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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흔적 그리고 모습/내마음의여행

가족투어 - 천년고도 경주로(첫 째날)

by 두타행 2014. 5. 14.

 

가족투어 - 천년고도 경주로(첫 째날)

 

 

- 여행일자 : 2014년 5월 3일∼4일(1박 2일)
- 여행한 도시 : 천년고도 경주
- 여행자 : 우리가족
- 여행지 교통편 : 자가용 이용
- 다녀온 곳
- 첫 째날 : 괘릉 → 불국사 → 석굴암 → 첨성대 → 반월성(불국사단지 화랑유스호스텔 숙박)
- 둘 째날 : 경주국립박물관 → 분황사 → 동궁과 월지(안압지) → 대릉원 → 배동 삼릉 → 포석정지

 


볼거리가 많은 경주에는 아직 가 보지를 못했다.
연휴를 맞이해서 1일 2일의 일정으로 가족투어 경주에 다녀오기로 한다.
최근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며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경건하게 다녀오기로 한다.
천년의 도시 경주에는 볼 것이 무엇이 있을까.
인터넷을 통해서 사전답사를 하고 꼭 봐야할 것과 다녀올 코스를 만들어 본다.
물론 이것저것 다 보면 좋겠지만
경주에 가면 빼놓지 말고 꼭 봐야 하고 둘러볼 곳,
1박 2일 일정이라면 이 코스가 제일 좋을 듯하다.
1일차 : 괘릉(원성왕릉)→불국사(다보탑)→석굴암→보문관광단지→진평왕릉→선덕여왕릉→첨성대→계림→월성(반월성)→안압지(야간 관람)
2일차 : 분황사→경주국립박물관→대릉원(천마총)→경주향교→최씨고택→오릉→삼릉→포석정→귀경
이 정도 코스라면 찬란했던 신라의 역사를 엿볼 수가 있을 것 같고 또 경주에 산재해 있는 유적과 문화들을 눈으로 보고 익히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물론 이외에 더 훌륭한 문화유산이 많지만 보지 못한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이 코스에 만족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이 코스도 시간과 부득이하게 생기는 현지 사정에 따라서 1백% 관람을 장담 할 수 없는 일이다.
경주까지 3시간 반 이상이 소요되는 만큼 우리 가족들을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시내 식당에 들러 아침을 해결하고 경주로 향한다.
경주IC에 들어서니 나흘연휴가 실감날 정도로 도로는 길게 늘어선 차량들로 정체가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정체는 여행하는 이틀동안 관광지는 물론 경주시내는 관광객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고 도로는 차량들로 극심한

교통체증과 혼잡이 빚어졌다.

이로 인해서 계획했던 여행과 유적지 답사는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차질이 빚어졌고 관람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었다.
또 여행 첫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바람에 식당 음식 재료가 바닥이 나서 어렵게 저녁식사를 하는 등 잠자리를 구하는데 애를 먹기도

하였다고..........
이튿날은 첫날 차량 정체로 인해 고생한데 따른 보상이라도 받듯 조금은 여유 있게 관람할 수가 있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역시

막힘 없이 집에 편안하게 도착을 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
경주는 노천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가는 곳마다 사찰, 왕릉, 유적지 등에 많은 유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찬란했던 그 때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꽃피웠던 신라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 경주임에는 손색이 없는 도시이다.


 

 - 첫 관람지인 괘릉(원성왕릉)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2시, 도착시간을 12시로 예정했었는데 차량 정체로 인하여 다소 늦어졌고

이로 인해 계획했던 코스도 차질이 빚어진다.


먼저 괘릉에 대한 안내문을 읽어보고..........
- 괘릉(원성왕릉)에 대한 다른 설명을 인용하자면.........
- 괘릉(원성왕릉)
신라 중기 원성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괘릉은 언덕 모양의 봉분만이 자리하는 여느 경주의 능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십이지신상이 야무진 모습으로 조각된 호석이 봉분을 두르고 돌난간으로 장식된 모습은 마치 왕관을 쓴 듯 위엄을 갖추었다. 양옆으로

봉분을 호위하듯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 나타나는 문인석과 무인석, 돌사자의 모습은 곧 움직일 듯 생생하다고......
긴 수염에 실눈을 뜨고 위엄을 갖추는 문인상의 모습은 관모에서 옷의 주름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신라 석공들의 대단한 솜씨를

느끼게 한단다.
걷어올린 윗옷 아래로 굵은 팔뚝의 근육까지 생생한 무인의 모습은 깊숙하게 골이 파인 눈자위와 커다란 코, 곱실거리는 수염의

모습이 여느 동양인과는 다른 서역인의 모습이라고.....
당나라 등 당시 중국과의 교역에서 벗어나 아라비아반도의 서역인과의 활발한 교류를 가졌던 신라 왕실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이방인의 모습으로 국제사회의

중심지로 자리하였을 신라와 경주의 위상을 느끼게 한단다.
봉분의 사방을 지키는 돌사자들의 두 눈 부릅뜬 당당한 모습과 웃음 가득한 얼굴은 신라의 여유를 느끼게 한단다.

 

 

 - 주차장에서 괘릉으로 가는 길


 

 - 괘릉 입구에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서역인으로서 좌측은 아랍인의 모습이며 우측은 중국인의 모습이란다)

 

 

 - 괘릉(원성왕릉)의 전경......주변의 소나무숲이 참 좋다.

 

 

 - 돌사자와 십이지신상(좌측 돌사자는 괘릉 입구에 있으며 십이지신상은 봉분을 두르고 있는 돌에 새겨져 있다)


 

 

 

 

 

 - 뭘 보고 있으세요.......역사공부 열심히 해야쥐

 

 

 - 괘릉에서........

 

 

 

 

 

 - 괘릉에서 두 번째 관람지인 불국사로 이동, 유명 사찰답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 불국사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의 하나로 그 경내는 2009년 12월 21일에 사적 제502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고 한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하는데.........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

(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중창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며 오히려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

(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經樓),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고 한다.


 

- 동전 10원짜리에서 보아왔던 국보 20호인 불국사 다보탑
내가 알기로는 불국사에는 다보탑과 석가탑, 2개의 석탑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석가탑은 불국사 삼층석탑으로 개명이

되었다고.........

 

- 다보탑에 대한 설명을 빌리자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0.4m, 기단 폭 4.4m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두 탑을 현재와 같이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法華經)의 내용에 따른 것이란다.
기단부에는 사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고 보계에는 난간을 가설하였던 석주가 남아 있다. 그 위에는 네 모퉁이와 중앙에 사각

석주(石柱)를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고 있다. 또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퉁이에 돌사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만 남아 있다고.......
갑석 위에는 사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身部)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죽절형(竹節形)

석주를 돌려 8각 연화석(蓮花石)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 위에는 8개의 주두(柱頭) 모양의 받침으로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8각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단다.
한국의 석탑 중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형태를 가진 예로 이만큼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이루어진 걸작은 그 유례가 없다.

건립연대는 서쪽의 석가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김대성이 중창한 당시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고...........

 

 

- 불국사 자하문과 국보 23호인 청운교(위의 것)와 백운교(밑의 것)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계단으로

우리나라 홍예교와 홍예문의 시원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 청운교, 백운교에 대한 설명을 인용하자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청운교 높이 3.82m, 너비 5.11m, 백운교 높이 3.15m, 너비 5.09m이다.
토함산 줄기를 잘라 남향으로 석단(石壇)을 만들어 고대(高臺)를 이루었는데 이 석단 전면(前面) 두 군데에 석계(石階)를 가설하여

당탑(堂塔)에 오르도록 하였단다.
동쪽에 있는 2단의 석계가 바로 이것이며 위의 것을 청운교, 밑의 것을 백운교라 한다. 18단의 백운교는 등형(登桁)에 의해 좌우로

구분되었으며, 좌우단(左右端)의 등형에는 원래 난간이 가설되었던 듯하다. 지금은 상하에 석주만 남아 있다.

다리 아래는 작은 석재를 가구(架構)하여 궁륭형(穹?形)을 만들어 통행이 가능케 하였다고.......
청운교를 올라서 보도(步道)를 따라 서쪽의 환상적인 범영루(泛影樓) 석주(石柱)를 지나면 극락전 앞에 이른다. 백운교 위의

청운교는 16단으로 규모가 작을 뿐 구성양식은 청운교와 같다. 이 다리 밑에도 작은 궁륭형 통로가 마련되었고 그 양쪽에서 옆으로

길게 뻗은 얇고 넓은 갑석(甲石)의 수법 역시 청운교와 같다.
세부양식 또한 서쪽의 석계나 그 밖의 당탑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불국사의 중창이 경덕왕 때 김대성의 발원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해지므로 이 석계의 건치(建置) 연대도 그 당시로 추정된다고..........


 

 

- 사찰을 관람하다 보면 중창이나 중수, 문화재 보수공사를 한다고 줄을 쳐 놓거나 시설물을 설치를 해서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가 많다.
정말 후세들을 위한 문화재 보수일까? 내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만을 위한 성역으로 만들기위해 중수나 중창으로 보여진다.
문화재 관람료는 에누리 없이 챙기는 종교계, 우리 국민이 내는 돈만큼 구경하도록 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지.
불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가서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몇 곳이나 되던가.
불국사 관람료 1인 4,000원, 성인 4명이면 16,000원, 분명 선조들이 돈 받는 장사하라고 문화재를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 것이다.

 

 

- 극락전 앞 안양문으로 오르는 연화교, 직선에 가까운 궁형아치로 칠보교와 함께 국보 제22호다.


- 연화교, 칠보교에 대한 설명을 빌리자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연화교 높이 2.31m, 너비 1.48m, 칠보교 높이 4.06m, 너비 1.6m이다.
불국사 앞 대석단(大石壇) 동쪽의 청운교, 백운교 맞은편 서쪽에 있다. 가구(架構) 수법은 동쪽의 청운교, 백운교와 거의 비슷하다.

밑에 있는 연화교는 10단의 층계에 계단식 등형(登桁)을 만들어 양분하였고, 양쪽 끝의 등형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석주(石柱)만 남아 있다.
다리 아래는 호형(弧形)으로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여 궁륭형 통로를 만들었으며 이 석계(石階)에서 특이한 것은 각 계층에 미려한

연판(蓮瓣)이 양각되어 있는 점이라고........
칠보교는 8단의 보계(寶階)로 이루어졌고 한 장의 장석(長石)으로 된 등형으로 양분된 점은 연화교와 다르나 석주가 남아 있어

석난(石欄) 설치의 흔적을 남긴 점은 같은 형식이다.
다만 규모가 작아진 관계로 다리 아래 통로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보계에 특별한 조식(彫飾)도 없다.
칠보교를 올라서면 안양문(安養門)을 지나 극락전을 대하게 되는데 이 석계는 동석계(東石階)의 장엄함에 비해 우미 수려하여 조화와

변화를 주고 있다. 이 석계 또한 동석계와 마찬가지로 경덕왕(景德王) 때 김대성(金大城) 중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 보물 1745호인 불국사 가구식 석축
경주 불국사 가구식 석축은 불전과 불탑 등을 배치하기 위해서 조성한 구조물이다.
경사진 지형 여건에 따라 대웅전과 극락전 회랑 외곽에 자연석과 가구식 석축을 상하 2단으로 조화롭게 축조했다. 장대석재로 구획한

공간에 여러 형상의 석재를 채워 쌓은 가구식 기법과 석난간의 구성 등은 종합예술로 국내외 유일무이한 구조로 찬사 받고 있다.
가구식 석축은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조건축으로 건축적 조형미는 물론 그 기법이 매우 독특해 신라 석조건축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 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가는 길도 차량으로 정체가 되고.........
석굴암 관람료도 불국사와 마찬가지로 성인 한 명에 4,000원
석굴암 입구에 다다르니 길게 줄지어 서 있는 관람객,
이유인즉 석굴암 보수공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관람이 어려운 관계로 줄을 서서 관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가족도 장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다 관람하는데 성공, 아! 그런데 실망감........
가설덧집속에서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석굴암, 보수공사 시설물 때문에 그 찬란하다던 신라의 역사는 잘 보이지도 않고 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나만 보자고 오래 머무를 수 없는 노릇.........
더욱이 사진촬영도 불가능하고........ 설명이라도 빌려서 적어놔야겠다.


- 석굴암(국보 제24호)
문화재청에 등록된 정식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래 이름은 석불사이다.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암 대신 현재의 석굴암(石窟庵)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왕명에 따라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저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先王), 즉 효성왕(孝成王)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이 동해구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단다.

 

겨우 30초 구경하는데 2시간이 걸렸다.
다음 여행코스가 차질을 빚게 된다
보문단지를 둘러보고 진평왕릉, 선덕여왕릉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이동하는 곳마다 도로가 막히니.........
할 수 없이 세 군데는 포기하고 오늘 마지막 코스인 야경을 구경하기 위해서 안압지로 이동........
다른 도로로 이동하니 이곳도 사정은 마찬가지, 겨우겨우 안압지 주변에 도착하니 저녁 8시 경, 주차장은 고사하고 주변이 온통 사람 반, 자동차반이라......
묵을 숙소가 급하기에 숙소를 찾느라 주변을 다 돌아다녀 봤지만 민박집이나 숙소는 눈에 띄지 않고 우선 민생고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라 식당을 찾아봐도 이 또한 밥을 먹을 만한 식당도 눈에 안보이고..........
이를 두고 집나오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인가.
이상한 관광지네, 내가 사는 곳은 고개만 돌리면 밥을 먹을 곳이 수두룩한데.......
첨성대 주변으로 이동하여 겨우 식당 한곳을 찾아 들어갔더니 영업이 끝났다는 말, 이건 왠 황당한 소리, 저녁 8시 반밖에 안되었는데...........
굶으라는 법은 없는 법, 다른 곳을 찾아갔더니 이곳도 영업이 끝나 가는 중, 하지만 막차로 식사하는데 성공.........
메뉴는 단 하나 쌈밥, 맛, 이게 무신 쌈밥이라고 완전 별루..........
하기야 이것도 감지덕지, 굶는 것보다 낮지.
이제는 잠을 잘 방이 문제, 식당 주인장께 숙소 사정을 여쭈어보니 방이 없을 거라고......
옆에 듣고 있던 관광객 한 분이 불국사단지에 가면 유스호스텔에 방이 많다고 그러면서 본인들이 묵고 있는 호스텔 상호와 전화번호까지 알려준다.
어찌나 고마운 일인지.
우리는 바로 전화를 해보니 방이 있고 요금은 60,000원이란다. 이 요금이라면 관광지에서 괜찮은 요금, 방 좀 예약좀 하죠.
방을 못 구하면 차에서 자야하나 아니면 구경이고 뭐고 집으로 되돌아가야 하나 별 생각이 다 들었었는데..........
저녁식사도 하고 방도 구했으니 이제는 안심이 되고.........
9시가 넘었으니 안압지 야경 관람시간은 끝난 상황,
그렇다면 첨성대와 반월성이라도 구경을 해야지
아이들과 이리 저리 난 길을 따라 걸어본다.
찬란했던 신라 왕실의 숨소리를 듣는다.
쿵쾅, 쿵쾅, 반월성을 일깨우는 것 같다.


 

- 첨성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한 27단을 쌓아 올렸다.(전체 돌의 개수는 401개)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반월성
101년(파사이사금 22)에 축조된 신라의 왕성.
반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반월성(半月城), 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한다.
둘레 2,400m의 토석 혼축으로 남쪽은 남천을 끼고 자연지세를 이용해서 쌓았다. 475(자비마립간 18)~487년(소지마립간 9)에 궁성을

명활성(明活城)으로 옮긴 시기를 제외하면 줄곧 신라의 왕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사적 제16호.

 

첫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인 화랑유스호스텔로 향한다.
경주시내에서 숙소인 불국사단지까지는 15분 거리......
숙소에 들어서니 방은 그런 데로 잘만하고 유스호스텔이라 그런지 방은 커서 좋다.
주변에 시설이 좋은 유스호스텔이 많다. 그런 곳은 돈을 더 줘야겠지.
팁 하나 경주시내에서 방을 못 구할 경우 불국사단지에 있는 유스호스텔을 알아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간단하게 캔맥주 하나로 여독을 풀고 잠자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