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보고서 - 7. 실전 독도법
정맥 종주는 지도에 표시해둔 마루금 따라 진행하는 등반이다. 기존의 등산로 여부와 상관 없는 산행이며, 따라서 독도 능력은 필수적이다. 뻔히 뚫린 길 두고, 마루금이 가리키는 잡목 숲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경우가 심심찮은 것이다.
길을 제대로 찾으려면 지도와 콤파스, 그리고 시야(즉 좋은 날씨)가 갖춰져야 한다. 만약 그 중 한가지만 택하라면 주저 없이 '지도'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좋은 날씨. 콤파스는, 있다면 좋겠지만 없더라도 경험과 육감이 어느 정도 막아 준다.
독도(讀圖)는 글자 그대로 '지도 읽기'이다. 콤파스를 이용한 후방교차법 따위 테크닉을 말함이 아니다. 지도 읽기 능력은 이론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반복되는 현장 훈련의 축적일 뿐이다.
예를 들어 보자면, '卍'표시가 사찰을 나타내는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卍' 표시를 얼른 발견하고, 그리하여 "5분 후에 오른쪽에 절이 보이겠군..." 하는 식으로 산행에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지도는 똑같다. 그러나 거기에서 얻어내는 정보의 양과 질은 천차만별인 것이다. 반복하건대 "주곡선 사이의 간격?" 하였을 때, "100미터" 하고 대답하는 '피동적' 지식이 독도에 기여하는 바는 많지 않다. 그보다는 등고선에 따라 산의 모양을 입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우선은 지도를 보며 '능동적으로' 정보를 얻어내는 훈련이 그 첫걸음일 것이다.
바르고 빠르게 지도를 익히는 방법 한가지만 들라면 그것은 채단(彩丹)이다. 채단이란 같은 높이의 등고선에 같은 색의 칠을 해두는 작업이다. 심이 단단한(깍아 쓰는) 색연필로 등고선 100미터 간격을 칠해 내려오면 되는데, 지도 전체를 칠하는 것보다는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삼사백 아래 까지만 칠하는 것이 시간상 경제적이고 시각상 효과적이다. 주황,고동,초록,노랑 해서 차례로 농담(濃淡)을 두는것은 부수적 요령이 되겠다.
채단을 잘 해두면 지도가 살아난다. 산줄기가 꿈틀거리는 것이다. 능선 계곡의 구별이야 물론 마루금만으로도 가능하겠지만, 높낮이가 떠오르지 않으므로 채단 해둔 지도에 비할 바 못된다. 진행선의 매 킬로미터마다 점을 찍어 두는 일 또한 해둠직 하다. 시간에 따른 진행구간의 예측은 방향 잡기에 뜻밖에 유용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독도법의 기초적 이론은, 그것만해도 책 한권 분량이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정맥 종주중 실전으로 겪었던 도움말 몇가지만 정리하겠다.
1. 지도는 출발 전에 읽어둘 것
채단, 거리 표시, 길 잃기 쉬운 곳의 점검 따위는 집에서 끝나 있어야 한다. 그것도 머리속에 담아두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반드시 표시를 해두어야 한다. 현장에서는 실제 산세를 살피는 일로도 바쁘기 때문이다.
2. 방심하지 말 것
콧노래 불러가며 걷는 산행으로는, 한시간 이내에 정맥에서 벗어날 확률 99% 이다. 수시로 좌우 지형을 살피고, 지도 보고, 거리 계산해야 한다. 정맥에서 길 잃지 않기는 정성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3. 삼각점을 믿을 것
지도는 항공촬영한 사진의 삼각점을 기준으로 제작된다. 따라서 삼각점 만큼은 믿어도 된다. 분명히 삼각점의 위치에 도착했다고 생각되더라도 막상 삼각점이 보이지 않는다면, 지도 탓을 하기보다 내 판단을 다시 점검하는 편이 낫다. 얼마 가지않아 삼각점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최소한 삼각점을 파내버린 빈 구덩이라도 남아있다.
4. 내리막 길에서 조심할 것
정맥 실전 독도의 핵심이다. "올라가고 있는 능선길에서는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는 원리에서부터, 파생되는 몇가지 응용전술까지, 몸으로 숙지해야할 사항이다. 이론적으로 "알고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실제로 써먹을 수 있어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항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오르막 능선길은 눈감고 올라가도 된다
정말일까? 우선 계곡의 경우부터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섬진강 수역 내에서는, 어느 곳에 종이배를 띄우더라도 모조리 섬진강 하구인 망덕리에 흘러내려온다. 그 말은, 계곡의 내리막길에서는 귀먹고 눈먼 종이배조차도 길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갈 때는 지도 콤파스 를 동원하더라도 제대로 길 찾기 쉽지 않다. 바로 나무가지 모양 구조의 특징인 것이다.
계곡과 역상 구조의 관계인 능선에서는 당연히 반대의 경우가 적용된다. 올라갈 때는 눈 감고 가더라도 봉우리에 닿는 반면, 내려갈때는 정신 바짝 차려도 곁가지로 빠지기 십상인 것이다. 단, 능선의 경우 자체의 굴곡이 있으므로 계곡처럼 획일적이지는 않다.
독도의 관점에서 볼 때 능선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산날'의 형태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주릉'의 형태가 그것이다.
'산날'의 경우, 부분적 굴곡은 대개 무시해도 될 정도이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길의 오르막에서 우리는 눈 감고 올라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내리막은 가장 어려운 구간이 된다. 일단 꼭대기에 오른 후 다음 시작이 까다로울 뿐 아니라, 도중에도 수없는 함정이 있다.
'주릉' 형태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지형으로, 지리산 주능 따위 우리가 흔히 능선이라 부르고 있는 종류이다. 이 때에도 물론 오르막은 안심해도 되는 길이다. 또한 내리막의 경우라도, 그 시작만 조심하면 된다는게 이 형태의 매력이다. 산날에서의 내리막 때와는 달리 재(峙)에 이르는 도중에 곁가지로 빠지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이다.
사람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위와같은 사항을 숙지하여, 긴장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말로는 다 아는 듯 하면서 실제로 써먹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오르막길임에도, 몇번씩 지도 꺼내 확인하고 있다면 그것은 헛된 지식일 뿐이다.
미사치 도착이 저녁 7시 37분. 정맥 종주의 경우, 야간 산행은 독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행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밤 11시 30분, 막영 예정지인 A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미사치에서 △859.9 까지(정확히는 ㉮포인트 까지)는 능선의 오르막, 거기에서 A까지는 계곡의 내리막 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눈 감고' 걸은 셈이었지만 한발짝도 틀리지 않았다. 단, ㉮포인트에서만큼은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했다. B방향 따위, 계곡으로의 첫 발을 잘못 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위 실전에서 눈여겨 볼 일은 '무사히 도착했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미리 지도에서 읽어내는 예측 능력이다. 만약 일몰 시각에 도착한 곳이 봉우리였고, 나아갈 곳이 내리막 능선이었다면 당연히 산행을 중지했을 것이다. 아니면 곧바로 계곡으로 내려섰던지.
결국, 정맥 종주에서 가장 까다로운 구간은 그림23 과 같은 곳이 될 것이다. ㉮능선의 주 발달 방향을 따라 걷는 도중의 A지점 쯤에서 방향을 바꿔 ㉯능선으로 바꿔 타야 하는 경우인데, A지점에서 재(峙)로 내려서는 부분이 특히 어렵다. 그때의 문제점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내려서는 첫 부분이 대개 사면 형태이다. 능선의 윤곽은 어느 정도 내려선 후에야 드러나는데, 거기서 몇 갈래로 나뉘는 산날 중 하나를 찍어내는 일이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2. 다행히 시작은 제대로 되었더라도 도중에 곁가지로 빠질 가능성 또한 비일비재하다.
3. 가장 고약한 일은, A지점 자체를 정확히 정의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길잃음의 대부분은 B나 C를 A로 생각하여, 출발부터 잘못하는 경우에 있다.
'능선의 내리막' 이라는 원리를 잘 생각해보면, 종주시 길을 잃는 곳은 진행 방향에 따라 정 반대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림23의 경우 ㉯에서 ㉮로 종주한다면, 'B→재(峙)'가 어려워지는 반면 '재(峙)→ A' 구간은 절대 길을 잃지 않는, 쉬운 구간이 되는 것이다.
위 사실들을 종합한다면, '길을 잃을 만한' 곳은 등반 전에 지도를 검토하는 것만으로 거의 다 찾아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을 미리 점검해두는 것이야말로 에너지 절약이고, 실수를 줄이는 첩경인 것이다.
사람의 방향감각은 뜻밖에 둔하다
우리가 방향을 구별하는 것은 주위의 지형지물에 의존하는 경험 덕분일 뿐, 본능적 감각 기능은 아닌 듯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북쪽을 향해 똑바로 걸었다고 주장하는데도 몸은 어느새 서쪽을 향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異常'을 못느끼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림24-1 처럼 그려진 지도를 보며 A에서 B를 향해 운전한다고 치자. 계속 직진만 했음에도 C에 도착해 있는 경우가 있다. 실제 지형이 24-2 구조라면 그렇게 된다. 지도는 축적이며, 따라서 지도에 표시된 도로를 실제 크기로 보자면 23-2에서 점선으로 그려진 정도일 수 있다. 즉 지도가 틀린게 아니고, 미세한 부분을 표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감각과 경험 뿐이다. 즉, 완만하게 꺾이고 있을 무렵 이상을 감지하거나, 혹은 분기점에 진입했을 때 '지도에는 없는' 우회전길을 발견하는 일 따위가 그렇다.
산행 중에도 마찬가지이다. 마루금은 거의 일직선인데 어떤 포인트에서는 90도로 꺾여야 올바른 방향인 경우가 있다. 방향 바뀜을 콤파스로 알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을 모니터처럼 들여다보며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실제적으로 콤파스보다 더 빨리 알아채는 것은 대부분 '느낌'이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하는 느낌의 축적이야 말로 독도의 노하우인 셈인데,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콤파스 자주 들여다보는 것이 최선이겠다. 특히 내리막에 관한한 언제나 조심해야한다. 똑바로 가고 있었는데 어느새 다른 길로 접어든 경우는 많고도 많다.
지금까지 대충 훑어본 실전독도법의 요점들을 모조리 종합한, '실패 이야기' 전해드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삼자(그림25). 보고서 22쪽의 '순창이냐, 담양이냐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추월산 지나 △710을 확인했을 무렵, 개스가 심해 시계(視界)는 불과 5미터 정도 였다. 목표는 먹색파선(전남,전북 道界) 따라 인삼밭재에 내려서는 것이었지만, 주위 지형지물에 의한 독도가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일은 포기하고 삼각점만 지나면 일단 우측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담양군 지역인 A계곡의 어느 지점엔가 내려서면, 거기서 좌회전해 계곡을 거슬러 올라 인삼밭재에 도달하기로 했다. 재에서부터는 오르막이므로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터였다.
작전대로 하기는 했다. 분명히 '우측(콤파스로는 동쪽)' 계곡으로 하산을 했고, 계곡에 이르자 좌회전해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일,이십분에 끝나야할 계곡이 가도가도 끝이 없는게 아닌가. 그제서야 우리는 사태를 재검토하기 시작했고, 결과 순창 땅의 B계곡에 내려서서 추월산을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계곡으로 내려섰던 시작지점에 있었는데, 그것이 먹색파선을 벗어난 ㉮포인트 쯤이었던 것이다(삼각점 부근의 등고선 방향을 잘 보기 바란다). 그 지점에서라면 좌,우 어느 쪽으로 내려서더라도 결과는 순창 땅일 뿐이었다.
내려설 때 분명히 콤파스 확인을 했었고(동쪽을 가리켰다), 그 외의 확인 방법은 없었기 때문에, 변명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지점에서 계곡으로의 하산 방향 또한 동쪽이었으므로 '확실하게' 속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주일 후 인삼밭재에서 능선을 오르는 방식으로 답사한 결과, 정맥은 먹색파선과도 달랐음을(그림 20-9) 참고 삼아 알려드린다. 그것은 물론 길 잃은 상황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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