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았다
秋夕에 다녀온 이후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故鄕(용담)을 찾았다
반갑게 만나 볼 수 있는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가면 순간 가슴이 메어진다.
넓고 검푸른 용담호와 산들을 처다 보니
눈시울이 적신다.
고향을 잃은 水沒民의 아픔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가 없고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것을 잃었다.
고향을 가슴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려야 했고
代代로 내려오던 풍요로운 터전을 잃었다.
또 친척과 이웃 그리고 친구
追憶도 잃어 버렸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때로는 鄕愁에 젖어
운명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물로 가득 채워진 곳을 바라본다.
내가 살던
내집과 우리마을인 하거마을이
저 자리에 있었고
친척집, 친구네집
다니던 초등학교, 중학교가 그대로 그려진다
송림마을, 원장마을
상거마을, 운교마을
또 주자川과 태고정이 물위에 일렁인다.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누구나 아버지라는 單語만 들어도 울컥하겠지만
나 또한 그렇다.
孝道는 고사하고 不孝가 너무 많으니
아버지 생각만 가득하다.
작년, 봄
생명이 막 움틀 무렵이었다.
주변에 아무도 보는 이 없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못하시고
약 한 달간을 그렇게 계시다가
아버지는 우리들 곁을 영원히 떠나신 것이다.
나는 아버지한테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하고
보내드려야만 했다
정직하셨던 아버지
그 어떠한 불편과 어려움이 계셨어도
우리들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 마음이 그랬다.
왜 이렇게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옥천암에 들렀다
어릴 적에는 참 먼 거리였는데
지금은 도로가 나 있으니
소풍갔던 추억도 희미하다
조용한 암자다
옛날에는 노부부 스님이 계셨다
보리쌀로 시주를 하고
그 대가로 과일인 옹에를 받았다.
절간의 문간방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아버지의 健康이 안 좋으셔서
아버지와 나는
문간방에서 한 달간 기거를 하였다.
그 때는 참으로 깊은 겨울이었다.
아이들과 옥천암을 내려선다.
가을이 절반 밖에 안 지났는데
바람이 몹시 차다
2007년 10월 20일
▲ 옥천암 입구의 계곡......수량은 적지만 아늑하기 그지 없다.
▲ 수몰이 된 정천면 모정리 망화마을지역, 오른쪽 산 밑으로 망화마을이 자리하고 있었고 마을 앞으로 정자천이 흐르고 있었다.
망화마을에는 명철이, 봉철이, 금표, 정상이, 종덕이, 준열이 여러 명의 친구들이 살았었다.
현재 이 물은 수몰이 된 용담면 성남마을을 돌아 본댐으로 간다.....모정리 사근교에서 바라본 것이다.
▲ 수몰이 된 정천면 모정리 쪽의 모습이다 -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15리를 걸어서 모정리 숲으로 소풍을 가곤 하였다.....사근교에서 바라본 것이다.
▲ 수몰이 된 용담면 월계마을과 황산마을의 모습....사진 왼쪽으로 월계마을과 월계뜰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앞으로 주자천이 유유히 흘렀으며, 오른쪽 위쪽으로는 황산마을이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이 근래에 등산로가 개설된 지장산이다. - 용담대교에서 본 것이다.
▲ 암봉으로 이루어진 성재....우리들은 성재라고 불렀으나 지형도에는 어떠한 지명으로도 나와 있지 않다. 어릴 적에는 많이도 오르내렸다.
▲ 수몰이 된 용담면 운교마을지역, 사진 왼쪽으로 9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새로 조성된 운교마을에서 바라본 것이다.
▲ 이 곳이 나의 고향(용담)이었다면 누가 믿겠는가
나의 고향은 이제는 말이 없다. 부모님과 살던 집과 마을이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던 곳 이었다.
한때는 인삼재배로 인하여 시골이면서도 부흥하는 지역이었고 5일장이 서는 등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던 곳이었다. 이제는 흔적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사진 오른쪽으로 용담 8경인 소요대가 있었고 그 앞으로 주자천이 흘렀으며 하거마을과 원장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참으로 소박한 시골이었다.
▲ 나의 고향 용담은 역사가 이러했다
용담은 삼국시대에는 물거현(勿居縣)이라 불렀으며 757年인 통일신라시대에는 청거(淸渠)라 불렀으며 진례현(오늘의 금산)의 속현이 되었다.
1413년(太宗13年) 남원도호부의 9현중의 하나로 현감을 두었으나 1656년(孝宗7年)에는 다시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으며 명칭도 옥천(玉川)이 라고 부르기도 했다.
애초에는 군내면, 동면, 서면, 남면, 북면등 5개면 이었는데 고종 32년에 용담군이 되어 9개면143리를 관할 하였으니 소재지인 군내면, 지금의 동향면인 일동면, 이동면, 주천면이된 일서면, 이서면, 정천면인 일남면, 이남면, 안천면인 일북면, 이북면 등 이었다.
1914년에는 진안군에 통합되어 용담면이 되었다. 용담면은 구 용담군의 군내면인 월계리, 호계리, 수천리, 와룡리와 이북면 일부인 송풍리가 관할구역이 되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용담의 백성은 소박하고 꾸밈이 적다 」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기(州記)에도「땅은 궁벽하고 하늘이 깊으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노후하다. 구름다리가 산에 걸리고 돌길은 시내에 연해 있다. 백성은 드문드문하며 푸른절벽이 만겹으로 겹쳐있다 」고 하였다.
또 용강산(龍岡山)과 마산담(馬山潭)을 소개하고 「현(縣)의 동남쪽 두물이 서로 모이는 사이에 용담이 있어 현명(縣名)으로 취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성재와 도실골.....골짜기에도 한 없이 물만 찼다.
▲ 수몰된 용담면(고향) 소재지 전체의 모습이다.
가운데 조그맣게 보이는 섬이 사지땅이라고 불렀으며 조그마한 산이었다.
높이만 봐도 물의 수심을 알 것 같으며, 왼쪽으로 용담 8경의 하나인 태고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태고정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주자천은 어릴적 우리들의 꿈을 키우던 곳 이었다.....아버지 산소에서 바라본 것이다.
▲ 옥천암 입구에 있는 계곡이다 - 여름이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찾아오곤 한다.
▲ 옥천암 - 옛날에는 노부부 스님이 살고 있었으며 낡고 작은 암자이었다. 근래에 증축되었으며 비구니승이 수행을 하고 있다.
▲ 옥천암은......
용담의 천태산에 자리하고 있는 옥천암은 892년(신라진성 여왕6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원래는 용담현 소재지에 있어 그 규모가 컸던 것 같으나 일제 이후 용담댐 건설을 이유로 사유(寺有)토지가 없어지며 이전 현 위치에 자리하였다.
사찰입구를 이루는 계곡의 맑은 물을 '옥류천'이라 부를 정도로 깨끗한 청정지역이다.
수몰 지역에서는 벗어나 지금의 자리를 지킬 수 있으나 내내 속인들의 시야에서는 감추고 싶은 곳이다.
▲ 중학교 3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인 딸 아이들.....아이들은 할아버지, 아빠의 고향을 어떻게 그릴까
간혹 말을 해주곤 하지만 저희들 노는데 더 재미가 있는 듯 하다
내년에는 큰 딸은 고등학교, 작은애는 중학교에 입학한다.
▲ 옥천암의 문간방...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시절, 겨울동안 아버지와 나는 문간방에서 기거를 하였다. 그 해 겨울은 참으로 깊었고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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