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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흔적 그리고 모습/내마음의여행

小說 太白山脈의 中心 벌교를 가본다 - 2편

by 두타행 2015. 8. 19.

 

小說 太白山脈의 中心 벌교를 가본다 - 2편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벌교에 와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이 필요없을 것 같다.

꼬막정식으로 유명한 벌교의 먹을거리

어느 식당이 우리의 입맛을 즐겁게 해줄까

스마트폰으로 검색, 검색, 검색........

식도락가들의 결론은 식당의 메뉴와 맛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우리는 부용교(소화다리)근처에 모여 있는 꼬막정식집 정가네집으로 들어선다.

메뉴판을 보니 꼬막정식 1인분에 15,000원.

3인분을 주문한다.

아직 꼬막철이 아니라 맛이 있을려나

주문한 밥상이 차려진다.

꼬막전, 꼬막무침, 꼬막 삶은 것, 꼬막회 비빔밥이 주류를 이루지만

가격 15,000원에 비해 부실하다는 생각........

어느 관광지나 먹을거리는 그저 그렇고 다 비슷 비슷.........

시원하게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꼬막비빔밥으로 배를 채우니 오후 여행길에는 힘이 불쑥........

식당에서 얼마 안 떨어져 있는 소설 태백산맥 김범우의 집을 찾는다.

 

 

 

 

 

 

김사용의 아들인 인민군 장교 김범준과 빨갱이로 몰린 김범우의 본가

- 현부자네집과는 달리 집이 폐허가 많이 되었네요.

 

 

 

- 김범우의 집은 관리를 안 하는 듯 합니다.

 

 

- 김범우의 집 맞은편에 있는 횡갯다리(홍교)

홍교다리 : 하대치 등 빨치산들이 지주들의 쌀을 빼앗아 소작인들에게 주기 위해 쌓아둔 곳.

앞쪽 다리가 신홍교이며 뒤쪽이 옛날 홍교입니다.

 

홍교는 벌교 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교량으로 세 칸의 무지개형 돌다리이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서기 1728(영조4)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보시로 홍교를 건립했다.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벌교(筏橋 : 뗏목으로 잇달아 놓은 다리, 우리말큰사전한글학회 지음)라는

 지명은 다름 아닌 뗏목다리로서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보통명사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어 지명이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뗏목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 홍교는 벌교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도 이 근원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 구체성을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범우는 홍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니까 낙안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징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 끝가지에 붙어있는 하나씩의 잎사귀인 셈이었다. (태백산맥 1257)

 

 

 

- 홍교에서 본 소화다리(현재 이름은 제1 부용교)

벌교 소화다리 : 14연대 반란사건과 우익, 좌익의 죄목하에 무참히 처단했던 곳

 

1931년 6월(단기 4264년)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써 원래 부용교(芙蓉橋)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였던 그때가 소화 6년이기도 해서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소화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지금도 대부분 소화다리라고 부른다.
이 다리는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시작해서 6․25의 대 격랑이 요동치면서 남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양쪽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총살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소설에서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사람쥑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태백산맥 1권 66쪽)」라는 표현과

포구의 갈대밭에 마구 버려진 시체들을 찾아가는 장면의 묘사 등으로

그때의 처참상을 상상하면 다리가 달리 보일 것이다.

 

 

- 벌교포구

 

 

- 횡갯다리(홍교)

 

 

- 홍교 맞은편 동네가 김범우의 집이 있는 마을이다.

 

 

- 발걸음을 소설 태백산맥 금융조합으로 옮긴다.

벌교는 작은 읍내라 태백산맥 문학길을 둘러보는데 도보나 자건거로도 가능할 것 같다.

시간이 많다면 자동차보다는 이편이 낳을 것 같다.

 

 

 

벌교 금융조합 : 송경희의 아버지 송기묵이 조합장이였지만 좌익세력에 죽임을 당했다

 

 

 

 

남도여관 : 경찰토벌대장 임만수와 부하들이 숙소로 쓰던곳(현재는 보성여관)

현재도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 보성여관 2층 다다미방 복도

 

 

- 보성여관 옆에 있는 벌교초등학교(옛 남국민학교)

남국민학교 : 인민재판을 구실로 무고한 양민에게 총살 결정을 내렸던 곳

 

 

 

- 보성여관 2층에 있는 다다미방

 

 

 

 

 

 

 

 

 

 

 

- 보성여관 안에는 카페도 있고 소극장도 있네요.

 

 

 

- 보성여관 주변으로 일본식 건물들이 현재도 남아 있네요.

 

 

- 소설 태백산맥 남도여관(현재는 보성여관)

 

검은 판자벽에 함석지붕,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지어진 이 2층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일본인들은 강점기 동안 전국적으로 이런 건물들을 수없이 지었는데

그동안 무차별적으로 헐어버리고 시멘트 건물들을 짓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이런 건물들은 구경하기 어려운 귀물이 되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역사는 문자의 기록만이 아니다.

유물을 보았을 때 설명이 필요 없이 지난 시대를 한순간에 실감하게 된다.

수난과 고통의 역사일수록 그 시대의 유물은 남겨지고 보호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 중심거리로 소위 본정통이라고 불렸던

이 길에 이 건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에도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때의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었다.

소설에서는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한동안 숙소로 사용한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 (태백산맥 3권 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