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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흔적 그리고 모습/책속의 글

지사(地師)에게 내 묘지를 물어보지 말라.

by 두타행 2016. 2. 3.

지사(地師)에게 내 묘지를 물어보지 말라.

 

 

마현의 황토마을은 회혼식 준비에 바빴다. 떡방아 찧는 소리, 고기 굽는 냄새, 전 부치는 냄새, 잔치를 치르기 위해 차일까지 쳤으며 온 동네 꼬마들이 모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즐거워하였다. 친지, 친척, 제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 틈에 가실과 비안의 모습도 보였다.

며칠 전부터 풍기가 재발한 약용은 며칠 동안 자리에 누워있던 참이었다. 가실과 비인이 안내를 받아 사랑에 들었다

학연이 약용의 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가실을 본 학연이 먼저 반가운 낯으로 그들을 맞았다. 이에 약용도 반가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몸이 무거워 쉽지 않았다. 학연이 가까이서 약용을 부축하며 물었다.

아버님, 심기가 어떠십니까.

매우 좋구나.

불편하시면 누워계신 것이 좋으실 듯합니다.

아니다. 오늘같이 좋은 날 내가 일어나야지.

손님 대접은 소자들이 할 것이오니 편히 쉬십시오.

그러나 약용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오랜만에 상면하는 가실을 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가실은 눈에 띄게 늙고 수척해진 약용의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느덧 많이 자라 처녀티가 물씬 나는 비안도 약용에게 절을 올렸다. 이에 약용은 모든 것을 다 이룬 듯 흡족한 마음이 되었다.

몇 사람이 달려들어 가실이 정성껏 지은 약용의 의복을 갈아 입혔다. 몸을 가누는 것도 쉽지 않아 손이 많이 필요했다. 약용이 다

스러져가는 소리로 학연을 불렀다.

학연아

, 아버님

이상하다. 어찌 이리 어두우냐.

학연은 약용을 급히 자리에 눕혔다.

아버님, 진정하십시오.

왜 이렇게 어두우냐. 혹시 밤이 아니냐.

오전입니다.

너무 어둡다. 호롱에 불을 붙여보아라.

이 무렵 청명하고 좋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모여 있던 손님들은 갑자기 일어난 변고에 눈이 동그래졌다. 辰時 初刻이었다. 바람은

온 세상을 쓸어갈 듯 몰아치면서 동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아버님!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홍씨는 약용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

아버님!

두 아들이 몸이 달아 불렀으나 답이 없었다. 巨人이 훌쩍 가버린 것이었다. 약용은 잠자듯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지사(地師)에게 내 묘지를 물어보지 말라.

약용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이에 앞서 임오년(1822) 회갑 때 약용이 조그마한 을 잘라 遺命을 적어두었으니 장례 절차였다.

 

이 유령은 꼭 예에 따를 것도 없고 꼭 風俗을 따를 것도 없고 오직 그 뜻대로 할 것이다.

살았을 때 그 뜻을 받들지 않고 죽었을 때 그 뜻을 좇지 않으면 모두 가 아니다.

하물며 내가 예경을 수십 년 동안 정밀하게 연구하였으므로 그 뜻은 다 예에 근거를 둔 것이지 감히 내 멋대로 한 것이 아니니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산 사람이 하여야 할 일은 상의절요(喪儀節要)에 있으니 마땅히 잘 살펴서 행하고 어기지 말아라.

 

 

이어서 발문을 붙여 말하였다.

 

천하에 가장 업신여겨도 되는 것은 시체이다. 시궁창에 버려도 원망하지 못하고 비단옷을 입혀도 사양할 줄 모른다. 지극한 소원을 여겨도 슬퍼할 줄 모르고 지극히 싫어하는 짓을 하여도 화낼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야박한 사람은 이를 업신여기고 孝子는 이를 슬퍼한다. 그러니 遺令은 반드시 준수하고 어기지 말아야 한다. 옆에서 떠들고

비웃는 자는 반드시 어리석은 자인데도 살아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시체는 말이 없지만 박학한 사람인데도 죽었기 때문에 업신여기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앞의 첩에서 말한 바를 털끝만큼이라도 어긴다면 불효요, 시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너희 학연, 학유야, 정녕 내 말대로 하여라.

 

 

41일에 마현 집 뒷동산에 장사를 지냈으니 곧 여유당 뒤편 지금의 양주시 와부면 능내리이다.

 

그로부터 74년 후인 융희 4년 순종대왕은 약용의 業績을 인정하고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을 추증하고 文度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황인경

小說 牧民心書 下卷 거인의 잠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