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경표 이야기 둘째 마당 - 1. 산의 원리, 물의 원리
일단 산에 올라보자. 좌, 우 양쪽이 다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곳이 능선이다. 능선은 산의 양쪽 사면이 만나는 지형인데, 지붕으로 치면 용마루에 해당하는 곳이다. 능선 중에서 가장 높은 곳(솟아 오른 꼭지점)을 산봉우리, 가장 낮은 곳(내려 앉은 꼭지점)을 재(峙)라 한다. [봉우리-능선-재-능선-봉우리-능선...] 하여 길게 뻗어나간 지형을 우리는 그냥 '능선'이라 부르기도하고, 그 규모가 아주 클 때는 산줄기라 하기도 한다. 능선의 형태는 다양하다. 작은 계곡의 합수점을 향해 곧장 떨어지며 짧게 끝나버리는 지능이 있는가하면(보통 '산날'이라 부른다), 땅끝에서 백두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큰 규모의 것도 있다.
이번에는 내려가보자. 하산길은 보통 재에서 시작된다. 한 10분 쯤 내려오면 이끼 낀 바위 틈새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계곡이 시작되는 곳이다(그 물길의 발원이다). 계곡은 알기 쉽다. 물 흐르는 곳이 계곡이다. 조금 더 내려가면 옆의 계곡을 합쳐 세력을 더한 물길은 소리가 커지고 너비도 굵어진다. 이윽고 산을 벗어나(실은 더 큰 산줄기 안에 있는 것이지만), 내(川)가 되고 마침내 강을 이룬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계곡이 끝나고 내(川)가 시작되는 지점 쯤까지는 대개 다리품을 팔아야 차를 얻어 탈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살고 길도 제법 뚫려있는 '세상'은 산이 아니라 물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방 안에 드러누워 이번 산행에서 보았던 사실들을 정리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몇가지 규칙이 떠오를 것이다. 일단 그러한 공통적 '사실'들을 나열해 보고, 거기에 얽힌 '원리'를 추론해가기로하자.
지리적 사실
1) 능선에는 물이 없다
2) 계곡은 물길 머리에 있는 능선(峙)보다 반드시 더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3) 두 능선 사이에는 반드시 계곡이 하나 있다. 또한 두 계곡 사이에는 언제나 능선이 하나 있다
4) 물길은 끊기는 법 없이 이어져 흐른다
인문적 사실
5) 능선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6) 사람은 물가에 산다. 게다가 물길이 커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
사람 사는 이치를 따질 '인문적 사실' 자료는 나중에 써먹기로 하고, 우선 그림3을 보며 '지리적 사실' 부터 조리해가기로 한다. 그림은 우리나라 진안군 팔공산 부근의 실제 지형을 마루금(능선)과 물길로만 표시한 것이다. 필요한 부분은 자세히 그렸고 그렇지 않은 곳은 생략하기도 했다.
1)과 2)에서,"물길은 능선보다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는 말은 "능선에는 물이 없다"는 말과 결국 같다. 덧붙이자면, 물의 원천은 산이라는 사실, 즉 산은 물길의 젖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계곡에서, 강에서 하루 종일 흘러다니는 물방울 하나 하나는 모두 산에서 스며 나온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3)이다.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능선과 계곡이 1:1 대응하여 톱니바퀴처럼 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 상황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A지역만 떼어 마루금 따로, 물길 따로 그려 보았다. [그림3-가]에서, 빈 자리에 물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만 있다면 성공이다. 그렇다면, [그림3-나]의 빈 자리에는, 산들이 솟아 뻗어가는 모양이 어렵지 않게 읽혀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두 그림을 번갈아 보는 동안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사진과 네거티브 필름! 그렇다. 능선과 계곡은 '네거티브 필름과 사진'처럼 뗄 수 없는, 역상(逆像)구조의 관계이다.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관계이다. 지리 인식의 모든 원리는 이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음과 양의 차이는 있을망정 맞물린 산과 강의 '나무모양 구조' 만큼은 똑같은 것이다. 필름을 보면 인화될 사진을 짐작할 수 있듯, 강줄기를 보면 산줄기의 흐름을 짐작 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바로 "강이 흐르듯 산도 흐른다" 는 정의(定義)이다.
4)에서 강은 끊기지 않고 이어져 흐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강(江)이라는 필름을 인화한 사진 격인 산에도 대응하는 흐름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다만 일정하게 내려 흐르는 江과는 달리, 오르락 내리락 하기 때문에(그래도 크게 보면 일관되게 오르고 있다) 얼핏 그 맥을 알아채기 어려울 뿐일 것이다.
'지리적 사실' 1) 4)는 산을 이해하려면 강을 보면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강줄기를 분류하고나면 산줄기는 저절로 나뉜다는 사실도 가르쳐준다. 지리 공부에 있어 강이 제공하는 두가지 이점은 '흐르는 방향이 눈에 보인다'는 것과 '그 줄기 또한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상추막이골에서 종이배를 띄워보라. 임하 쯤 흘러내려가던 종이배가 고중대 계곡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를 볼 수 있겠는가? 결코 없다. 강은 그처럼 흐름과 줄기가 눈에 보인다. 따라서 물길을 파악하는 일, 결과적으로 산줄기를 아는 일은 이제 시간 문제일 뿐이다.
마루금 : 지도상에, 능선을 따라 그은 선. 즉 능선의 지도상 표시. 그림에서 굵은 선으로 그려진 것들이 마루금이다. 일본의 독도법 책을 베낀 어떤 이는 '지성선(凸線)'이라 했는데, 말맛이 마땅치 않아 저자가 제안하고 산악인들과의 합의를 거쳐 사용하는 용어이다 |
'우리산줄기와만남 > 조석필의 산경표를 위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경표 이야기 둘째 마당 - 3. 산도 흐른다 (0) | 2011.06.16 |
---|---|
산경표 이야기 둘째 마당 - 2. 강은 흐른다 (0) | 2011.06.16 |
산경표 이야기 첫째 마당 - 3. 무엇이 다른가 (0) | 2011.06.16 |
산경표 이야기 첫째 마당 - 2. 예로부터 우리에게는 (0) | 2011.06.16 |
산경표 이야기 첫째 마당 - 1. 시작하며 (0) | 2011.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