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경표 이야기 셋째 마당 - 1. 산과 강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의미
사람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않될 것이 물과 공기 그리고 땅이다. 그 셋 중 공기는 히말라야 꼭대기 아닌 한 어디에서나 공평하다. 다시말해 공기는 상수(常數)의 조건이므로, 인간 삶의 형태를 규정하는 외부 환경 변수(變數)는 물과 땅, 두 가지로 압축된다. 지형, 즉 산과 강이 인간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위해 10쪽에서 관찰해 두었던 '인문적 사실'을 꺼내 보았다.
인문적 사실
4) 능선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5) 사람은 물가에서 산다. 게다가 물길이 커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모여산다.
능선에는 왜 사람이 살지 않을까? 물이 없기 때문이다. 물가에 살더라도 왜 하류 쪽에 더 많이 모여 살까? 지어 먹을 땅이 넓고 평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동이 편리한 곳이기 때문이다.
강은 '정착'과 '이동'이라는, 인간 속성의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 준다. 정착에 필요한 물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이동에 필요한 교통 수단을 제공한다. 우선은 강 자체가 수로(水路) 즉 '길'이었고, 육지의 길이라 하더라도 거의가 강줄기를 따라 날 수 밖에 없었다. 토목 기술이 보잘것 없었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러한 길이 '산을 피하고 강을 따르는' 경향은 더욱 뚜렷했을 터이다. 그것은 별도의 반증을 필요로 하지않는, 당연한 사실이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큰 강 주위에서 태동했다. 그것은 세계사 첫장에서 배웠던 상식이다. 강이야말로 인간 문화를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그에 비하면 산은 장애물이었다. 정착이 불가능한 곳일 뿐 아니라, 이동에도 걸림돌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역설적으로 산 또한 인간의 문화 형태를 결정하는 요소라는 말이 된다. 강 하고는 정 반대 의미의 '거울'인 것이다.
그림을 보자. 금강, 낙동강, 섬진강하여 세 강이 나뉘는 지역이다. 해발 600 미터 고지대인 지지리(知止里)는 섬진강 지류인 요천의 발원지인데, 직선거리로 따져 장수읍이 8km, 함양읍 15km이고, 남원은 25km 쯤 떨어져 있다.
문제 하나 풀자. "지지리 사람들은 나들이 갈 때 주로 어디로 갈까?"
눈치채셨겠지만 답은 "남원"이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래서 "남원 100리길" 해가면서도 주민들은 남원의 생활권으로 산다. 까닭이야 물론 남원 가는 길에는 재(峙)가, 다시말해 넘어야할 산이 없기 때문이다. 물길 흐르는 대로 걷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함양 쪽을 보면 높이 750미터의 중고개재가, 장수 방향에는 어치재, 밀목재 하여 그만한 높이의 장벽이 두개나 버티고 있다. 결국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장수읍이 산과 강의 이치에 따라 가장 '먼' 동네로 간주되는 것이다. |
'동질성'의 확보에 직접교류라는 전제 조건이 꼭 필요한건 아니다. 같은 물길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면 충분하다. 예를들어 지지리와 사암리 주민들은 서로 내왕하는 일이 잦지 않더라도 같은 말과 음식 맛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이들은 요천이라는 이름의 같은 물을 먹고 살며, 멀리는 남원 가까이는 번암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원은 요천 물가에 사는 주민들의 다양한 문화가 들어오고, 그것이 하나 되어 퍼져나가는 중심지인 셈인데, 따지고 보면 그러한 수렴작용은 남원의 힘이 아니라 요천이라는 물길의 힘으로 봐야 한다.
요천 동네이지만 덕산리는 장수읍에 기대어 산다는 따위, 부분적인 예외는 있을 수 있다. 사암리까지의 물길이 어찌나 구절양장이던지 밀목재 하나 넘어 장수 가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백가구 되는 아파트 단지에서 몇몇 가구가 뒷 담장 쪽문을 통해 골목 가게와 거래한다고해서 아파트 상권이 그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야를 조금 넓혀 보자. 요천 사람들은 오수천 사람들과 동질성을 띄리라는 사실, 그에 비해 거리는 가깝지만, 함양이나 장수 사람들과의 간극은 작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짐작 가능하다. 섬진강과 낙동강, 섬진강과 금강의 물길이 만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강조하건데 그것이 "요천 사람들은 낙동강 금강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정맥 대간을 넘나들며 교류를 하기는 한다. 다만 그 교류의 결과로 생긴 부분적 문화를 담아내고, 그것을 다시 공통의 문화로 연마하여 나눠줄 구심점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반복하자면, 공통의 문화가 배양될 통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야기는 산줄기로 돌아와도 마찬가지이다. 강이 동질성을 품는 동안, 산은 이질성을 키운다 했다. 이 경우 이질성의 크기는 산줄기의 크고 높음에 비례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특정 산줄기가 물길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데 있다. 다시 말해 끊기지 않고 바다까지 뻗어있는 산줄기라야 '이질성'을 논할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문화의 동질성이란 - 몇번 강조했지만 - 직접교류 여부 보다는, 그 교류의 결과를 재분배해줄 공통의 물길을 갖고 있느냐하는 사실에 더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프면 그림을 보자. 요천 주민들이 오수천 사람들과 실제로 내왕하는 통로는 물길이 아니라 ㉮능선의 여러 재들이다. 아무리 물길이 편하다기로서니, 대성리 사람치고 남원지나 곡성 순창까지 내려갔다가 임실 오수로 거슬러 올라오는 이 많지 않을 터이므로 그렇다 (요천과 오수천의 합수 지역은 그림7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 대목에서, ㉮능선이 엄청나게 높고 험하여 도저히 사람이 넘나들 수 없는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말하자면 대성리와 오수는 직접 교류가 불가능한 여건에 놓여있다는 가정이다. 그렇게되면 두 지역은 동질성을 상실하게 될까? 약간의 영향은 있겠지만 동질성의 대부분은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직접 교류가 불가능하더라도 남원, 곡성, 순창, 임실 해서 서로의 문화를 전해줄 매개 즉 물길만은 여전히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능선이 물길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는 한, 높고 험한 것은 부수적인 장애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결론을 추스려보자. 정맥과 대간은 물길의 경계임과 동시에, 문화적 이질성을 구획하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높이나 험준함에 상관 없는 일이다. 정맥보다 높고 험한 지맥이 설사 있더라도(실제로 그런 경우는 별로 없지만) 그 영향력은 정맥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심하게 말하자면, 걷는 것이 이동 수단의 전부였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정맥 대간으로 구획되는 하나의 구역, 즉 하나의 강의 수역은 나름대로 하나의 국가였다는 개연성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정맥과 대간은 그처럼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길러준다. 우리가 산경표를 알아야하는 이유, 교과서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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