천반산 제일 높은 곳에 大同(대동)이라는 깃발을 꽂았다는 천반산 깃대봉이다.

정상에는 정상석과 삼각점 또 이정표 그리고 쉴 수 있는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 산소개〔천반산은....〕
백두대간 산줄기는 전북지역에서 민주지산 삼도봉에서 남하하며 대덕산, 삼봉산, 덕유산의 향적봉에서 해발 1,300m가 넘는 산줄기를 따라 파노라마처럼 서남쪽으로 뻗어가며 덕유 연봉들을 일구어 놓고 남쪽 끝자락의 남덕유산에 다다른다.
남덕유산에서 서쪽으로 뻗어가며 서봉에서(일명 장수 덕유산)작은 산줄기 하나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줄기는 삿갓봉을 거쳐서 두루봉, 영구산, 성주봉을 지나 삼면이 금강에 가로막힌 천반산을 솟구쳐 놓는다.
행정구역은 진안군 동향면, 상전면, 장수군 천천면에 경계해 있으며, 천반산은 하늘천(天), 소반반(盤)을 쓴다.
장수군 천천면 신기마을의 김대중씨에 의하면 산의 남쪽에 있는 가막리는 경주 鄭氏가 400년 전에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이 마을 앞 냇가에는 장독바위가 있다고 한다.
이 바위를 일명 하늘소반에서 떨어진 복숭라라고 하여 天盤落桃라 하였다.
그 뒤부터 마을의 북쪽에 있는 산에 천반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구전일 뿐 문헌이나 立證할 만한 資料는 없다.
정상주변에는 동쪽을 제외하고는 접근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지이고, 장수의 5대 명산으로 불리는 천반산은 장수의 北方을 수호하는 守門將이기도 하다.
또 천반산 성터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을 보면 산 위가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고 하여 이름 붙은 천반산은 남쪽은 장수에서 흘러내리는 장수천과 동쪽 덕유산에서 시작된 구량천이 巴자형으로 구입처 흐르다. 한머리 금강으로 거듭나는 것을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다. 땅에는 天盤, 地盤, 人盤의 명당자리가 있는데 이곳은 천반의 명당이 있다하여 천반산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천반산은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험준한 지세위에 정상은 약 10,000여평의 평지가 소반처럼 자리한 천혜의 요새이다. 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천반산에는 정여립이 성터와 망루로 사용하던 한림대터, 그가 뛰어다녔다는 뜀바위 등이 남아 있고, 군사를 조련할 때 사용했다는 거대한 돌솥이 묻혀 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또한 천반산에는 단종 때 왕위찬탈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송판서가 수도하였다는 송판서굴, 그리고 송판서의 부인이 살았다는 할미굴, 정여립이 친지들과 바둑을 두었다는 말바위 등이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산아래 신기마을은 정감록이 예언한 10승지의 한 곳이다. 조선조 유학자인 유겸안이 겸안록을 통해 이곳의 지리가 호남 제일의 땅이라고 칭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반산의 물줄기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금강 제1지류인 구량천이 용담호로 흘러든 후 금강으로 흘러간다.

 

 

[천반산은 정여립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산으로서........]
정여립과 기축옥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땅에는 천반, 지반, 인반 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는데 이 산에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해서 지어졌다는 설과 산 남쪽 마을 앞 강가에는 장독바위가 있어 이 바위가 하늘의 소반에서 떨어진 복숭아(천반락도 天盤落桃)라 하여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을 천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작금에 있어 천반산은 마치 天反山 이 아닐 까도 생각해 본다.
조선시대 최대의 옥사가 발생한 정여립 사건의 주인공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하고 죽은 곳이 이곳 천반산 이기 때문이다.
하늘(임금)에 반대했던 역신들의 산 천반산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억울하게 죽은 정여립은 그렇게 부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잔혹한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모반 사건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의 비밀장계(첩보문건) 한 장이 조정에 당도한다.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정여립이 세상을 전복시킬 엄청난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첩보는 구체적이다. 정여립이 자신을 따르는 일당과 호남, 황해도에서 동시에 봉기해 한강의 얼음을 딛고 한양으로 진입, 훈련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때까지 사건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다. 선조조차도 정여립이 모반할 까닭이 없다고 단언했다.
정여립과 한 길을 걸었던 동인 계열은 그가 스스로 한양에 올라와 무고를 주장하면 사건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판단은 어긋났다. 10월7일 금부도사 유담으로부터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급보가 조정에 당도했다. 변고는 거듭됐다.
10월18일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월20일 선조가 직접 나선 정옥남에 대한 친국을 시작으로 기축옥사가 시작됐다. 정옥남은 정여립의 아들이다.
이듬해 7월까지 무려 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조 4대 사화의 희생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임진왜란을 4년 앞두고 동인인 이순신, 권율 등이 음모에 휩쓸리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4~500만 명이었다. 모반에 대한 치죄는 매우 엄했다. 삼족을 멸하고,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잡아 죽였다.
정여립의 시신은 능지처참된 뒤 조선팔도로 흩어지고 그와 서신 한 번이라도 주고받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말 한 마디 건넨 이력이 있는 사람도 죽었다. 이웃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집단이 죽임을 당했다.
전주와 한양에서 국문이 109일 동안 계속됐다. 심지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까지도 묘향산과 오대산 사찰에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정여립의 근거지 전주는 동래 정씨가 아예 살 수 없게 됐고, 그의 고향 금구는 현으로 강등됐다.

집을 파괴하고 역적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 연못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돼 이후 인재등용에서 배제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승자들의 역사 속에 남겨진 정여립에 관한 기록이다.
서인들이 조선시대가 망할 때까지 집권을 하였으니 결국 그들의 기록은 믿을만한 게 못된다.
하지만 실제 사건은 역모가 아니라 잔인한 음모다!!
당시의 사건은 이렇게 추정되고 있다.
정여립 역모사건과 기축옥사는 조선역사에서 늘 문제가 되는 악적 서인들의 철저한 시나리오에 의한 잔인한 음모라고 볼수 있다.
당시 조선의 왕은 역대 최악의 임금중 하나로 꼽히는 선조이며, 당시는 임진왜란을 고작 몇 년 앞에 두고서 동인들이 주도적 집권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때 였다.
힘을 잃고 정권을 찾을 기회를 엿보던 서인들은 완벽한 시나리오를 구성하여 음모를 꾸미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역모 사건이라 하면 조선시대에는 정권을 충분히 뒤엎을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고, 이에 서인들은 진안 운장산, 구봉산의 이름을 만들게 한 간신 송익필(자가 운장, 호가 구봉)과 동인백정으로 불리웠던 송강 정철 등이 음모를 꾸며 율곡의 추천으로 서인에 들어왔다가 1년후 율곡이 죽자 서인들의 행태에 실망하고 동인으로 옮겨간 정여립을 역모의 주역이자 도화선으로 삼아 동인정권을 끌어내리고 집권을 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 정여립은 동인으로 옮겨간 이후 서인들의 행패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하여 천반산 일대에서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한 달에 한번씩 모여 무술훈련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였는데 열혈남아 였던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어찌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누구든 섬기면 임금 아니겠는가, 인민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괜찮고, 올바름을 실행하기에 부족한 지아비는 떠나도 괜찮다.

백성과 땅이 이미 조조와 사마씨에게 돌아갔는데 한 구석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유현덕의 정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거침없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게 또한 서인들이 정여립을 역모의 주동자로 몰기에 좋은 구실을 제공해 준 것이다.
당시 정여립의 거침없는 발언은 선조 앞에서도 할말이 있으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동사만록>에도 음모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사건을 만든 사람은 송익필이고, 각본에 따라 연출한 사람은 정철이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서인들이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당쟁의 산물일 뿐 역사 속에서 역모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한 서인은 계획된 대로 사전에 내통한 황해도 관찰사를 시켜 정여립이 역모를 꾀한다는 비밀장계를 선조에게 보내면서 준비된 음모가 시작되는데 그때 이미 정여립은 서인들이 보낸 자객에게 천반산 앞 죽도에서 암살을 당한 이후  였다고 한다.
이율곡과 선조도 인정하는 당대 최고의 천재 정여립이 역모를 꾀할 일이 없으니 같은 동인들도 가볍게 생각하고, 정여립이 나와서 진실을 밝히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가볍게 보았는데 죽은 정여립이 어찌 나와서 진실을 밝힐 수가 있었을까.
서인들은 정여립을 죽여놓고 열흘이 넘게 시간을 끌면서 매일 매일 매수된 관원을 시켜 거짓된 상소를 올리면서 그가 도망중이다, 궁지에 몰리자 자살했다 는 등 계획된 거짓정보를 왕에게 전달하여 점차 국면을 엄청난 역모로 몰아간다.
결국 음모는 성공하기에 이르고 조선시대 최악의 왕 선조는 동인의 반대파인 서인의 수장 정철을 시켜 기축옥사를 진두지휘하게 하고 동인 사냥을 시작케 한다. 이때의 모사꾼이 송익필 이다(정감록과 정여립을 결부시켜 거짓 소문을 퍼트린 이가 송익필 이다).
그렇게 동인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쥔 狂人 정철의 손에서 원래 계획된 동인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대로, 당시 집권하고 있던 동인들은 수장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관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삭탈관직을 당하고 동과 서는 더 이상 말로써 회복할 수 없는 극한의 원수가 되어 버린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축옥사를 조선 500년 제일사건 이라며 한탄을 했다.
이것이 전 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이다. 정여립의 이름은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다.
또한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을 쓴 신정일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6세기 말 개혁적 선비의 떼죽음은 결국 임진왜란 때 인재부족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조선왕조 몰락의 결정타가 됐다.
선비들은 더 이상 바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조선사회를 썩게 만들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 질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다른 글을 인용을 해보면..........]
선조는 조선 최초의 방계 혈통 임금으로 명종의 조카뻘이었다.
선조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왕의 자질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는 학문과 덕망이 높은 스승들을 모시고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시로 여는 경연장에는 실력 있는 관료들이 참석을 하였는데 중앙 조정에 올라와 있는 젊은 정여립도 함께 참석하고 있었다.
정여립은 참석자들 중에서 단연 뛰어나 어떤 학문을 논하든 막힘이 없고 달변으로 논리가 정연했다.
군신관계는 엄연했으나 선조는 정여립의 학문에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 자리에서 자연히 밀리게 된 선조는 주눅이 들게 마련이었다. 율곡 이이는 정여립을 두고 임금 앞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할 말을 다하는 인물이다. 그는 재주가 많은 천재다라고 칭찬을 할 정도였다.
즉위 초부터 정여립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진 선조는 군주로서 위엄을 확실히 갖추게 된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선조는 정여립이 스승인 이이를 비판했다고 하여 면전에서 심한 모욕을 주었다.
정여립은 학문적 이치가 다른 점을 지적했을 뿐이었다.
반대 세력인 서인들은 왕이 그를 미워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헐뜯기 시작했다.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낙향한 정여립은 대동사상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조는 변덕이 심한 왕이었다. 그는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뜻과 부합되면 일단 받아들였다가 역풍을 만나면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그래서 귀양을 간 신하도 부지기수였다.
당시 조선 사회는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각종 유언비어로 민심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조정은 동인과 서인 세력으로 나뉘어져 상호간 증오를 바탕으로 전면전 양상이었다.
선조는 동인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 권력을 초조하게 의심하고 정치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일어난 사건이 정여립의 역모사건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역모사건은 분명히 조작 날조된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여립이 자살했다는 것 외에 수사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전라도의 반역 모의를 어떻게 천리 길이 넘는 황해도에서 먼저 알고 고변을 했는지 당시의 정보 매체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주동자 중에서 명백하게 증거가 드러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사건을 이용하여 선조가 요동치는 민심을 가라앉히고 왕권 확립을 과시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서인들을 이용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정여립 역모사건을 찬찬히 살펴보면 사회 변화에 대한 조정의 무의식과 내부 모순을 극복할 여력이 없는 임금의 무기력함이 빚어낸 정치적인 쇼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선조시대에는 사회 전 분야의 개혁을 요구하는 열망이 최고조에 달했다. 배타적 성향이 강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기득권들은 민초들의 요구를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고 선조 또한 군왕으로서의 자질 부족과 개혁 역량의 무지로 사회 불안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전라도 해안을 침입하여 내륙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왜적 1천여 명을 정여립 수하의 대동계가 출병해 모조리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자 국가의 환란에 늦장을 부린 무기력한 조정을 비난하는 민심은 대동계로 쏠리고 있었다.

그런 움직임을 선조는 간과하지 않았다. 화근을 뿌리 채 뽑아 버려야 했다.
조작된 역모 사건이 터지자 선조는 낙향해 있던 정철을 불러 올렸다. 선조는 그를 역모 사건의 수사 책임 자리인 위관(委官)직에 임명했다. 칼자루를 쥔 서인의 영수 정철은 피비린내 나는 조선의 사화 중 최대로 많은 1천여 명의 인명을 살상하는 기축사화의 막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친구와 나는 하가막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위전망대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식사와 함께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오후 한때의 시간을 보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바위를 지나 천반산 성터에 다다른다.
어쩌면 정여립이 이곳에 망루와 성을 쌓고 관군에 맞섰는지도 모른다.
이 곳 주변은 특이하게 넓게 분지처럼 형성되어 있는데 한림대터가 있는 것으로 봐서 정여립이 군사들의 훈련장소로 사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송판서굴 갈림길..........
갔다올까 생각했지만 한 번 다녀 온 적이 있어서 생략하기로 한다.
두 바위 봉우리를 정여립이 말을 타고 뛰었다는 뜀바위.........

 

 

[정여립과 용마(龍馬)]
정여립이 타고 다녔던 말이 용마라고 하는데 정여립의 이야기에는 그 용마의 전설도 함께 전해 내려온다.
그 말은 워낙 빨라서 정여립이 상두산에서 6km쯤 떨어진 김제 황산으로 활을 쏘면 용마가 더 빠르게 달려가 그 화살을 물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화살을 쏘았는데 용마가 화살을 물어오지 못하자 정여립이 화가 나서 곧바로 그 용마의 목을 베어버렸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화살이 용마 엉덩이에 꽂혀있었다고 한다. 정여립은 크게 자책하며 그의 칼과 함께 용마를 묻었다고 하는데 그 무덤이 김제시 금산면 쌍룡마을앞 논 가운데 있는 무덤이라고 한다.

 

 

뜀바위에서 내려서면 길은 우측으로 로프지역을 통과한다.
암릉지역이다. 좌우측으로 단애를 이루는 곳이 많으므로 안전사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巴자 형태로 흐르는 구량천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우거진 숲으로 인해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좌측으로는 장전마을과 고산이 있고 약간 우측으로는 죽도와 병풍바위, 대덕산을 바라보고 내려선다.
지나온 암릉길과 달리 순한 길을 따라서 내려선다.
구량천에 닿는다.
바로 앞에는 병풍바위를 인위적으로 절단하여 육지 속의 섬으로 변해버린 죽도가 있다.
또 정여립이 죽도에 놀러왔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곳..........
과연 정여립은 이곳 죽도에서 자결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당했을까.
그 시대의 힘있는 자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 역사 아니던가.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구량천은 알고 있을 것이다.

 

 

◈ 죽도와 정여립
진안에서 무주 방향으로 8㎞쯤 달리면 상전면 수동리 내동마을의 竹島라는 곳이 있었다.
깎아 세운 듯한 기암절벽을 청류가 휘감아 돌고 북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錦江의 물줄기에 휩싸여서 마치 섬과 같고 山竹이 많아서 竹島라 했다.
원래 죽도는 오메가 Ω 형태의 섬 같은 산이었다.
용담댐이 만들어지기 전 이야기다. 70년대 중반 물줄기 일부를 돌려 논을 만들려고 병풍바위 중간을 폭파하여 지금의 폭포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구량천이 곧바로 폭포 아래로 흘러가게 되면서 물길이 바뀌어 죽도를 돌아 흐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논을 만들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인간의 욕심이 남긴 결과만이 죽도 본래의 아름다움을 훼손한 채 영원히 복구할 수 없는 흉물스런 절단면이 되어 죽도의 슬픈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죽도는 육지 속의 섬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죽도는 남쪽 장수의 연평천과 동쪽 무주 덕유산에서 흘러오는 구량천이 합수되는 곳이다.

정여립은 1589년 선조 때 1천여명에 달하는 기축옥사의 주인공으로 동서만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평소에 죽도를 자주 찾아서 죽도선생으로 불렸단다.
더구나 역적도 아니었기 때문에 죽도로 피난간 것이 아니라 평소처럼 죽도의 비경에 반하여 놀러왔다가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자살로 조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라도 때를 잘못 만나 꿈을 펴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정여립과 왜곡된 歷史는 재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구량천변을 따라서 장전마을로 나간다.
이제는 장전마을에서 차를 회수하러 가는 일만 남았다.
남자 둘이 서서 지나가는 차를 세워보지만 모두들 그냥 쌩쌩 지나친다.
30여분쯤 지났을까, 차 한 대가 멈춘다. 섬계마을까지 태워주실 것을 말씀드리니 사과밭을 둘러보러 왔다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다.
희망을 갖고 기다리고 있는데 경적을 울린다. 섬계마을까지 태워다 주신다.
차안에서 말씀을 나누다 보니 안천에 사시는 분이며 내 고향의 몇 몇 분과도 친분이 있는 분이시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차를 회수한 다음 장전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를 태우고는 집으로 향한다.
저녁에는 친구와 함께 공원에 나가 돼지불고기로 하산주를 나눈다.

 

- 동향면 섬계마을 들머리.......섬계산장이 있는 곳에서 오르면 된다.

 

 

- 첫 번째 만나는 이정표......직진하는 길은 능선을 따라서 천반산 가는 길, 우측 길은 사면으로 난 지름길이다.

 

 

- 첫 번째 철탑(좌측 사진)과 두 번째 철탑(우측 사진)

 

 

- 593봉에서 본 천반산 깃대봉

 

 

- 안부, 섬계마을로 내려서는 지름길이 있고 30여분 정도 오르면 천반산 정상에 닿는다.

 

 

- 천반산 직전에서 본 593봉

 

 

- 천반산 직전의 로프지역

 

 

 

 

- 정여립이 훈련할 때마다 천반산 제일 높은 곳에 大同(대동)이라는 깃발을 꽂았다는 천반산 깃대봉이다.


 

- 바위전망대에서 본 가막리 일대와 우측으로 마이산이 조망된다.

 

 

- 진행할 천반산 성터와 575봉, 그 뒤로 대덕산이 조망된다.

 

 

- 정여립이 바둑을 두었다는 말바위

 

 

- 천반산 성터

 

 

 

 

- 천반산 성터에서 바라본 구량천

 

 

- 송판서굴 갈림길

 

 

- 송판서굴(이수영님의 사진임)

 

 

 - 뜀바위를 지나 만나는 로프지역

 

 

- 암릉지역에서 본 구량천

 

 

- 지나온 천반산 깃대봉

 

 

- 암릉지역에서 내려다 본 구량천과 장전마을

 

 

- 암릉지역에서 바라본 구량천과 고산

 

 

하산길에 바라본 죽도(좌측)와 병풍바위 그리고 구량천

- 구량천 물을 논에 대기 위해 인위적으로 잘라놓은 죽도의 병풍바위, 그로 인해 죽도는 육지 속의 섬이 되어 버렸다.

 

 

- 죽도의 병풍바위

 

 

- 구량천에서 본 천반산 뜀바위지역

 

 

- 산행날머리 구랑천

 

 

- 천반산 뜀바위 능선

 

 

- 천반산을 우측에 두고 구량천변을 따라서 장전마을로 나간다.

 

 

- 장전마을로 나가면서 본 뜀바위 지역

 

 

- 동향면 장전마을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