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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산줄기와만남/조석필의 산경표를 위하여

산경표 이야기 넷째 마당 - 1. 산경표는 말한다

by 두타행 2011. 6. 28.

산경표 이야기 넷째 마당 - 1. 산경표는 말한다

 

 

현재 구해볼 수 있는 [산경표]는 박용수씨가 해설을 보태, 도서출판 푸른산(전화:02-730-1954)에서 찍어낸 1990년판 영인본이다. 그이의 견해에 따르면 [산경표] 원본(필사본, 즉 손으로 쓴 것이다)의 발간 년도는 1769년, 저자는 여암 신경준이라 한다.

저자나 간행시기에 관해서 다른 의견도 있다. 서지학적 논란은 그러나 산경표가 본디 갖고있는 값어치에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책에 수록된 1650여개의 지명을 어느 한 사람이 한 시기에 지었을리 없고, 1500여 산과 고개를 어느 한 사람이 다 돌아볼 수 없었던 일이기에 그렇다. 산경표의 저자는 따라서 이 땅의 모든 백성이라고해도 괜찮은 일이다. 시기적으로는 실학이 절정을 이루던 18세기의 시대적 산물이되, 또한 그 시기에 '문서화' 되었다는 것일 뿐 같은 개념의 지리인식이 수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음은 이미 말한바 있다.

산경표가 인쇄본으로 다시 출판된 것은 1913년, 육당 최남선 주축이었던 '조선광문회'의 고전간행사업 덕분이었다(푸른산의 산경표는 이 조선광문회판의 영인본이다). 여기서 1913년판 산경표가 태어나야했던 시대적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거기 산경표의 복권을 주창하는 논거의 열쇠가 들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술한대로 고또분지로가 [한반도의 지질구조도]를 발표한 것은 1903년 이었고, 야쓰쇼에이(矢津昌永)의 [한국지리]는 그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08년의 지리교과서에는, 마침내 그 '신식' 지리개념이 '전래의' 산줄기인식을 대신한다는 선언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산지(山地)는 종래 그 구조의 검사가 정확치 못하여, 산맥의 논(論)이 태반 오차를 면치 못하고 있으므로 일본의 전문 대가인 야쓰쇼에이의 지리를 채용하여 산맥을 개정하노라"

어느 쪽이 '정확한'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게 없다. 계속 살펴온대로 산경표의 오차라는건 나뭇가지 몇개 잘못 그려진 정도임에 반해, 산맥개념은 그 뿌리부터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으니 지리인식에 관한 한 그것은 말더듬이 쫓아내고, 장님에 귀머거리 들여놓은 격에 다름 아니었다.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 따라서, 그처럼 부당한 지리인식 왜곡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으로 읽혀진다. 혹자는 당시 고또의 연구 자체는 순수한 학문적 접근이었고, 다만 결과적으로 현재와 같은 왜곡상이 나타난것 뿐이라는 의견을 갖고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일본의 전문대가들은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 고쳐 매지 말라"는 우리의 속담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이들에 대한 사면(赦免)은, 다음과 같은 정황증거들을 검토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첫째, 토끼그림 사건이다.

고또는 지질구조도 뿐만 아니라 '토끼그림'도 잘 그렸다. 즉 '한반도가 토끼처럼 생겼다'는, 소위 토끼형국론을 처음 편것이 고또분지로 였는데, 거기에 곁들여진 해설은 다음과 같다.

"...(토끼와 지형의 대비 부분은 생략)... 조선인들은 자기나라의 외형에 대해 '형태는 노인의 모습이며, 나이가 많아서 허리는 굽고 양손은 팔짱을 끼고 지나(支那)에 인사하는 모습과 같다. 조선은 당연히 지나에 의존하는게 마땅한 일이다' 라고 여기고 있다. ...(후략)..."

한반도가 토끼처럼 생겼다는 것은 지질구조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당시의 신학문인 지문학(地文學,지질학)의 대가가 나서서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될 일일뿐더러, '조선인들의 생각'이라는 주석까지 달아 펼치고 있는 조선의 자기비하론(自己卑下論)을 부탁한 사람도 없었다.

아무리 시대상황이 어려웠다 한들, 제 나라 땅을 '나이 들어 허리 굽은 노인'으로 생각하는 이 또한 없었을 터이니 과외(課外) 분야에서의 일견 치졸하기까지한 고또의 얕은 수작들은 결국, 본업인 '지질구조도'의 순수성까지 의심 받게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또의 전횡에 대해 그 무렵 육당 최남선은 소위 '맹호형국론'을 들고나와 반격을 했다. 옆의 그림은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봐야한다는 그이의 주장을 받들어 그린 것인데, 주장의 배경은 산경표를 다시 출간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시대적 저항정신으로 봐야 할 것이다.

둘째, 일관된 '백두' 말살 정책이다.

지질구조도는 어떻게보면, 지리학의 무대에서 '조선의 자존심' 백두산을 지워버리기위해 고안되었다는 억측까지 낳게한다.

"실존하는 산을 밀어버릴 수는 없고... 그렇다면 백두의 산줄기는 가장 짧은 길을 택해 산맥선을 잡자... 그리고 이름도 백두만은 피하자..."

위 문장은 물론 글쓴이 임의로 지어낸, 당시 상황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일 뿐이다. 그야 어쨌거나 결과는, 나라에서 가장 컸던 산줄기가 가장 짧은 길을 따라 동해바다에 빠져들고 있음이 사실이다. 산맥 명칭 또한 '마천령'인 것이다.

산맥지형도가, '백두'의 상징성을 폄하하고 있다는 흔적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백두대간의 분해' 및 그에 따른 '기둥 산줄기 무게중심의 분산'이다. 이에 관한 얘기는 자리를 따로 만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셋째, 쇠말뚝 사건 따위, 여타의 정황들이다.

마을 혹은 민족의 정기가 서려있다고 믿어지는 명산 정수리 곳곳에, 두 척(尺) 넘는 쇠말뚝(斷穴鐵柱라 한다)을 촘촘히 박아놓은 것이 일본인들이었고, 수도 서울의 목줄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 세웠던 것 또한 일제의 광신적 풍수였다.

조선 지세의 경락을 끊고, 민족정기를 말살코자 획책했던 이러한 행위들은 비록 고또라는 한 자연인이 저지른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식민 지배 일본의 공통적 정서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그러한 정서가, 토끼 그림 그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한 일본인 식자(識者)의 학문에 끼쳤을 수 있는 영향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에게 맏기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