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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산줄기와만남/고지도

고지도 제작의 역사적 배경

by 두타행 2011. 6. 2.

고지도 제작의 역사적 배경

                                                                                     한영우(韓永愚)


Ⅰ. 서론
우리나라 고지도(古地圖)는 세계지도(천하도)·동아시아지도·전국도(全國圖)·도별도(道別圖)·군현도(郡縣圖 : 邑地圖)·관방도(關防圖) 등으로 구별할 수 있으나, 18세기 중엽 정상기(鄭尙驥) 지도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관찬지도(官撰地圖)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상기 지도의 출현 이후에도 그 성과를 흡수한 관찬지도가 영·정(英·正)시대에 여러 차례 제작되어, 18세기 말까지 지도제작의 주도권을 국가가 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말∼19세기 초의 학인 홍석주(學人 洪奭周 : 1774∼1842년)는 '우리나라의 지지(地志)는 중국에 비하여 매우 소략하지만, 지도(地圖)의 자세함은 중국을 능가한다'① 고 하여 우리나라 지도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는데, 현존하는 수 천 점의 조선후기 고지도는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고지도가 뛰어난 것은 '도(圖)는 형(形)이요, 서(書)는 언(言)이다. 형이 있고 나서 언이 있다'② 고 한 정조의 말에서 보이듯, 지도의 중요성을 국가가 충분히 인식하고 지도 제작에 임하였다는 데 원인이 있다.

지도 제작에 여러 분야의 전문가를 참여시키는 것도 지도 제작에 대한 국가의 성의를 말해 준다. 산수(山水)의 형세를 풍수지리적(風水地理的)으로 읽어내는 상지관(相地官), 거리를 측량하는 산사(算士), 지지(地誌) 전문가인 관리(官吏), 그리고 지도를 직접 채색(彩色)으로 그려내는 화원(畵員 : 지방의 경우 화사군관(畵師軍官))의 협력이 지도 제작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사찬지도(私撰地圖)는 이러한 협력 체제를 갖출 수 없어서 관찬지도를 토대로 재편집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 경우 거리 실측은 개인이 할 수 없지만, 편집 기술은 관찬을 능가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상기 일가(一家)나 정후조(鄭厚祚) 일가 그리고 김정호(金正浩)와 같은 우수한 지도제작자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관찬지도를 중심으로 그 편찬 배경과 우리나라 고지도의 풍수지리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려고 한다. 사찬지도가 우세한 19세기 이후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으며, 천하도류(天下圖類)도 논외로 해 둔다.


Ⅱ. 풍수지리적 특성
지도 제작은 토지측량 및 좌표(座標) 설정 등 편집 방법과 관련되는 과학의 발달에 따라 시대가 내려갈수록 정밀해진다. 지도발달사(地圖發達史)의 시대구분이 그래서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지도는 근대지리학이 수용되기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초시대적 특성이 발견된다. 그것은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 바탕을 둔 풍수지리적 관념의 투영이다.

우선, 우리의 국토를 살아있는 인체에 비유하여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규장각 소장) 하단에는 백두산(白頭山)이 인체의 머리요, 대령(大嶺 : 백두대간)이 척추요, 호남의 제주도와 영남의 대마도를 두 다리에 비유한 설명문이 보인다. 이러한 설명문은 모든 지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의 지도에서는 거의 공통적으로 대택(大澤:천지)을 안고 있는 백두산을 크게 강조하고, 거기에서 뻗어 내린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끊어지지 않은 척추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제주도는 우리 땅인 만큼 당연하지만, 우리 땅이 아닌 대마도도 적어도 지리적 관념으로는 국토의 한 다리로 인정하여 어김없이 그리고 있다.

조선후기에 풍수지리적 국토관을 정리한 『산경표(山經表)』에서는 우리나라의 산계(山系)를 백두대간과 장백정간(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체계화하고, 그 정맥의 이름을 수계(水系)를 기준으로 붙이고 있다. 또한 18세기의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이 「산수고(山水考)」에서 산은 하나에서 시작하여 만개로 나뉘어지고, 물은 만개가 합하여 하나로 된다는 표현도 국토를 음양분합(陰陽分合)의 생명체로 보는 시각이 담겨져 있다.③ 우리의 고지도는 바로 이러한 생명체론에 입각하여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그 생명체적 요소들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산수화(山水畵)의 예술적 기법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고지도의 풍수지리적 특성은, 실은 고려시대에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 정몽주(鄭夢周)가 쓴 <여진지도(女眞地圖)>라는 글에 '설립백산 남주원(雪立白山 南走遠)'④ 이라는 귀절이 보인다. 눈 덮인 백두산이 남쪽으로 멀리 뻗었다는 것이다. 태조(太祖) 때 이첨(李詹)이 쓴 「삼국도후서(三國圖後序)」(1396년)에도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산맥(山脈)이 태백산(太伯山)·소백산(小伯山) 등으로 이어졌다는 표현이 보인다.

8 도의 읍치(邑治)를 오방색(五方色)으로 채색한 것도 풍수지리 관념의 투영이다. 경기도(京畿道)를 중앙의 황색(黃色)으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남방의 적색(赤色)으로(약간의 예외도 있음), 강원도를 동방의 청색(靑色)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서방의 백색(白色)으로, 함경도를 북방의 흑색(黑色)(변형된 흑색)으로 채색한 것이 그것이다. 서울을 중심에 둔 방위(方位) 개념은 바다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서해(西海:黃海), 동해(東海), 남해(南海)로 표시되고 있다.

풍수지리는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불합리한 점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천형세(山川形勢)는 산(山)과 강(江)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설명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풍수지리는 땅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보고자 했다는 점에서 자연환경에 대한 애정과 외경심(畏敬心)을 북돋아준 것도 사실이다. 말하자면 풍수지리는 일종의 생명지리학(生命地理學)인 동시에 환경지리학(環境地理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고지도를 대할 때 과학적 정밀성에서는 현대지도에 못미치는 점이 있지만, 국토에 대한 애정은 오히려 고지도가 한층 강하게 유발시켜 주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고지도에 우리의 고유한 정서, 생명체적 국토관(生命體的 國土觀)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Ⅲ. 15∼16세기의 지도제작
조선시대에 지도제작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15세기와 18세기(英·正時代)이다. 문화의 융성과 지도 제작이 병행했음을 말해 준다. 15세기의 대표적 관찬지도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463년(세조 9년)에 시작하여 10년만에 완성된 양성지(梁誠之)와 정척(鄭陟)의 <동국지도(東國地圖)>이다. 이는 전국도와 도별도, 그리고 군현도까지 합쳐진 지도집(地圖集)으로 보이며, 성종(成宗)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아울러 조선왕조 초기의 국토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도집이 나오기까지에는 고려지도(高麗地圖)의 연장선상에서 이를 실측·보완하는 작업이 근 1세기간 계속되고 있었다. 고려시대 지도로는 지금까지 고려 전기의 <오도양계도(五道兩界圖)>, 공민왕 때 나흥유(羅興儒)가 중국과 우리나라를 합쳐 만든 지도가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밖에도 만국삼라(萬國森羅)와 우리나라를 함께 그린 <화이도(華夷圖)>가 있었음이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보이고⑤, 정몽주가 <여진지도>에 대하여 쓴 글도 있다. 또한 1071년(문종 25년)경 고려 사신(使臣)들이 송(宋)나라에 가서 그곳의 지방지도들을 구하고 다녔다는 기록이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와 심괄(沈括 : 宋人)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보이고 있어서, 고려 조정의 지도에 대한 관심이 비상했음을 말해 준다.

조선 태종 2년(1402년)에 의정부 대신(大臣)들이 주도하여 만든 <역대제왕혼일강리지도(歷代帝王混一疆理之圖)>는 고려시대의 <화이도>를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보이며, 이를 거꾸로 해석하면 고려시대의 지도제작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다만 현전하는 이 지도의 모사본(模寫本)에 백두산의 장엄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의 의문점이다.

조선왕조가 건국되어 영토확장과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어가던 세종조(世宗朝) 이후로 지도 제작은 새로운 차원을 맞이하게 된다. 중앙정부의 계획하에 전국의 수령으로 하여금 군현도를 그려 바치게 하고, 중앙의 지리 전문관료와 상지관, 화원을 파견하여 도별도와 국방요새지를 그리도록 하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앞서 소개한 양성지, 정척의 <동국지도>는 이러한 새로운 지도 제작 시스템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15세기에는 <동국지도> 이외에도 수십 종의 도별도 군현도 북방연변도(北方沿邊圖) 등이 제작되었음이 확인되고 있으며, 1454년(단종 2)에는 수양대군이 주도하여 정척, 양성지 등 지리전문가와 문인화가인 강희안(姜希顔), 상지관인 안효례(安孝禮), 산사인 박수미(朴壽彌) 등과 더불어 <경성도(京城圖)>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지리전문가 화가 풍수가 산사 등 각계 전문가들의 협동에 의한 지도 제작의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5세기 관찬지도는 <역대제왕혼일강리지도>를 제외하고는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16세기에 제작된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화동고지도(璜古地圖)>(규장각 소장),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인촌 기념관 소장) 등을 통해서 15세기 <동국지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지도들은 압록강·두만강의 수계 표현이 아직 미숙하지만 <역대제왕혼일강리지도>에 비해 개선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우리 나라 전도를 그린 경우 만주지역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15세기의 적극적인 고토수복정책(故土收復政策)과 만리국가(萬里國家) 의식이 지도에 반영된 결과이다.⑥

16세기에는 15세기와 같이 전국적인 규모로 지도를 실측, 제작한 일이 없지만, 16세기 중엽(명종대 : 明宗代)에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를 비롯하여 평양·성천(成川)·영흥(永興)·의주(義州)·영일(寧邊) 등 주요 북방지역의 지도를 각각 대형 병풍으로 제작하고 명신(名臣)들로 하여금 장편시(長篇詩)를 짓게 한 것은 북방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된 것을 보여준다.⑦ 이는 명종 대에 요동지방이 어수선하고, 국내적으로 서북지방에서 임꺽정(林巨正) 일당의 폭동이 격화된 상황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Ⅳ. 17∼18세기의 사회변동과 지도의 변화
16세기 말의 왜란과 17세기 전반기의 호란은 국방에 대한 관심을 크게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승리한 전쟁인 왜란보다도 칭신(稱臣:신하라 칭하는)의 굴욕을 받아들인 호란은 더 큰 충격과 복수설치(復讐雪恥)의 분발심을 자극하였다. 청(淸)과의 불편한 관계는 17세기 후반 내란에 휩싸인 청이 만주의 본거지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아울러 채삼(採蔘)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겹쳐 18세기 후반까지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 기간 조선정부는 서울 외곽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1712년의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 설치로 청과의 국경 분쟁을 일단락 짓고, 함경도·평안도를 비롯한 북방지역에 대한 진·성·보(城·鎭·堡) 등을 집중적으로 설치하여 북방경비를 대폭 강화하였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이른바 관방지도(關防地圖)의 제작이 홍수를 이룰 정도로 활발하였다.

한편 17∼18세기의 활발한 농지 개간과 상품유통경제의 발달도 지도제작의 활성화를 가져오는 큰 요인이 되었다. 서울과 그 외곽의 100리권 지역은 전국적 상업중심지로 변모해 갔고,⑧  압록강·두만강 연안 지역의 개발, 그리고 해안 도서지방에 대한 개발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국방과 상업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수로와 도로 등 교통로의 확장을 가져왔으며, 국토 방위의 범위가 내륙뿐 아니라 바다까지 포괄하는 이른바 해방론('海防'論)이 유행하게 되었다.⑨

18세기 중엽 신경준이 「도로고(道路考)」를 편찬한 것은 당시의 활발한 도로 확장과 관련이 있으며, 17세기 말 안용복(安龍福)이 울릉도 영유권을 확립시키기 위해 분투한 것은 조선후기 해방정책(海防政策)의 일면을 보여준다. 영토확장과 경제권의 확산은 국가 경영에 있어서 국방의 의미를 한층 다원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국방은 경제를 보호하는 수단이며, 외침과 더불어 빈발하는 내란에 대비하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국방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군사적·경제적 기초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각 붕당이 특정한 군영(軍營)과 연결되어 책성(築城) 등 국방사업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정치자금을 조달하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방과 치안, 경제발전과 붕당정치가 표리관계로 얽혀서 역동적으로 변해가고 있던 조선후기 국가경영에 있어서 국토의 공간적 파악에 도움이 되는 지지와 지도의 정밀한 제작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였다. 조선후기의 연속적인 지지및 지도제작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후기 지도는 세계지도, 동아시아지도, 우리나라 전국도, 경도도(京都圖), 군현도, 책성·설진(設鎭)과 관련된 관방도(關防圖) 등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이 지도들의 대부분은 국가의 중앙관청 혹은 지방감사·수령들이 주도하여 만든 관찬지도이며, 지도의 관리는 원칙적으로 비변사(備邊司)가 맡고, 일부를 모사하여 홍문관(弘文館) 등에 보관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 개인이 만든 사찬지도중에도 우수한 것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17세기 중엽 윤영(尹鍈:1611∼?)은 우수한 <북방관방도(北方關防圖)>를 제작했다고 하는데, 그는 숙종 초 유명한 북벌론자(北伐論者)이던 남인 윤휴(1617∼1680년)의 서형(庶兄)으로서 아마도 윤휴의 협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초의 황엽(黃曄:1666∼1736년)과 윤두서(尹斗緖:1668∼1715년), 18세기 중엽의 정상기(鄭尙驥:1678∼1752년)와 그의 아들 정항령(鄭恒齡:1710∼1770년), 그의 손자 정원림(鄭元霖:1731∼1800년)은 각각 황희·윤선도·정인지(黃喜·尹善道·鄭麟趾) 등 명문의 후예로서 근경남인(近京南人)에 속하는 지도제작자들이었다.⑩

이들은 가학(家學)의 전통과 남인 실학의 영향을 받아 지도 제작에 일가(一家)를 이루었지만, 역시 관찬지도를 모본(母本)으로 하여 편집 기술을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북학자(北學者)들과 교유하던 신경준(1712∼1781)·황윤석(黃胤錫:1729∼1791), 그리고 정일녕·정운유(鄭一寧·鄭運維:1704∼1772)·정철조(鄭哲祚:1730∼?)·정후조(鄭厚祚:1758∼1793) 등 해주 정씨 일문(海州鄭氏 一門)이 정상기 지도를 발전시키면서 마침내 19세기의 김정호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들은 상공업을 중시하던 북학풍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조선후기 지도는 관찬이든 사찬이든 조선전기 지도와 다른 몇 가지 특색이 보인다. 첫째, 한반도의 윤곽이 현대 지도에 한층 가깝게 정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꾸준한 북방 경영의 결과로 압록강·두만강의 수계와 함경도·평안도 지방에 대한 지리 파악이 심화되어 한반도 북부지방의 지형이 사실에 가깝게 표현된 까닭이다.

둘째, 해안지방과 도서지역에 대한 개발 및 관심의 증대로 해안선과 도서에 대한 표현이 정밀해진 것이다. 수 백 개의 섬들이 그려진 지도는 조선후기 이후에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셋째, 획정법(劃井法:方眼圖法)으로 불리는 좌표방식(座標方式)이 17세기 중엽 남구만(南九萬)에 의해 시도된 이후 10리 획정(10里 劃井), 20리 획정, 혹은 100리 획정법이 유행하여 군현도와 도별도가 한층 정밀해지고, 정밀한 도별도를 바탕으로 전국도의 수준이 자연히 높아질 수 있게 되었다.⑪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정상기의 백리척(百里尺) 축척법이 수용되면서 지도제작은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넷째로, 조선후기 지도는 산천형세나 행정중심지의 표현에 치중하던 경향을 벗어나 교통로, 면리(面里), 산성(山城), 봉수(烽燧), 사찰(寺刹), 서원(書院), 제(堤), 지(池), 장시(場市) 등 행정 국방 경제 문화에 관련되는 다양한 요소들을 담고 있는 지도가 적지 않아 종합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군현지도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다원화되었음을 보여준다.


Ⅴ. 17∼18세기 지도 편찬의 추이
조선후기에 제작된 수천 점의 지도와 지도집들에 대한 개별적 연구는 극히 초보적인 상태에 있다. 제작년대와 제작자가 밝혀지지 않은 지도가 많고, 문헌기록에 대한 조사도 매우 불충분하다. 문헌기록에는 보이나 현물(現物)이 없는 경우가 있고, 현물은 있으나 문헌기록이 없어서 양자의 통일적 연구가 매우 어려운 것이 지도 연구의 큰 난점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문헌기록에 의하면, 17∼18세기 관찬지도제작 사업의 각 왕대별 추이는 다음과 같다. 우선, 왜란이 시작된 선조 말년에서 영조 치세 전반기까지는 주로 국방과 관련된 관방지도가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지도 제작의 빈도수가 가장 높은 지역은 강화도와 남한산성이다. 이곳은 서울의 외곽 방어 요새지로서 이른바 국가 보장지처(保障之處)로 인식되어 거듭거듭 축성(築城) 사업이 이루어지고 그 때마다 지도가 제작되었다.⑫

특히 숙종 대(1674∼1720년)에는 강화도 수비가 대폭 강화되었는데, 이곳에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 농지를 확대하고, 상품경제의 활성화로 강화도 연안 수로가 서울 및 개성을 연결하는 상업중심로로 부상한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압록강·두만강 유역이 농지로 개간되고, 채삼 문제로 청과의 국경 분쟁이 잦아지면서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북방지역의 책성·설진이 활발해지고 이에 따라 수많은 관방지도가 제작된 것도 숙종 때의 일이다. 그 중에 1706년(숙종 32년) 이이명(李이命)이 제작한 <요계관방도(遼계關防圖)>(8폭병풍)는 관방지도의 백미(白眉)로 꼽힌다.⑬

그러나 남구만(영중추부사)이 1697년(숙종 23년)에 그린 <성경지도(盛京地圖)>나 이징명(李徵明:이조참의)이 1696년(숙종 22년)에 제작한 <해서오성지도(海西五城地圖)> 등도 우수한 관방지도로 보이며, 특히 남구만의 <성경지도>는 영조 때 제작된 여러 종류의 <서북피아만리지도(西北彼我萬里之圖)>의 모본(母本)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숙종 때의 관방지도는 물론 국방의 필요성에서 제작된 것이지만 당파(黨派)에 따라 목적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소론파(少論派)인 남구만이 영토확장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요계관방도>를 제작한 이이명은 내수외양(內修外攘), 즉 국내 정치의 안정을 통해 청에 대한 복수설치를 간접적으로 달성하자는 노론(老論)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숙종 대에 추진된 북방 개척 사업은 그 다음 영조(1724∼1776년) 치세에도 그대로 지속되고, 두만강·압록강 이남 지역의 확보뿐 아니라, 강북(江北)지역에 대해서도 청인(淸人)의 거주를 저지시키는 등 한층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였다. 정계비에 언급된 토문강(土門江)을 두만강과 구별하는 지도가 많이 제작되고, 고려시대 윤관(尹瓘)이 세웠다는 선춘령비(先春嶺碑)를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에 그려 넣은 지도가 유행한 것도 그러한 분위기를 말해 준다.

우리나라는 원래 동서의 폭원(幅員)이 만리가 된다는 만리국가의식(萬里國家意識)이 되살아났다.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之圖)>의 유행이 그것을 말해 준다. 이는 사락사(史學史)와 관련시켜 볼 때, 이종휘(李種徽:1731∼1797년), 이익(李瀷:1681∼1764년), 신경준(1712∼1781년) 등이 고대사의 강역을 새롭게 고증하고, 고조선 및 발해(渤海)의 고토 수복(故土收復)을 주장하는 사론(史論)을 편 것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⑭

한편, 서울의 인구 증가에 따라 영조 대에는 한강변과 서대문 밖 쪽으로 행정구역이 확대되는 변화가 있었고, '시전민(市廛民)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인식 아래 시민중심의 도성 방위체제가 성립되었으며, 도성의 보수와 청계천의 준설공사 등 서울 재건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서울의 위상 강화와 관련하여 많은 도성도가 제작되었다.

지도 제작과 관련하여 특기할 것은, 전국적 규모의 지리지와 지도편찬 사업이 영조 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1757년(영조 33년)에 정항령가(鄭恒齡家)의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와 팔도분도첩(八道分圖帖)을 모사하여 비변사와 홍문관에 비치케 한 것은 그 첫번째 사업이며, 1765년(영조 41년)에 전국적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편찬하면서 전국 군현의 열읍도(列邑圖)를 함께 수록한 것은 그 두번째 사업이다.

그리고 다시 1770년(영조 46년)에 신경준으로 하여금 정항령가 지도와 관찬 고지도를 참고하여 한층 정밀한 8권의 열읍도와 한 권의 팔도도(八道圖), 그리고 한 폭의 전국도를 모사케 하여 이를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로 편찬한 것은 그 세번째 사업이다.⑮ 이 사업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편찬과 아울러 국가의 국토 인식이 깊어진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기념비적 국가 사업의 하나로 기록될 만하며, 15세기의 국가적 지리지 및 지도 편찬 사업이 300년 만에 일대 중흥을 맞이한 것이기도 하다.

영조 대의 지지 및 지도 제작이 국토의 외연적 팽창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졌다면, 그 다음 정조 대(1776∼1800년)의 지지 및 지도 제작은 국토 공간의 정치적 재배치라는 데 의미를 두고 편찬되었다. 정조의 이같은 의도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1788년(정조 12년)에 시작된 『해동여지통재(海東輿地通載)』라는 전국지리지의 편찬과 1791년(정조 15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9권의 《동국지도집(東國地圖集)》이다.

먼저 『해동여지통재』는 착수한 지 8년이 지난 1796년(정조 20년) 경에 60권 정도의 분량까지 편찬이 진행되었으나 정조의 타계(1800년)로 완결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은 일정한 의례(義例)가 없이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달리, 서울과 그 인근지역을 <삼보황도(三輔黃圖)>의 예를 따라 기록하고, 지방 8도를 송나라 『태평환관기(太平환宇記)』에 준하여 편찬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삼보황도>란 한·당(漢·唐)의 수도 장안과 그 외곽지역을 하나의 도시권으로 묶고, 황제와 관련된 고적을 기록한 책이다.

정조는 서울과 그 외곽지역인 화성(華城), 개성(開城), 남한산성, 강화도를 한·당의 황제 도시인 장안과 비교되는 광의의 수도권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방 팔도를『태평환관기』에 준하여 서술한 것은 지방의 산천 형세와 경제·국방 상황을 지리고증 방법(地理考證方法)을 통해 실증적으로 기록하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었다. 정조의 새로운 지리서 편찬은 영조보다도 한층 격상된 왕권을 과시하고자 했던 그의 통치철학이 담긴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정조 원년에 청으로부터 수입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직방전(職方典)」에 실린 지지와 지도는 그의 지리서·지도 편찬에 큰 자극을 준 것으로 보인다.

1791년 경에 제작된 《동국지도집》은 모두 9권으로서 <총도(總圖)> 1권, <팔도분도(八道分圖)> 8권으로 되어 있다 한다. 말하자면 전도·도별도·군현도를 모두 포괄하고 있는 지도집이다.㉠ 또한 이 지도는 100리 획정으로 도를 그리고, 10리 획정으로 읍을 그렸으며, 남북극의 도수를 살펴서 원근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 지도제작 사업에는 누가 참여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해동여지통재』 편찬을 주동했던 정원림(鄭元霖:鄭恒齡의 아들)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밖에 1794년에 시작하여 1799년(정조 23년)에 완성된 「성도전편(城圖全編)」은 4도(4都)(경도·송도·강화도·화성)와 8로(8路)의 영(營), 곤, 읍(邑), 보(堡)를 그리고 사실을 부기(附記)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전국을 4도(4都)와 8도(8道)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가 엿보인다. 그리고 정조 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도성도(都城圖)>(족자. 규장각 소장)가 유일하게 북쪽에서 바라본 서울지도라는 것도 정조 대 지도 제작 분위기의 일면을 보여 준다.


Ⅵ. 결 론
19세기 이후의 지도발달사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으나, 관찬지도의 쇠퇴와 사찬지도의 활성화를 이 시기의 특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정호의 일련의 업적은 19세기 지도제작의 백미를 이룬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이 밖에도 <접성도(접域圖>(규장각 소장)를 비롯하여 정상기 지도를 발전시킨 우수한 지도들이 적지 않았음이 알려지고 있다. 또한 전국적 규모의 지도 제작은 없었다 하더라도 서울·평양·전주·강화도 궁전 등 대도시의 도회지 풍경을 풍속화 형식으로 그린 대형 병풍이 제작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국방이나 행정의 필요성에서 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국왕이나 감사(監司) 혹은 세도가(勢道家)의 위엄을 과시하고, 도시적 번영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의 지도 변화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지도의 대중적 수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분첩 방식(分帖方式)의 도입과 목판지도의 유행이 그것을 말해 준다. 김정호에 대한 전설이 사실 이상으로 과장되어 퍼진 것도 지도의 대중화에 공이 큰 그에 대한 대중들의 사랑이 쏠렸기 때문이라 보인다.

우리나라 고지도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1872년 경에 제작된 전국 읍·진(邑·鎭)지도이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450여장의 읍··진지도는 두 차례 양요(洋擾)를 경험한 대원군의 국방 관념에서 제작된 것이지만, 지도의 크기에 있어서나 그 속에 담긴 정보량에 있어서 과거의 어느 읍지도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지도는 각 읍의 성곽 형태·도시공간 배치·장시·사창(社倉)·포구·도로·촌락·고적·연못·우물·봉수·산성 등을 상세히 담고 있어서 앞으로 지방교통망 연구, 지방행정구역 연구, 지방경제 연구, 지방지명 연구, 도시구조 연구, 읍성과 산성의 구조 연구, 문화재분포도 연구, 지방방어체제 연구 등 여러 방면의 지방사 연구는 물론이요 파괴된 문화재 복원사업에도 중요한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역사지리」 제 7호 (1995. 8)

  < 註 >
① 『淵泉集』 第 6冊, 洪氏讀書錄, <東國地圖>(九卷)
② 『弘齋全書』 卷55, 雜著, 「題城圖全編」
③ 『山經表』에 대해서는 楊普景, 1992, '申景濬의 「山水考」와 『山經表』, 토지연구, 제3권 3호가 참고 된다.
④ 『圃隱集』 卷2, <女眞地圖>.
⑤ 『東國李相國集』 卷17, 「題華夷圖長短句」.
⑥ 15세기의 萬里國家의식에 대해서는 韓永愚, 1983, 「朝鮮前期 社會思想硏究」및 1983, 『朝鮮前期 史學史硏究』에서 밝힌 바 있다.
⑦ 韓永愚, 裵祐晟, 1995, 「朝鮮時代 官撰地圖 제작의 歷史的 背景」, 『海東地圖 索引 解說編』
⑧ 高東煥, 1993, 「18 19세기 서울 京江地域의 商業  發達」,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⑨ 韓永愚, 1989, 『朝鮮後期 史學史硏究』, 一志社, pp.296∼380
⑩ 吳尙學, 1994, 「鄭尙驥의 <東國地圖>에 관한 硏究」, 서울대 석사논문.
⑪ 韓永愚, 裵祐晟, 1995, 앞의 논문 참고.
⑫ 李相泰, 1991, 「朝鮮時代 地圖硏究」,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⑬ 李  燦, 1991, 『韓國의 古地圖』, 汎友社.
⑭ 韓永愚, 1989, 앞의 책.
⑮ 韓永愚, 裵祐晟, 1995, 앞의 논문 참고.
㉠ 洪奭周 『淵泉集』 第6冊, 『洪氏讀書錄』, <東國地圖>(九卷)』.
㉡ 『弘齋全書』 卷55, 雜著 「題城圖全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