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도, 어떻게 만들어져 왔나
발 딛고 선 곳에 대한 자기존재의 확인은 인간의 끊임없는 갈망인 듯 싶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의 소박한 의문을 물질 공간에서 위치 짓고 과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류는 '지도'라는 형태 속에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켜 왔다. 지도는 단순한 지리적 지식이기 앞서 오히려 정신적, 물질적 의미의 '길'을 찾는 오랜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는 눈앞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며 가보지 않은 땅에 대한 그리움을 키울 수 있다.
지도의 역사
우리 민족의 지도에 대한 관심은 꽤 오래다. 고대인이 무덤 안 벽에 별자리그림이나 고을그림을 그렸다는 문헌은 우리 민족의 '하늘 이치와 땅 이치'에 대한 본능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지리적 지식에 대해선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로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 요동성총(遼東城塚) 벽화에 그려진 <요동성도>엔 성곽의 유형과 시설, 도로 등이 그려졌고 민가와 산천이 적, 청, 보라, 백색 등의 색깔로 묘사돼 있어 4세기 이전의 지도형식을 말해준다. 백제의 지도에 관해선 『삼국유사』에서 『백제지리지』를 인용함으로써 백제의 지도와 질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승려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여행지리지로 꼽힌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우리나라 땅의 윤곽과 모양새는 대개 파악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동문선』의 「삼국도후서」에는 고려지도의 내용을 이렇게 설명한다. "삼국을 통합한 뒤에 비로소 고려도가 생겼으나,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산맥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철령에 이르러 별안간 솟아오르며...... 원기(元氣)가 화하여 뭉치고 산이 끝나면 물이 앞을 둘렀으니, 그 풍기(風氣)의 구분된 지역과 군현의 경계를 이 그림만 들추면 모두 볼 수 있으니......"
고려 말의 저명한 지도제작자였던 나흥유(羅興儒)가 고려지도와 중국지도를 그렸다는 기록도 전하는데, 고려후기로 올수록 지도의 정밀도가 높아짐은 조선초기의 지도로써 짐작이 가능하다. 고려인의 세계지리에 대한 지식은 당나라의 현장이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근거로 윤보가 만든 <오천축국도>에서 드러난다. 이제까지의 중국중심 세계관을 벗어나 인도와 중앙아시아로 그 시야를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고려 때의 지리서로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지리지가 현존하는 가장 오랜 지리지로 꼽힌다. 삼국시대 지방행정구역의 분리통합과정을 개관한 연혁지리책인데. 아직 자연지리적인 요소는 갖추지 못한 형태를 띤다.
조선 때 편찬됐던 『고려사』지리지엔 송나라와 원나라에서 전해온 몇 개의 지리서와 중국전도를 언급하고 있는데, 원나라를 통한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걸쳐 조선초기까지 우리나라의 지리적 조건은 풍수지리설과 관께가 깊다. 지리학자 전상운교수(성신여대)는 풍수지리설이 "궁궐과 사찰, 수도의 위치와 묘지선택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지리학의 과학적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음을 밝히는 한편 "지형과 지세에 대한 탐구에서 지형묘사와 관찰로 이어져 자연과학으로 발전하는 자극이 됐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말한다. 사실 산을 산맥으로 그리는 수법은 한국지도의 독특한 유형인데, 풍수설에서 사용한 묘도의 도법이 일반지도까지 파급된 결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고려 때부터 축적된 기술이 더욱 활발한 지도제작으로 이어지면서 시야를 세계로 넓혀 나간다. 태종 2년(1402)에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 이회 등이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최초의 세계지도로 등장한다. 이 지도에는 백 여개의 유럽지명과 약 5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적혀 있어 흥미로운데, 바다를 초록, 강과 하천을 청색으로 칠하는 등 아라비아에서 만들어진 지구의의 채색법과 비슷하여 당시 이슬람 과학문명과의 교류를 보여준다. 또 중국과 조선을 지나치게 크게 그려 유럽, 아프리카 대륙과의 균형이 맞지 않은 점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중화적 세계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아무튼 조선학자들의 세계지리학에 대한 결산이라고 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7세기 초에 마테오 리치가 <곤여만국지도>를 들여오기 전까지 사실상의 유일한 세계지도 구실을 한다.
지도의 시각을 우리나라로 좁혀본다면 이회의 <팔도도(八道圖)>가 가장 오랜 전도로서『태종실록』과 『양촌집』의 문헌으로 전한다. 하지만 과학적 측량에 의 한 지도는 세종 대에 이르러야 가능해진다. 발달한 천문관측에 힘입어 백두산과 마니산, 한라산의 위도를 측정함으로써 남북간 거리와 동서폭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그 첫 결과가 정척(鄭陟)의 <조선국회도(朝鮮國繪圖)>로 나타난다.
이 시기에 정척은 <양계지도(兩界地圖)>(1451)로 국경지방의 지도를 작성하고 양성지(梁誠之)는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1454)의 행정지도를 만드는 등 조선 땅을 직접 관찰조사하는 실측지도제작이 절정을 이룬다. 조선전기의 특징을 개괄할 때 세조 때까지의 지도가 주로 각 도읍과 산천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성종 때까지는 연변과 연해에 주력하여 해상교통을 위한 해도가 발달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지도들은 몇 가지 결점을 안고 있다. 함경, 평안의 두 변경이 부정확하다는 것은 흔히 지적되고 울릉도가 우산도 밖에 표시돼 있는 등 정확성에 문제가 발견된다.
이러한 결점을 보완한 대표적인 지도는 영조 때 실학자 정상기가 만든 <동국지도(東國地圖)>(1757)이다. 축척을 처음으로 기입했다는 점에서 평가되는데, 9폭 지도첩에 전국도와 8개의 도별도로 구성된다. <동국지도>는 신경준이 "척량촌도(尺量寸度)에 의한 정밀한 지도"로 평가했으며 이익(李瀷)이 "백리척을 축척으로 써서 그린 가장 정확한 지도"라고 찬사한 바 있다. 실지 <동국지도>는 육조와 행사로를 기입, 교통도와 해도의 구실을 겸하고, 산,강 경계선을 색깔별로 나타내 한눈에 전국의 지리현장을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한 현대적 방식의 특징을 가진다.
조선시대 지도의 백미라면 역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들 수 있다. 이제까지의 도별분포가 서로 도화방법(그리는 방법)이 다르고 축척마저 고르지 못해 들쭉날쭉인 것을 바로 잡고자 시작한 <청구도>(1834)제작이 <동여도>로 보완돼 이어지고 다시 이를 목판각한 <대동여지도>(1861)가 완성된다.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적 실측지도로 평가받는 대동여지도는 해안선과 지형묘사가 정확하고 산을 산맥의 뻗침과 산들의 집결, 독립된 산으로 구분하는 등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
<대동여지도>에서 온 나라를 굵고 가는 산줄기로 꽉 차게 표현한 것에 대해 지도 연구가 이우형(광우당 대표)씨는 "산을 믿고 의지하여 그로부터 흘러내린 물로 살아온 우리는 넓게 든 좁게 든 그 골에 모여 살았기에 산줄기로 둘러싸인 지역은 하나의 '생활문화군'이라는 권역적 의미를 말해준다."고 해석한다. 강유역을 이루는 산맥은 굵게, 아무리 덩치 큰 산줄기라도 큰 강의 줄기가 아니면 가늘게 표현하는 등 조선시대 지리서인 『산경표』의 기준과 일치함으로써 우리 조상들이 마음속에 내재한 산줄기 개념이 반영돼 있다는 설명이다. 김정호는 이밖에도 <대동여지전도><해좌전도(海左全圖)><도리도표(道里圖標)>의 조선전도 등 정교한 실측지도 목판본을 남겼으며 세계지도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당시의 세계지도는 초기의 중화적 세계관에서부터 새로운 세계관으로 이행하는 과도적 성격을 보인다. 마테오 리치에 의해 중국에 처음 서양지리학이 소개된 후 한역세계지도가 간행, 조선에 들어옴으로써 새로운 지리학, 세계관에 눈뜨게 된다.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는 조선에서도 모사,판각됐는데, 이후 <곤여전도>등의 세계지도에서 동서양반구를 각각 정밀한 원으로 그림으로써 조선인의 세계지도 지식에 또다른 혁신을 불러일으킨다. 김정호에 의해 모각된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1834)도 동서양반구의 세계지도인데 <곤여전도>와 순서를 달리해서 동반구를 전면에 그렸는가 하면 육지는 양각으로 희게 나타내고 바다는 음각하여 검게 나타내는 등 특색있는 조각으로 조선 전통지도 목판본의 양식을 살렸다.
그러나 조선시대 대부분의 세계지도는 천하도(天下圖)로 묶여지는 중국중심의 세계지도이다. 그 가운데 비교적 서구를 비중있게 다룬 것은 18세기말로 추정되는 <여지전도(輿地全圖)>인데, 동북아메리카가 없고 인도반도를 포함시켰으며 러시아를 매우 크게 그림 점이 독특하다.
지리지의 역사
김정호가 <청구도>의 지도유설에서 "지지(地志)는 지도의 장본(張本), 즉 근원이다"고 말했듯이 지지와 지도는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더욱이 당시는 "1촌 평방 속에 10리 평방의 상황을 파리머리만한 글자로 써도 한두 개의 강이름, 산이름을 넣기가 어렵다"는 김정호의 지적처럼 지지의 중요성은 필연적이었다.
조선 최초의 지리지라 하면 세종 14년(1422)에 맹사성,권근 등이 편찬한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里志)』가 있다. 각 도별로 연혁과 명산과 강, 토산물, 인구와 기후, 민속 등을 체계적 틀로 적고 있다. 이 내용을 증보한 <세종실록지리지>는 8도에 대한 방대하고 조직적인 인문지리 백과 사전으로 평가되는데, 이후 양성지는 『팔도지리지』에서 더욱 세밀하게 조사하고 있다.
지리서에서도 중국영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동국여지승람』(1481)에 강희맹, 서거정 등으로 하여금 시문을 삽입토록 한 점이다. 이 여지승람의 부족한 점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9)으로 보완되지만, 결국 '관찬지지(官撰地志)'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는 우리나라의 지리적 현상을 주체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돋보이는 지리서이다. 중국의 각종 문헌에서 우리나라의 지리에 관한 기사를 가려 뽑은 이 지리서는 16세기말 이후 등장하는 여러 지리지에 큰 영향을 미쳐 한국역사지리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이제까지의 지리지가 지리적 사실 자체의 기록에만 충실했다면 18세기에 나온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誌)』는 본격적인 인문지리서로서의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각 도의 자연지리적 특색을 과학적으로 언급하면서 그 첫머리에 우리의 지리적 특징을 "동서쪽이 다 바다요, 다만 북쪽일대가 여진과 심양에 통하고 산이 많고 평야가 적다. 그 백성은 유순하고 근직하나 기량이 적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택리지』이후 수많은 지리서 저술 가운데 김정호의 방대한 『대동지지』(1866년경)를 제외하면 주목할 만한 지리서는 찾기 힘들다.
지도제작 기법
조선시대 지도제작의 특징은 각종 지리지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조선 건국 후 국경확정에 따른 함길도 지도제작에서 도입한 과학적 실측조사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 정척은 상지(相地:풍수가) 및 화공들을 이끌고 함길,평안,황해 3도에 가서 산천의 형세를 그리고 주군의 거리를 실측하여 지도를 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 때 실측과정에서 "기리고차(記里鼓車)"라는 재미있는 기계장치가 등장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전해진 이 수레는 북치는 인형이 매달려 있어 10리를 갈 때마다 저절로 북을 쳐 거리를 비교적 정확히 잴 수 있다고 한다.
세조 때에 이르면 삼각측량기 발명으로까지 발전되는데 『문헌비고』에는 이를 "규형 및 인지의(印地儀)는 한마디로 땅의 거리를 재는 기구"로 규정함으로써 오늘의 삼각형 비례관계를 응용한 측량기기임을 밝히고 있다. 한양 지도 작성을 위한 삼각측량은 이후 실측지도제작에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실측에 있어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백리척의 축척을 표기한 <동국대지도>인데, 지도를 만든 정상기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축척법은 평탄한 곳은 백리를 1척으로 했으나 지형이 복잡하고 험한 곳은 간혹 120~130리를 1척으로 하여 그렸다"고 한다.
지도제작에 있어 또 하나의 획기적 발전은 <대동여지도>에 지도표를 명확하게 예시했다는 점이다. 도로를 나타낸 선 위에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명시했는데 김정호는 지도유설에 그 원리를 설명해놓았다. 이를테면 '지형의 넓고 둥근 도수를 나누는 분율', '이 곳과 저 곳의 형체를 바로잡는 준망', '거리수를 정하는 도리(道里)' 등의 원리인데 국토의 크기와 위치, 정확한 방위와 거리가 지도에 있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현대의 지도제작
지도제작에 현대적인 과학기술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청일,러일전쟁 때 일본 임시측도부가 군사목적으로 필요한 지역을 측도하면서부터다. 일제의 전국토지조사사업(1907)을 위한 지형제작이 이뤄지고 한일합방후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이 전국토의 지형도 제작을 맡았다. 이른바 이 땅의 모든 관리가 일제에 의해 이뤄진 셈인데 당시총독부에서 제작한 지도는 5만분의 1에서 5천분의 1 축척까지로, 전역에 걸친 722개 지도를 사진제판인쇄로 제작, 식민통치의 기초자료로 확보하게 된다.
개화기 이후 일제치하에서 거의 모든 문화재가 손실되는 와중에서 지도와 지리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신여대 허영환 교수는 "병인양요 때 강화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의 지도를 모두 가져감으로써 우리나라의 주요 지도가 몽땅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셈이다"면서 현재 가지고 있는 지도조차 무관심한 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지 못함을 안타까워 한다.
해방 후 지도제작은 다시 미군정청으로 넘어가는데 이 시기엔 전 지역에 대한 지도제작용 항공사진촬영이라는 고도수법으로 전국의 지형도,시가도를 만든다. 김정호 이후 우리 손으로 우리 땅의 지도를 만든 것은 1966년부터이다. 즉 국토개발을 위한 도로건설용, 도시계획용, 농경지정리용 지도인데. 5천분의 1 축척을 기본도로 하고 인문환경에 관한 사항을 지도 위에 도표화하는 국세지도를 여러 유형으로 만들게 된다. 그 이후 현재까지 더욱 다양해진 사회,문화활동에 대응하는, 가령 인구분포도라든가 택지소유율, 도로보급율, 고적분포도 같은 세분화된 지도 유형과 군사목적 등 특수지도가 발달하게 된다. 최근엔 인공위성에 의한 항공촬영기법으로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을 정확히 도면화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지도에 스민 정신의 근간은 그 속에서 자라나 살아온 민족의 신앙과 생활의식에 바탕한다. 산줄기나 강줄기를 특히나 강조했던 우리 고지도의 고유성은 예부터 산과 강을 끼고 살았던 우리 민족이 보다 쉽게 나라 땅을 이해하기 위한 정신에 뿌리를 둔다. 그런 점에서 최근 우리의 고지도에 새삼스런 관심을 쏟는 것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또다른 '뿌리찾기'운동의 하나로서 고무적이다.
「출판저널」(199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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