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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도우미/등산지식

[스크랩] 1. 등산과 알피니즘 - 자연과 등산 그리고 산에 왜 오르는가

by 두타행 2011. 5. 6.

1. 등산과 알피니즘 - 자연과 등산 그리고 산에 왜 오르는가

 

1 자연과 등산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우리는 끝없이 발전하는 문명속에 살고 있다. 이 문명의 최종목표는 인간이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인가 보다. 그 결과 환경보존을 한다고들 하고 있지만 자연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결국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그 때가 얼마쯤 뒤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가 되면 우리의 후손들은 틀림없이 머리만 비대해지고 근육은 숟가락만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아져 있을 것이다. 설마 하겠지만 현재와 같은 문명의 발전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틀림없는 현실이 될 것이다.

울창한 숲, 맑은 계곡과 호수는 없어지고 바다조차 처참하게 오염될 것이며 이미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속에서 도시문명속에 길들여지고 편안함과 쾌락(안락)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모두 원하는 만큼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콘크리트, 자동차, 기계, 전자 등이 뒤범벅된 도시에서 동물보다 훨씬 더 많이 노동을 하며 문명과 돈의 노예가 되어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주말이면 밀린 잠을 자거나, 콘크리트 교회, 극장, 레스토랑, 커피숍 그리고 기껏해야 콘크리트 콘도 등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이고, 여가이고, 취미이고 인생을 사는 행복일까?

우리가 적응하고 진화해야 할 목표는?
자연속에서의 생활을 모르고 성장한 젊은이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단지 더럽고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연을 싫어하며 마치 도시가 진짜 고향인 것처럼 안락을 느낀다. 이 들이 이것을 진짜 본능으로 인식하고 도시문명에 적응해 간다면 앞서 말한 무서운 결과가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욕구는 유전정보를 서서히 변화시키고 우리의 후손들은 도시문명에 맞게 진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벌써 진행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은 아직도 먼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대자연속에서의 생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큰 체격과 강인한 근육을 가지고 있고, 도시에서 태어난 우리의 2세들도 그렇게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가 도시문명속에서 살게 된 것이 몇 년 되었다고 벌써 유전인자가 변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유전인자가 대자연속에서의 생활에 맞게 되어 있다면 왜 우리는 도시문명을 좋아하고 끝없이 안락을 추구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동물보다 더 수준이 낮은 과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삶의 행복이 부와 명예와 무노동과 안락함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기주의적 욕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화하고 적응해야 할 목표는 끝없는 안락을 쫓는 도시문명이 아니고 대자연과의 조화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몸은 자연의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자연의 기운을 원하고 있다.
우리의 몸속에 있는 유전정보는 대자연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알맞게 되어 있고, 우리의 신체도 아직까지는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에 알맞은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도시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본질을 모르는 불행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도 때때로 분위기 좋은 자연환경을 접할 때면 '아! 좋구나'하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왜 좋은가는 모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살고 있어도 주말이면 대자연속에서 지내다 와야 한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시간의 자유, 즉 주말은 평생동안 몇 번 없다. 1년에 52번, 그것도 약속이 있고, 잠자야 하고 결혼식에 가야하고... 결국 1년에 몇 번. 이런 사람들은 결국 그 대가를 몸으로 치루게 된다. 내 몸이 원하는 자연을 외면하고 오염된 문명속에서 몸을 굴리게 되면 신체는 병이 들고 정신은 척박해 진다. 그리고 후손에게까지 '친도시문명'이라는 인자가 깊이 각인된 유전인자를 물려주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 자연속의 모든 것은 아름답다. 어떤 이들은 멋지고 웅장한 풍경이나 아름다운 단풍은 좋지만 깊은 숲속의 제멋대로 자란 나무나 수풀들이 서로 얼켜 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나뭇잎 썩는 냄새나 흙 냄새가 좋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수년전 파리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독일 뮌헨에서 밤 기차로 파리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유럽농촌의 새벽풍경에 취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풍요로운 감흥에 젖어 들었다. 완만한 구릉과 숲, 농가, 시냇물... 그러나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에펠탑, 마르세이유 궁전 등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이것을 만들기 위해 고생했을까 자연은 또 얼마나 망가뜨리고 이런 생각만 들었다. 이런 것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풍요와 아름다움을 모르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자연속으로 가면 우선 공기가 다르다. 새벽공기는 그 중에서 최고이다. 만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만 보고도 내가 그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안락을 위해 필요이상 다른 것을 괴롭히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고 싶다. 도시속에서의 어떤 만족과 열매도 자연속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시간의 흐름속에 오묘하게 변화하는 자연은 풍요롭고 그 속에 있고 느끼는 나 역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아웃도어 라이프 (OUT-DOOR LIFE)
선진국민과 후진국민을 구별하는 여러 가지 척도 가운데 자연을 즐기는가가 있다. 선진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주말이면 자연속으로 가서 생활한다. 별장, 통나무 오두막, 캠핑 등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아웃도어(OUT-DOOR)활동을 즐긴다.
이미 이들은 진정한 삶의 풍요는 자연속에서의 생활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가운데에도 주말을 도시에서 썩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 가운데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지만 모두 하류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웃도어 라이프(OUT-DOOR LIFE)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냥 깊은 숲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등산, 낚시, 캠핑, 카약/카누, 래프팅, MTB, 트레킹... 그 중에서 최고는 등산일 것이다. 왜냐 하면 산은 자연의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 아웃도어 라이프 인구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즐기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등산을 통해 자연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에 등산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업그레이드(UP GRADE)된 것이다.

등산은 왜 즐거운가?
우리 인간의 유전인자속에는 신체의 모든 능력을 향상 시켜라 라는 신호가 들어 있을 것이다. 먼 옛날 원시시대 때부터 자연속에서 뛰고 달리며 힘을 쓰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강인한 체력과 운동능력은 삶과 후손을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축구나 농구와 같은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축구를 좋아하는가 물으면 재미있으니까 라고 할 것이고 왜 재미있냐고 물으면 답변이 궁색해 질 것이다. 나는 그 근본적인 이유를 신체능력의 향상이라는 유전신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올림픽 경기는 바로 유전신호의 시험장이다. 우리 인간은 모든 운동능력을 종목별로 끊임없이 향상시키는데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뛰고, 달리고, 힘쓰고... 등의 운동능력외에 잘 올라가는 능력 또한 우리 유전신호가 계속 향상시킬 것을 지시하는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올라가는 것은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이다. 갓난아이가 무조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만 하고 아이들은 높은 담벼락이나 나무를 오르며 놀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암벽등반을 즐긴다.

왜 산에 오르는 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도시문명과 자연, 안락과 노동, 풍요와 각박함 등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들의 기준은 보상에 있다. 보상이 없는 행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축구나 농구는 운동의 즐거움이라는 보상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등산은 힘들기만 하지 보상이 없다고 생각한다.
축구나 농구도 체력을 사용하는 고통이 있다. 등산중에 힘드는 것은 축구나 농구에서 힘드는 것과 다른 것일까 우리가 산을 선택했다는 것은 남들은 잘 모르는 유전신호를 해독한 것이다.

등산은 모든 놀이 가운데 최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연속에서의 생활에 가장 충실하기 때문이다.
등산은 삶을 일시적으로 산으로 옮긴 것이다. 등산으로 삶을 업그레이드 한 우리는 김영도 선생님께서 말했듯이 사람을 분류할 때, 재산, 지위, 직업, 성별, 성격 등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것은 관심 밖이다. 우리는 산에 다니는 사람, 안 다니는 사람으로 분류한다

 

2 산에 왜 오르는가?

내려올 것을 힘들게 왜 올라가나?
1924년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앞두고 엔드류 어빙과 함께 정상 600미터 아래에서 실종된 조지 말로리는 에베레스트원정을 떠나기 전, 필라델피아의 한 강연에서 어느 부인의 당신은 왜 위험하고 힘들며 죽을 지도 모르는 산에 갑니까 라는 질문에 산이 그곳에 있으니 오른다.(Because it is there.)'라는 불멸의 명언을 남겼다.(그후 75년만인 1999년 에베레스트 정상부근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됨)

당시 말로리는 갑작스런 부인의 까다로운 질문에 당황스럽고 귀찮은 상황을 벗어나고자 아무생각 없이 재치로 받아넘긴 답변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산악인이 남기고 떠난 짧은 한마디는 등산의 본질을 가장 함축성 있게 설명한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산이 있고 내가 그 산을 오른다. 이것은 자연 더 나아가 우주의 존재와 이곳에 있는 인간의 활동을 설명한 것이다.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파고들면 결국에는 우주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된다.

아직 아무도 이러한 의문을 풀지는 못했지만 인간은 그 속에서 다양한 삶을 영위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 산에 올라가나 라는 질문은 우주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인 셈이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자연(우주)이 있고, 그곳에서 인간이 생활하고 있다. 라는 말이기에 조지 말로리의 대답은 명언이며,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산에 다니는 우리는 내려 올 것을 힘들게 왜 올라가냐 라는 질문을 곧 잘 받곤 한다.
이런 질문에는 말로리의 명언과 비슷하게 죽을 것을 왜 살고 있냐 라고 반문하면 어떨까 등산의 본질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등산은 곧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으로만 생각한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노라면 숨은 차 오르고 다리의 근육통도 심하게 느끼게 된다. 이런 고통을 사서 고생한다는 식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이 고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별것이 아니다. 아무리 등산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신체의 손상이 오는 것도 아니고 재산의 손실을 자져다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견딜 수 있는 한도까지 참으면 되는 것이다.

육체적 고통이 따르는 다른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생각해 보면 축구, 농구, 테니스, 조깅 등,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운동들의 신체적 고통이나 운동의 강도를 등산과 비교하면 결코 약하지 않다.
그러나 당신은 힘들게 테니스를 왜하냐 라고 묻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건강에 좋기 때문에 운동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운동하며 즐거워하고 건강해 지려는 이유는 앞장의 등산과 알피니즘 - 자연과 등산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유전정보속에는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고 능력을 향상시켜 후손에게 훌륭한 신체적 능력을 물려 줘라 라는 유전신호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등산은 다른 어떤 운동보다도 장점이 많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등산은 무엇이 좋은가?
등산은 운동으로서의 장점을 살펴보아도 다른 운동에 비해 좋은 점이 많다. 첫째 유산소 운동으로 경쟁 없이 자신의 페이스에 알맞게 조절해 가며 서서히 부하를 높여 나가므로 인간생활에 필요한 운동으로서 가장 알맞은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산이라는 대상이 주는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은 운동의 효과를 더욱 높여 주며 도시속에서의 운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서적인 효과를 함께 얻을 수 있다.
또한 숲이라는 환경은 도시생활에 찌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많은 것은 제공해 준다.
식물이 만들어낸 오염 안 된 산소와 음이온이 가득한 공기 그리고 휘튼치드와 같은 갖가지 물질이 우리에게 유익함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울창한 숲이나 산에 가면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상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일주일에 1번만이라도 오염된 도시를 벗어나 산에 가면 오염된 신체를 조금이라도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구는 커다란 자석이며 지표상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자기장이 흐르고 있으며, 우리의 신체는 이 자기장에 생체리듬을 맞추고 적당한 생리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에 생활하는 우리는 수많은 전자파 공해속에 적당한 전자파의 흐름과 균형이 깨지고 있어 최근 그 위험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또한 겹겹이 둘러친 콘크리트 구조물은 지표상에 흐르는 자기장을 차단하고 있으며, 고층건물이나 고층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은 더욱 더 지표 자기장과 차단되어 생활해야만 한다.
실제로 고층에 오랫동안 지내다 보면 머리가 아프거나 무기력해지는 증상이 발생한다.

우리는 막연하지만 땅의 기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먼 조상들 때부터 지내온 환경 즉 땅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신체가 원하고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등산은 차단된 땅의 기운을 강하게 받는 좋은 기회이다.
야영을 하면 더욱 좋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필자는 매 주말 등산을 하고 있지만 간혹 휴일에 부족한 수면을 취하기 위해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늦잠을 자곤 한다. 그러나 산에서 야영을 하면 아무리 늦잠을 자려고 해도 아침이 오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땅과 가까이 수면을 취했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이 되었다는 신체반응일 것이다.

납, 카드늄, 수은 등 중금속은 대부분 발암물질이며 신체에 과다하게 축적되면 각종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환
경이 오염되어 감에 따라 우리의 몸은 이러한 중금속이나 유해물질에 점차 오염되어 가고 있다.

우리의 몸은 원래 유해물질이 들어오면 신진대사 작용을 통해 자동으로 배출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중금속은 쉽게 배출되지 않아 지속적으로 쌓여 가지만 등산중에 흘리는 진땀을 통해 이러한 중금속이나 유해물질이 신체 밖으로 배출된다고 한다.

암이나 당뇨병, 그 밖의 불치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등산을 통해 완치하거나 호전시키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동안 온갖 현대의학의 치료법을 모두 사용한 후 마지막으로 산을 선택하여 건강을 되찾은 것이다.
등산이 건강에 좋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우리도 산과 자연을 떠나 도시에서 살면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있다.
우리가 지내야할 환경은 도시가 아니라 먼 조상들때부터 지내온 산과 자연인 것이다. 그래서 물고기가 물을 찾아 퍼덕이듯이 우리는 산을 찾는 것이다.

무상(無賞)의 행위
등산이 신체적인 건강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최초로 오른 8,000m인 안나푸르나(8,091m) 초등에 참여한 리오넬 테레이는 무상의 정복자라는 저서에서 등산은 '무상(無賞)의 행위'라고 하였다.
현대산업사회에 만연된 경제논리, 보상의 논리속에서 인간의 끊임없이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지만 한편으로 정신이 피폐해져가고 있다.
이익이 없고 반대급부가 없는 행위는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고 효율적인 것 같지만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한 경제. 사회 구조속에서 순수한 인간성의 상실이 심해지고 있다.

등산은 그 행위의 특성상 많은 시간과 재화 그리고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일부 등산가는 생계나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지만) In-put 과 Out-put (투입과 산출)으로 저울질한다면 매우 미련한 짓이며, 비생산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원래 비생산적인 놀이에 관심이 많다. 그것을 우리는 취미활동이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복잡하게 얽힌 산업사회의 노예가 되어 과중한 일에 시달리고 있다. 원래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지금처럼 많은 시간을 일에 빼앗기지 안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학자가 동물들이 살기 위해 투자하는 노동의 시간을 연구해 보았더니 인간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사자는 하루에 1시간정도만 사냥을 하고 남는 시간은 자유롭게 보내고, 대부분의 다른 동물도 하루중 몇 시간만 일을 하며 삶을 유지한다고 한다. 인간만이 8시간이상(출퇴근시간과 가사노동시간을 합하면 더 늘어난다)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먼 원시시대에는 지금처럼 많이 일을 하지 않았고, 동물들이 자연의 풍요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듯이 인간도 자연의 풍요와 여유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며 살았을 것이다. 지금도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전원생활이나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간적 여유를 가지는 것을 보아도 도시산업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일만 하며 살 수 없다. 여유시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각자 자신이 원하는 놀이에 몰두하며 풍요로운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풍요로운 삶이 경제적인 가치추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편협한 인생관일지 모른다.
많은 부를 쌓고, 그것을 바탕으로 안락한 삶을 원한다거나 지위에 집착하여 일생을 그것만 쫓아다닌다는 것은 불행한 삶일 것이다. 결국 부와 욕심은 세상에 남겨 놓고 자신은 땅에 묻히는 것이며 과도하게 이런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자연을 괴롭히게 된다.

일주일동안 일만 하다가 주말이면 낮잠 자고 휴식하고... 그렇게 일생을 보낼 것인가 일 말고 자신이 순수한 열정으로 몰두할 수 있는 취미활동, 이것이 바로 무상의 행위인 것이다. 각박한 생존경쟁의 틀에서 일탈하여 감성의 자유, 시간의 자유, 공간의 자유를 마음껏 즐기기는 것이 진정한 삶의 풍요일 것이다.
등산은 사람이 즐기는 무상의 행위가운데 제일 상급일 것이다.
우리의 고향인 자연속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가 적응하며, 오묘한 변화를 즐긴다. 그 속에는 꿈이 있고, 준비가 있고, 철학이 있고, 우정이 있고, 열정이 있고, 사색이 있고, 쾌감이 있고, 좌절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극복이 있고, 휴식이 있고, 회상이 있다. 우리가 원하는 또 다른 순수한 인생이 있는 것이다.

출처 : 보정산방
글쓴이 : 여수동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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