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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줄기를 찾아서/전북의산 산행기

1백대 名山중 하나인 강천산

by 두타행 2012. 4. 24.

1백대 名山중 하나인 강천산
강천사 주차장 → 병풍바위 → 깃대봉 삼거리 → 깃대봉 → 강천산(왕자봉) → 형제봉 삼거리  → 호남정맥길 → 북문 → 연대봉 → 송낙바위 → 강천제2호수 → 형제봉 →  강천산 →  현수교 → 강천사(왕자봉) → 강천사 주차장


- 전북 순창군 팔덕면 -

 


☞  산을 찾은 날 : 2006년 10월 28일(토요일)
☞  일기는 : 맑음
☞  같이 오른 사람 : 나 홀로


☞  산행지 교통이용편【자가용 이용】
▲  갈 때 : 전주에서 27번 국도이용 → 순창읍 → 순창에서 정읍방면으로 이동 → 순창군 팔덕면 →강천사 주차장
▲  올 때 : 갈 때의 역순


☞  총 산행소요시간 : 7시간(휴식시간 포함)

 

♣ 참고사항 및 구간별 설명
【전체개요】
- 강천산은 단풍으로 유명하여 가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며 강천사, 병풍바위, 현수교, 구장군폭포 등 볼 것이 많고 등산로에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어서 특별히 독도에 주의해야될 구간은 없다.
강천산 산행안내는 순창군청 홈페이지 문화관광/강천산군립공원을 참조하면 된다.

 

 

 

♬  頭陀行의 강천산 나들이 


강천산
1981년에 전국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16년전에 勤務하는 동료와 강천산을 찾았다
그때 만해도 볼품이 없었던 산이었다
그저 순창의 골짜기에 있는 산으로 記憶된다.
강천사도 그랬다.
아늑하고 조그마한 암자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잘 정비된 등산로에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고
또 병풍바위, 현수교, 구장군폭포 등 볼 것이 많고
단풍이 아름다워 전국 1백대 名山에 속하는 山이다.

 

동료와 山行을 하고
강천산 계곡에 좋은 자리를 잡아 야영을 했다
그런데 야영장 주변에 갑자기 독사 한 마리가 나타났다.
지금도 뱀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지만
그때는 무슨 心理가 발동했는지
손으로 독사 머리를 잡고 어떻게 해서...생략
야영하는 사람들 와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그것도 모자라 구워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름이 끼치기도 하지만
그때는 왜 그런 엉뚱한 行動을 했는지

 

강천산 丹楓이 생각이 났다
지금가면 절정일까 하는 생각을 갖고
강천산으로 향한다.

 

줄기에 올라서니
유명산답게 북적댄다.
서서히 紅葉으로 변해 가는 나뭇잎들이 아름답다.

 

홀로 걷는 산길은 그저 좋다.
욕심일지라도....
北門터에 올라섰다.
담양호와 추월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正脈길은 호수 하나를 끼고 멀리 돌아온다.
이 것이 山自分水嶺이다.

 

연대봉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제서야 골짜기에 불이 붙었다.

 

북적대도 山寺는 좋다
내년에는 날짜를 잘 맞추어서 또 가야겠다.

 


강천산과 관련하여 소중한 문화재가 하나 있다
보물 728호인 설씨부인권선문첩인데
만든 설씨부인은 지리학자인 여암 신경준 선생님의 10代
先祖가 되는 분이기도 하며 또 신숙주 선생의 弟嫂씨이기도 하다.

 

설씨부인권선문첩은............
이 권선문(勸善文)은 불교의 가람(伽藍), 사탑(寺塔)을 세우는데 시주(施主)를 권하는 글로 조선조의 문종, 단종, 세조대의 문신인 신말주(申末舟)의 정부인(貞夫人) 설씨(薛氏一玉川)가 만든 것이며, 설씨는 사직(司直) 설백민(薛伯民)의 따님으로 1429년(세종 11년) 순창에서 출생하였으며, 자질이 총명하여 여성으로서의 문장과 필재(筆才)가 탁월하고 정숙한 덕성을 갖추어 덕망을 높였다 한다.

설씨 부인의 남편인 신말주가,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에 상심하여 벼슬을 버리고 이곳 순창의 남산대(南山台)에 내려와「귀래정(歸來亭)」을 지어놓고 은중일 때 함께 내려와 지낼 때의 일이다. 성화(成化一明의 연호) 18년(성종 13년 - 1482) 봄 어느 날 밤 꿈에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 형씨(刑氏)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설씨부인 앞에 앉아 말하기를 "내일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너와 함께 선한 일을 짓자고 청할 것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따르되 게을리 하지 말아라. 이것이 너의 복(福)을 짓는 큰 근원이 될 것이니라"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과연 지난밤의 꿈과 같이 부인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약비(若非)라는 사람이었는데 부인을 찾아 온 이유는 이곳 순창의 명산에 사찰(寺刹) 을 하나 짓기 위해서라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산수(山水)가 절승(絶勝)한 광덕산(廣德山-강천산 계곡안의 남쪽 산)에 신허(信虛)라는 승려가 옛날 초가집으로 작은 절을 하나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거의 퇴락되었는데 지금 이 절을 지키고 있는 중(僧) 중조(中照)는 큰 뜻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아름다운 곳에 길이 보전할 절 하나를 새로 짓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며, 소승 약비(若非)도 이 아름다움을 탐내어「부도암(浮圖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세워 지키고 있으나 이 또한 초라하여 오랜 보전할 바가 못되어 매양 중조(中照)스님과 함께 힘을 합하여 새로운 절을 짓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량이 부족하옵기에 감히 부인께 시주(施主)를 구하려고 찾아 왔습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부인은 간밤의 꿈이 신험(神驗)함을 생각하고 이에 도와 줄 결심을 하였는데, 이에 소요되는 재정을 혼자서 감당할 힘도 없지만 원래 이러한 일은 천만(千萬)의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선근(善根)을 짓게 함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인은 손수 이 권선문(權善文)을 짓고 머리에 강천산(剛泉山)의 아름다운 경계 속에 세워질 암자(庵子)의 설도까지 그려 서화첩(書畵帖)을 만들고 약비(若非)로 하여금 많은 불신자(不信者)에게 돌려 시주를 구하게 한 것이다.

이 권선문첩(勸善文帖)의 꾸밈은 병풍 형식으로 양쪽표면과 내용이 16폭으로 되어 있으며, 그 크기는 가로가 19.8㎝, 세로가 40㎝로 이것을 펼쳐 놓으면 317㎝가 되며 6겹으로 배접하여 만든 첩면에 묵필로 쓴 권선문 14폭과 채화 2폭을 붙여서 만들었다. 권선문에서 설시부인은 유불제가(儒佛諸家)로 조예가 깊고 문장과 서화에도 우리나라 역사상에 여류문인으로 이름 있는 신사임당보다 72년이나 앞서고 있다. 그리고 이 권선문첩은 현재 고령 신씨(高靈申氏)의 종손(宗孫)인 신남두(申南逗)가 1990에 신축된 보호각(保護閣)에 다른 문화재와 함께 보관(保管)하고 있다.(순창군청 홈페이지) 

신라51대 진성여왕 원년(887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전통사찰

신라 51대 진성여왕 원년(887년)에 풍수지리설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도선국사가 보광전, 첨성각 등 사찰을 창건하였으며 그 후 고려 27대 충숙왕 3년(1316년)에 덕현선사가 오층석탑을 세우고 중창하여 사찰이 크게 번창하였으나 임진왜란(1596년) 때에 사찰건물과 연대암 등 12암자가 소실되었다.

선조 37년(1604년)에 소요대사가 다시 사찰을 재건하였으나 그 뒤 6.25 동란으로 1950년 12월 완전 소실되었으며 현 건물은 1959년 김장엽 스님이 대웅전, 관음전을 복원하였고 1978년 이경모 스님이 선방과 보광전을 건축하였으며 현재 김재덕 스님이 요사채와 객사를 복원하였다. 

강천사의 원명은 복천사(福川寺, 福泉寺)라 하였으며 또한 산세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할 형상이라 하여 용천사(龍泉寺)라고도 하였다.

강천사라는 이름은 선조때 학자 귀봉 송익필이 이곳에 유숙하며 "숙 강천사(宿 剛泉寺)"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으며 이때부터 강천사로 불리었다 한다.
1760년(영조 36년) 경진판 옥천군지에 의하면 불전이 3개소, 승방이 12개소이며, 명적암,용대암, 왕주암, 지적암 등 강천사에 속한 암자가 12개가 있었다 하니 그 당시 5백여 수도승이 살았다는 대거찰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