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산줄기와만남/조석필의 산경표를 위하여

산경표 이야기 첫째 마당 - 2. 예로부터 우리에게는

by 두타행 2011. 6. 16.

산경표 이야기 첫째 마당 - 2. 예로부터 우리에게는

 

 

▣ 예로부터 우리에게는
우리에게는 고유의 지리학이 계승 발전되어오고 있었다. 그것이 [산경표]에 나타나 있는 대간과 정맥이다. 한 민족이, 생존의 근간인 땅에 대해 아무런 인식 없이 살아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 대간과 정맥

선조들은 산과 강을 하나의 유기적인 자연구조로 보고, 그 사이에 얽힌 원리를 찾는데 지리학의 근간을 두었다. 1769년 여암 신경준이 펴낸 것으로 되어있는, [산경표(山經表)]라는 지리서에 나타난 1대간 13정맥은 그러한 노력의 한 결실이다. 물론 산경표 이전에도(16세기 朝鮮方域地圖), 이후에도(19세기 大東輿地圖) 같은 원리를 이용한 지도들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 말은 대간이나 정맥이 어느 개인의 돌출된 아이디어가 아니라, 축적된 지리 인식의 한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 산맥

산맥이라는 용어는 일제가 조선 강점을 기정사실화 해가던 무렵인 1903년, 일본인 지리학자 고또분지로(小藤文次郞)의 손에 의해 태어났다. 그이는 조선의 지질을 연구하여 [한반도의 지질구조도]라는 것을 발표하였고, 거기에 기초하여 태백산맥 소백산맥 따위의 산맥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족보로 따지자면 그러므로 대간과 정맥은 우리나라 지리학의 적자(嫡子)인 셈이고, 산맥은 외국 입양아 쯤 된다(이런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산경표의 복권을 위하여!' 라는 구호의 뿌리를 우리는 이와같은 적서(嫡庶)논쟁에서 찾아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적자라 하더라도 그가 '무능력자' 라면 모든 권리를 입양아가 계승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 예를들어 모종의 음모에 의해 호적이 바뀌었고, 게다가 입양된 아이가 집안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경우 - 라면 사건의 전말을 가려볼 필요가 있다.

요는 '어느것이 우리것이냐' 보다는 '어느것이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냐' 하는 점이 중요한데, 이 부분을 분명히 하기위해 우선 입양 과정부터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 지질 구조도

고또가 우리나라 땅을 조사한 것은 1900년 및 1902년 두차례에 걸친 14개월 동안이었다. 한 나라의 지질구조를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그만한 기간에 완전하게 조사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3년에 발표된 한 개인의 이 지질학적 연구 성과는, 향후 우리나라 지리학의 기초로 자리잡아 산경표를 대신하여 지리교과서에 들어앉게 되었다.

고또의 연구는 분명 지질학적인 것이었다(근대적 의미의 지리 조사가 시작된 것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일이다). 또한 남의 나라 땅을 새로운 방법으로 조사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기간에 이루어진 개인적 성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지질학이 민족의 지리학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 대목에서 눈여겨볼 것은 다음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지질학적 연구가 선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추세에 의한 학문적 욕구로 볼 수도 있으나, 식민지 지하자원의 수탈을 염두에 둔 우선 사업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둘째, 현실의 지리와 어울리지 않는 지질구조의 성급한 도입에 다른 의도는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그것이 실수였건 의도적이었건, 지질학이 지리학의 뼈대로 자리잡는 순간부터 우리나라 국토인식의 왜곡, 문화전통의 왜곡, 역사의 왜곡하여 총체적 민족자존심의 왜곡 내지는 상실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