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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흔적 그리고 모습/두타행의세상사는이야기

내 고향이 사뭇 그립다

by 두타행 2011. 5. 4.

내 고향이 사뭇 그립다

 

故鄕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나의 할아버지가 태어나셨고 또 나의 아버지가 태어나셨고 그리고 내가 태어나서 줄곧 자란 그곳,
어떠한 說明이 필요 있을까.
자라면서 자기 인생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만들어지고 또 그 추억을 바탕으로 자신을 키워가며 꿈을 키웠던 곳, 고향........
그래서 고향에 대한 추억은 가슴속에 늘 생생하게 살아 있고 언제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였다.
이제는 영원하리라던 고향도 時間이 지나면서 빛바랜 옷처럼 퇴색돼가고 꿈꿨던 追憶들도 뇌리에서 희미해진다.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찹찹하고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곤 한다.
나의 고향은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하거마을 이었고 전라북도민의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고향인 용담면은 물론 인근 면소재지까지 1995년도에 수몰이 되어 용담댐이 돼 버렸다.


누구나 고향 하면 아무런 이유 없이 가슴이 뭉클하고 또 한없이 포근하게 느껴지고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태어나서 자라난 곳 때문이 아닐까
나의 고향은 산골마을 이었다.
지금은 좋은 도로가 뚫렸지만 어릴 적에는 비포장길이라 읍내로(전북 진안, 충남 금산) 일을 보려 갈려면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의지한 채 반나절이 걸리는 산골마을이었다.
미루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고 흙먼지가 펄펄 나는 신작로가 생각이 난다.

 

 

나의 고향은 금강 상류였다.
동네 밑으로 아주 깨끗한 주자천이 흘렀고 천위에 지어진 태고정은 정말 아름답고 운치 있는 정자였다.
특히 여름이면 어른, 아이 할 것이 더위를 식히기에는 더 없는 장소였다.
나의 고향 여름에는 추억거리가 참으로 많았으니.........
주자천에서 수영을 하다가 귓속으로 물이 들어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고,
또 친구들과 강변에 나가 민물고기를(꺽직어, 딸치, 쏘가리, 가라지 등) 잡아 어죽(어죽 : 쌀과 민물고기를 넣고 죽처럼 끓인 것)을 끓여 먹던 일,
또한 밤에는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고동을(다슬기) 까먹었던 일,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때 그 맛은 잊지를 못하니..........
겨울에도 추억은 늘 우리 뒤를 따라다녔다.
냇가에 얼음이 얼면 썰매와 얼음 배를 타고 놀던 일,
또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썰매를 만드는 일하며 자치기, 변사리 등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며 추위도 모른 채 하루 종일 밖에서 보냈다.
참으로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았다.


5일장이 섰던 나의고향........
장이 서는 날이면 참으로 구경거리가 많았다.
옷가게와 이불집들이며 돼지국밥집, 대장간, 번데기장수 아줌마, 아이스깨끼(아이스크림), 원숭이약장사, 고무신가게, 나무장사 등등.....
한참을 돌아봐도 풍성하고 볼거리가 많은 5일장 이었다.
또 여자들이 있는 술집들을 창문 틈으로 구경하던 일..........
늦은 오후 장이 파하면 생선 한두 마리와 석유지름(호롱불용) 한 두 되를 사 가지고 고갯길을 넘어가던 그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5일장은 어린 우리들에게 참으로 재미있고 신기하기만 하였다.


이렇듯
고향이란 단어만 들어도 한없이 정겹게 느껴지고 가슴이 울컥할 때가 있으니 고향은 그 어떠한 대가도 없이 우리가 아무 때나 포근하게 늘 쓸 수 있는 모자가 아닐련지
언제라도 쓰면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고 또 비가 내릴 때는 머리가 젖지 않도록 해주고 쓰다가 싫증이 나면 그냥 걸어 놔두어도 되고...
고향은 모자와 같아서 언제 들어도, 또 언제 가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고 살면서 늘 곁에 두는 단어가 고향이다.


아무 때나가도 반겨주고 포근함과 풋풋한 정이 숨쉬는 고향,
수몰 후에도 고향에 살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와룡리 쪽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고향을 뜨지 않으신 분들과 살고자 하셨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는지 몇 년을 같이 사시다가 가정형편으로 인해 새로 마련한 보금자리를 잃게 되고 또 아버지께서 갑작스런 병환으로 운명을 달리하여 슬픔을 맞게 되니 한 귀퉁이라도 남아 있던 고향의 토대가 없어져 버렸다.
아버지를 잃은 후에도 간혹 고향이 그리워 다녀오면 반겨주는 이 없이 그저 가득 찬 호수만 바라볼 뿐이며 휑한 마음과 함께 쓸쓸함이 가득하다.
북녘 땅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은 통일이 되면 찾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지만 우리 수몰민들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절망밖엔 없다.

 


한 마을에서 幸福의 터전을 일구고 삶을 같이 해온 친척들과 이웃들 그리고 친구들....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어디에서도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더러는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고향을 떠난 이후 세상을 달리하셨다는 이야기를 접하면 씁쓸하기만 하다.
고향.......
이 두 글자만 들어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울컥 가슴이 메어지는 것을 보면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고향의 특유한 향수 때문인 것 같다.
풋풋한 땅에서 같이 웃고 울던 그 분들의 모습과 목소리가 그립다.
내 고향 용담
핑구재, 수박다리, 송림다리, 소요대, 양바위, 성재, 매봉재, 달기재 아름다운 이름들을 빼앗겼다.
태고정이 사뭇 그립다.

 

 

                                                                                                                2010년 6월 20일


※ 참고사항
내 고향 용담은 이러했다.
용담은 삼국시대에는 물거현(勿居縣)이라 불렀으며 757年인 통일신라시대에는 청거(淸渠)라 불렀으며 진례현(오늘의 금산)의 속현이 되었다.
1413년(太宗13年) 남원도호부의 9현중의 하나로 현감을 두었으나 1656년 (孝宗7年)에는 다시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으며 명칭도 옥천(玉川)이 라고 부르기도 했다.
애초에는 군내면, 동면, 서면, 남면, 북면등 5개면이었는데 고종 32년에 용담군이 되어 9개면 143리를 관할 하였으니 소재지인 군내면, 지금의 동향면인 일동면, 이동면, 주천면이 된 일서면, 이서면, 정천면인 일남면, 이남면, 안천면인 일북면, 이북면 등 이었다.
1914년에는 진안군에 통합되어 용담면이 되었다.
용담면은 구 용담군의 군내면인 월계리, 호계리, 수천리, 와룡리와 이북면 일부인 송풍리가 관할구역이 되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용담의 백성은 소박하고 꾸밈이 적다 」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기(州記)에도「땅은 궁벽하고 하늘이 깊으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노후하다. 구름다리가 산에 걸리고 돌길은 시내에 연해 있다. 백성은 드문드문하며 푸른 절벽이 만겹으로 겹쳐있다 」고 하였다. 또 용강산(龍岡山)과 마산담(馬山潭)을 소개하고 「현(縣)의 동남쪽 두물이 서로 모이는 사이에 용담이 있어 현명(縣名)으로 취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아래의 사진들은 수몰되는 고향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보기 위하여 만든 사진첩이며 올려진 사진들은 스캔받은 것이다.

- 사진을 보니 옛날 고향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마을회관 옆으로 수박다리가 있었다.

 

 

- 사뭇 그리운 태고정, 운치있는 정자였고 태고정 아래로는 주자천이 흘렀다.........태고정이 있던 자리는 수몰로 물에 잠겨버렸다.

 

 

- 송림마을로 가는 다리 .......흐르는 물은 주자천이며 위로 보이는 마을이 송림마을이다. 또 오른쪽으로 큰아버지댁의 방앗간 건물이 보인다.

 

 

-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던 운교마을

 

 

- 주자천과 소요대

 

 

- 내가 살던 곳과 친구 동식이네 집

 

 

 

- 동네에서 부유하게 살았던 고하상씨댁

 

 

 

- 내가 다녔던 용담초등학교(사진 상,하, 학교가 있던 자리도 물에 잠겨버렸다)

 

 

 

- 내가 다녔던 용담중학교(학교가 있던 자리도 물에 잠겨버렸으며 학교 뒤로 보이는 산이 용강산이다)

 

 

 

- 용담초등학교 35회 졸업생 고민상씨의 고향에 대한 글이다(작고하신 아버지와 고민상씨는 초등학교 동창이시다)

 

 

- 용담초등학교 19회 졸업생 김석호씨의 고향에 대한 글이다(김석호씨는 나의 이모부 할아버지가 되시는 분이다)

 

 

- 역사가 오래 된 용담초등학교

 

 

 

 

- 용담초등학교를 1976년에 졸업했다(63회 졸업생이며 초등학교 3,4학년때까지도 사진에서 보이는 오래된 목조건물에서 수업을 받았다)

 

 

- 국문학자 정인승 선생님은 용담초등학교 4회 졸업생이다.

 

 

- 5일장이 섰던 용담시장(시장이 있던 자리도 수몰이 되었다)

 

 

- 원장마을 숲거리에 있던 청파정

 

 

 

- 원장마을 숲거리에 있던 농협창고

 

 

- 운교마을에 있던 용담농협 연쇄점

 

 

- 용담면 의용소방대 건물 - 옛날에 불이 나면 의용소방대원들이 화재진압을 했다고........

 

 

- 용담향교

 

 

- 용담향교 대성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