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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산줄기와만남/고지도

우리나라 고지도의 특색

by 두타행 2011. 6. 2.

우리나라 고지도의 특색


원시인들도 땅에 간단한 지도를 그려 그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지도를 그려 여러 방면에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지도는 서양이나 중국 일본 등의 고지도와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다른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고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제작한 지도들인데 이 지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알 수 있다.

첫째, 산맥과 강줄기를 중요시하여 그렸다. <조선방역도>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고지도들이 백두대간을 비롯하여 산맥과 강줄기를 반드시 그렸다. 중국의 고지도나 일본의 고지도 등에도 산과 강을 표시하고 있지만 그들의 지도에서는 산맥이 아니라 산을 단독적으로 그렸는 데 비하여 우리나라 고지도에서는 산을 연첩하여 산맥으로 표시하였다. 이것은 신라 때 수입된 풍수지리의 영향 때문이며 지도를 제작할 때 풍수가인 상지관들이 꼭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세조가 보현봉에 올라가 서울 지도를 그릴 때에도 상지관인 안효례를 데리고 갔으며, 정척과 양성지가 전국을 측량하여 동국지도를 만들 때에도 상지관을 대동하였고, 조선 후기 산성을 쌓고 산성도를 제작할 때에도 상지관이 참여하였다.

둘째, 백두산을 반드시 표기한 점이다. 우리 민족은 백두산을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 여겨 신성시하였으며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이첨이 조선 초기에 삼국도를 만들고 쓴 서문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철령에 이르러 갑자기 솟아오르며 금강산이 되고 거기서 중첩하여 태백산, 소백산, 죽령, 계립령, 추양산이 되고 한 갈래는 운봉으로 뻗어 지리산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셋째, 고지도를 제작할 때 화공들이 참여하여 그렸기 때문에 지도라기보다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세조가 보현봉에 올라가 경성도를 그릴 때 화가 강희안이 참여했으며 정척이 이북 삼도를 양지하여 산천형세를 살필 때에도 화공을 대동했었다.

넷째, 조선시대 선조들은 우리나라를 3천리가 아니라 '만리의 나라'라 생각하고 만주까지 포함하는 지도를 그렸다. 당시 지리학의 제일인자였던 양성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우리의 국경선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나라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이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나라의 크기는 거의 만리(萬里)이다"라고 하였다. 또 노사신(盧思愼)이 쓴 『동국여지승람』전문에서도 우리의 국토가 만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서거정은 『동국여지승람』서문에서 "고려는 서북지방은 압록강을 못 넘었지만 동북지방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해서 고구려지역을 더 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에는 우리나라의 영토가 만주까지 포함하는 만리라는 영토 의식이 있었다. 이를 반영한 것이 <조선방역도>인 것이다.

                           『땅과 한국인의 삶』「땅과 고지도 발달」( 이상태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