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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산줄기와만남/대동여지도&김정호

김정호전 - 조선어독본

by 두타행 2011. 6. 1.

김정호전 - 『조선어독본』의 원문



지금으로부터 백년(百年)쯤전(前)의 일이다. 황해도(黃海道) 어느 두메, 다 쓰러져가는 초가(草家)집 뜰에, 황혼(黃昏)을 띄고 섯는 한 소년(少年)이 잇섯다. 연하(煙霞)에 싸인 봉문(峰巒)이 서로 통(通)하야 잇는 저편을 아득히 바라다보며 무엇을 골돌이 생각하다가, 저근듯하야, 의문(疑問)이 가득한 얼골로 혼자 중얼거리기를,

"대체 저 산(山)줄기가 어듸서 일어나서, 어듸 가서 그첫는지, 그림 그린 것이라도 잇섯으면, 앉아서 알 도리도 잇스렷마는, 우리들 배우는 책에는, 도무지 그런 것이 업스니 엇저면 조을가."

이 소년(少年)의 성(姓)은 김(金)이오, 이름은 정호(正浩)다. 가난한 집에 태어낫스나, 연학(硏學)하기게 돈독하야, 한번 마음에 생긴 의문(疑問)은, 이것을 풀지 안코는, 그대로 내버려 는 성미가 아니엿다. 그럼으로 그 날 밤에도 전(前)과 같치 서당(書堂)에 가자, 곳 스승에게 산(山)에 대(對)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물어보앗다. 그러나 스승은, "그런 것을 알아 무엇할 것이냐." 하며, 다시는 댓구도 하야 주지 않앗다. 수업시, 그 자리에서는 그대로 넘겻스나, 궁금한 마음은 좀체로 사라지지 안앗다.

그 후(後) 몇 해가 지나서, 친(親)한 벗으로부터 읍도(邑圖) 한 장을 얻엇는데, 펴본 즉, 산(山)도 잇고 내가 잇고, 향리(鄕里)의 모양이 손금 보이듯이 소상하얏다. 그는 뛸 듯이 깃버하야 자기(自己)가 몸소 이것을 가지고 동내(洞內)마다 돌아다니며, 일일(一一)히 맞추어 보앗드니, 생각하는 바와는 아조 딴판으로, 틀리고 빠진 것이 만코, 부합(符合)되는 것은 극(極)히 드믈엇다.

너무도 실망(失望)한 그는, 그 후 경성(京城)에 정확(正確)한 지도(地圖)가 잇다는 말을 듯고, 상경(上京)하야, 좌청우촉(左請右囑)으로 궁중(宮中) 규장각(奎章閣)에 잇는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 한 벌을 얻엇섯다. 그러나 그 지도(地圖)도, 그가 다시 황해도(黃海道)로 가서, 실지(實地)로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그 소루(疎漏)함은, 역시 먼저 읍도(邑圖)와 하등(何等)의 다름이 업슴을 알앗다.

"이거 원, 지도(地圖)가 잇다 하나 이같치 틀림이 만아서야, 해(害)만 되지, 이(利)로움은 업슬것이다." 하며, 탄식(歎息)한 그는, 이에 자기(自己) 손으로 정확(正確)한 지도(地圖)를 만들기 외(外)에는, 다른 도리가 업는 것을 깨달앗다.

원체 지도(地圖)를 만드는 일이, 기차(汽車).기선(汽船) 할 것 업시 모든 교통기관(交通機關)이 완비(完備)한 오늘날에도, 오히려 만은 금력(金力)과 인력(人力)을 요(要)하는 지난(至難)한 사업(事業)이어든, 다만 한 사람의 미약(微弱)한 힘으로, 더구나 교통(交通)이 불편(不便)한 그 당시(當時)에, 이것을 감행(敢行)하랴는 그의 결심(決心)이야말로, 참으로 장렬(壯烈)하다 아니할 수 업는 일이다.

그리하야 춘풍추우 십여성상(春風秋雨十餘星霜), 그의 천신만고(千辛萬苦)의 긴 여행(旅行)은 시작되엿든 것이다. 본시 노자(路資)의 예비(豫備)도 업는 여행(旅行)이고 보닛가, 어느 때는 돌 우에서 쉬고, 어느 때는 나무 밑에서 잠을 잣다. 찌는 듯한 삼복(三伏) 더위에, 땀이 비오듯 흐른 때도 만앗고, 살을 에이는 듯한 치위에, 손발이 언 것도 한두번이  아니엿서다. 광막(曠漠)한 벌판에서 굼주렷으나, 며칠식 밥을 목 먹은 때도 잇섯고, 깊은 산중(山中)에서 병(病)들엇스나, 물 한 모금 얻어마실 도리도 업시, 신음(呻吟)한 일도 잇섯다.

그러나, 어듸까지 의지(意志)가 굿샌 그는, 백난(百難)이 앞에 닥칠 때마다 용기(勇氣)를 더욱 더 내여, 이 군(郡)에서 저 군(郡)으로, 이 도(道)에서 저 도(道)로, 십여년 후(十餘年後)에, 마침내 유명(有名)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원고(原稿)를 완성(完成)하얏섯다. 그동안, 팔도(八道)를 돌아다닌 것이 세 번, 백두산(白頭山)에 오른 것이 여덟 차례라 한다.

이리하야, 이십이첩(二十二帖)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원고(原稿)는 되엿스나, 본시 이것은 자기자신(自己自身)을 위하야 만든 것이 아니고, 널리 세상(世上) 사람들에게 알리랴고 만든 것이닛가, 다시 이것을 인쇄(印刷)치 안을 수 업슬 것이다. 인쇄(印刷)를 하랴면, 판(版)을 만들어야 한다.

원래 돈업시 하는 일이고 보니, 그 엇지 용이(容易)하랴마는, 철석(鐵石)과 같은 그가, 이런 것을 구애하랴. 즉시 경성(京城) 서대문(西大門)밖에 집을 잡고, 소설(小說)을 지어 얻은 돈으로, 근근히 일가(一家)의 생계(生計)를 삼아가는 한편, 하나 둘식 판목(版木)을 사 모아서, 틈틈이 그의 딸과 함께 지도판(地圖版)을 새겻다.

그리하야, 다시 십여년(十餘年)의 세월(歲月)을 걸려서, 이것도 완성(完成)하얏슴으로, 비로소 인쇄(完成)하야, 몇 벌은 친(親)한 친구에게 나누어 주고, 한 벌은 자기(自己)가 간수하야 두엇섯다. 그런지 얼마 아니되여,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남으로, 자기(自己)가 간수하얏든 것을, 어느 대장(大將)에게 주엇드니, 그 대장(大將)은 뛸 듯이 깃버하며, 곳 이것을 대원군(大院君)께 바첫섯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은 다 아는 바와 같치, 배외심(排外心)이 강(强)한 어른이시라, 이것을 보시고 크게 노(怒)하사 "함부로 이런 것을 만들어서, 나라의 비밀이 다른 나라에 루설되면, 큰일이 아니냐." 하시고, 그 지도판(地圖版)을 압수(押收)하시는 동시(同時)에, 곳 정호(正浩) 부녀(父女)를 잡아 옥(獄)에 가두섯드니, 부녀(父女)는 그 후(後) 얼마 아니가서, 옥중(獄中)의 고생을 견디지 못하얏는지, 통탄(痛嘆)을 품은채, 전후(前後)하야, 사라지고 말앗다.

아아, 비통(悲痛)한지고, 때를 맛나지 못한 정호(正浩)....., 그 신고(辛苦)와 공로(功勞)의 큼에 반(反)하야, 생전(生前)의 보수(報酬)가 그 같치 참혹(慘酷)할 것인가.

비록 그러타 하나, 옥(玉)이 엇지 영영(永永) 진흙에 무처 버리고 말 것이랴. 명치삼십칠년(明治三十七年) 일로전쟁(日露戰爭)이 시작되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우리 군사(軍士)에게 지대(至大)한 공헌(貢獻)이 되엿슬 뿐 아니라, 그 후(後) 총독부(總督府)에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에 착수(着手)할 때에도, 무이(無二)의 호자료(好資料)로, 그 상세(詳細)하고도 정확(正確)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야금 경탄(驚嘆)케 하얏다 한다. 아, 정호(正浩)의 난고(難苦)는, 비로소 이에, 혁혁(赫赫)한 빛을 나타내엿다 하리로다.


* 위 글은 고산자 김정호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을 하게 만든 『조선어독본』(조선총독부. 서울. 1934)의 5권 4과에 실려 있는 내용의 원문입니다. 원문은 당시의 글로 씌어 있기 때문에 맞춤법이나 용어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한자어는 한글로 바꾸고 괄호 속에 표시해서 읽는데 도움이 되도록 했습니다. 이 글은 「대동여지도의 연구」(원경렬. 성지문화사. 1991)에서 옮겼습니다. 김정호의 한자이름은 원문에서는 '호'자가 이 글에 쓰인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기에 쓰인 한자로 사용되고 있고, 또 한자가 이 문서에서는 표시가 되지 않아 불가피하게 바꾸었습니다. 참고로 원글자는 '밝다, 진득하다'는 뜻을 가진 '호'자로서 '흰 백(白)'과 '부르는소리 고(皐)를 합쳐 놓은 글자입니다.


* 글을 읽다가 조금은 낯선 낱말, 한자어 때문에 불편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따로 풀어 쓰는 글이나 설명을 붙이지 않은 이유는 원문을 보는데 좀 더 집중을 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메뉴의 다른 항목 '이제까지 알려져 있던 김정호'를 함께 읽어보시면 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읽기 편하도록 윤색하는 과정에서 있지도 않은 책과 친구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소설이 아닌 이상 사소한 부분일지라도 진실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이 아쉽습니다.

※ 이 資料는 안강님의 백두대간 첫마당에서 옮겨온 資料이며 자료를 사용하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자료를 使用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안강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