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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흔적 그리고 모습/내마음의여행

가족투어 - 천년고도 경주로(둘 째날)

by 두타행 2014. 5. 14.

가족투어 - 천년고도 경주로(둘 째날)

 


우리 가족은 조금은 피곤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일정이다.
유스호스텔 주변에 아침을 하는 식당이 있다.
된장찌개 1인분에 7,500원이라, 조금은 비싼데 반찬도 좀 부실하고..........
관광지라 그러니 하고 아침을 해결한다.

 

 연휴 나흘 답게 경주시내는 벌써부터 차량들로 붐비고........ 968
오늘 첫 코스는 볼거리가 많은 경주 국립박물관으로......


- 경주국립박물관은 -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가 결성되고, 1915년 옛 객사 건물을 이용하여 신라 유물을 수집·전시하였다. 1929년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되었으며,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출범하였다.
1975년 7월 2일 인왕동 신박물관으로 이전하였으며 같은 해 8월 20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박물관은 고고관, 미술관, 안압지관, 옥외전시관, 특별전시관, 어린이박물관으로 구성된다.
고고관은 선사·원삼국실, 신라실 Ⅰ·Ⅱ, 국은기념실로 구성되며, 미술관은 불교미술 Ⅰ·Ⅱ실, 금석문실, 황룡사실로 구성된다.
안압지관에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 중 예술성이 뛰어난 700여 점을 전시하고 있으며, 옥외전시관에는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고선사터 삼층석탑(국보 제38호) 등의 석조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소장유물은 8만 여 점이며 그 중 3,00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2009년 2월 25일 기준 소장하고 있는 지정문화재는 국보 13점, 보물 30점이란다.
정말 볼거리가 많은 박물관이군..............
밀려드는 관람객, 대충본다.
사실 박물관 관람이라는 것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읽어보자면 하루도 부족할 것이다.


 

 - 경주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성덕대왕 신종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궁금하지만
그 시대에 저 무거운 종을 어떠한 도구를 이용하여 메 달았을까
정말 의문이네.


- 성덕대왕 신종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

최대의 종으로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奉德寺)에 달았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종명(鐘銘)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이 그의 아버지 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혜공왕이 뒤를 이어 771년(혜공왕 7)에 구리 12만근(27t)을 들여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원래 봉덕사에 걸었던 것을 1460년(세조 6)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걸었는데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으므로 현 봉황대

(鳳凰臺) 옆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종 모양은 입 부분에 당초문으로 된 띠가 있으며 당초문 사이에 8개의 큼직한 연화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둘렀다. 종 위에는 웅건한

모습의 용(龍)이 음관(音管)을 감고 있다.
몸체에는 당초문을 두른 견대(肩帶)가 있고 그 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 안에 각각 9개씩 모두 36개의 연꽃을 넣었으며 그와 대칭으로 보상화무늬와 연꽃으로 된 당좌(幢座)가 있다. 비천상(飛天像)은 양각된 종명을 사이에 두고 2구씩 상대한 4구가 연화좌(蓮花座) 위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다. 그 주위로 보상화(寶相華)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비천상 사이의 2개처에 이 종의

유래와 종을 만들 때 참가한 사람 및 글쓴이의 이름이 적힌 종명이 있어 신라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 성덕대왕 신종에 대한 다른 설명을 빌리자면...........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고
에밀레종이 납형법으로 제작되려면 22톤의 쇳물, 감량 20∼30%를 계산하면 약 25∼30톤의 쇳물을 끓여 동시에 부어야 한다. 27톤의

끓는 쇳물을 거푸집에 일시에 붓는데 그 압력이 대단하여 거푸집이 웬만큼 튼튼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고 한다.
또 쇳물이 쏟아질 때는 거품이 일어나 버글거리는데 이때 공기가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하면 공기를 품은 채 굳어버려 기포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공기를 어떻게 빼내었을까?
요즘 만든 주물에는 기포가 많은데 그때는 없었다니 신비할 따름이다.
그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일일 따름이다.
또한 맑은 소리는 지금의 기술로도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300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 이제는 역사의 숨결을 들을 수가 없다고..........

 

 

 

 

 -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는 모조 다보탑

 

 

 

 - 박물관에서 근거리에 있는 분황사로 발길을 옮긴다.
경주에 있는 유적지는 어디를 가나 입장료를 받으니 굴뚝 없는 산업 중에 부가가치가 높은 관광산업이 제일이라.


- 분황사 모전석탑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었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현존하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이라고도 부르며 원래는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높이는 9.3m이다.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고 하며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수리 복원된 것이다.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1단의 석축기단을 만든 다음 그 중앙에는 1단의 화강암 판석(板石)을 밑에 깔고 안산암(安山岩)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탑신을

쌓아올렸다. 1층 4면에는 감실(龕室)을 만들고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각각 1구(軀)씩 새긴 화강암을 끼웠다. 탑의 옥개(屋蓋)는

전탑(塼塔)을 닮아 상하에서 단층(段層)을 이룬다.
규모도 크지만 2층과 3층의 탑신이 1층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어 더욱 장중한 감이 느껴진다. 그 모양이 전탑을 따르고 있어 백제 석탑이 목탑(木塔)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루며 신라 석탑의 발달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문화재라고.........


 

 

 

 

 

 - 분황사 보광전.........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절
분황사는 신라의 고승인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절이다. 또 앞마당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전석탑이 있어 경주시내 답사에서

빠지지 않고 찾게 되는 곳이다.


 

 - 전날 늦은 시간으로 인하여 야경을 구경하지 못했던 동궁과 월지(안압지)로 이동한다.
경주에 있는 대부분의 유적지는 대릉원, 안압지, 국립박물관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도보나 빌려주는 자전거를 이용하여 답사가 가능하다고..........


동궁은 신라 왕궁의 별궁이라고 한다.
사적 제18호. 면적 7만141.5m2, 안압지(雁鴨池) 서쪽 부근으로 추정되며 안압지와 임해전 조성은 문무왕(文武王)이 삼국통일을

기념하여 완성한 사업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의 임해전에 관한 기록을 보면 697년 9월에 효소왕(孝昭王)이 769년 3월에 혜공왕(惠恭王)이, 860년 9월에 헌안왕(憲安王)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아 큰 잔치를 하였고, 931년 경순왕(敬順王)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보면, 임해전은 정사(政事)를 보는 궁이 아니고 잔치나 나라의 손님들을 모시는 기능을 하였단다.
이 안압지와 임해전의 유적은 1974~1976년에 걸쳐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 결과 임해전의 궁전 터가 밝혀졌는데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 정전, 내전이 배치되었고 중문에서 내전 후면까지 회랑으로 둘러져 있으며 안압지 서쪽 못가에 5개의 누각 건물 터가 노출되었다.
건물 추녀 끝에는 물이 흐르던 석구(石溝)가 설치되어 있으며 회랑 바닥은 벽돌이 깔려 있다.


 

 

 

 

 

 

 

 - 안압지는 이 동궁에 붙은 정원의 못이다.


- 안압지
월성(月城)의 북동쪽에 인접하였다. 《삼국사기》 674년(문무왕 14) 조(條)를 보면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양육하였다고 하였는데 안압지는 바로 그때 판 못이며 임해전(臨海殿)에 딸린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이래의 준설공사와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여 주목할 만한 유구(遺構)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동서 200m, 남북 180m의 구형(鉤形)으로

조성되었는데,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배치되었다.
연못 기슭과 섬에 실시된 호안공사(護岸工事)는 정교하고 도수로(導水路)와 배수로의 시설도 또한 교묘하다.


 

 - 많은 고분군이 있는 대릉원으로 간다.
유적지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많은 터라 주차할 장소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 보다 힘들고......
매표를 하고 대릉원으로 들어서니 길게 늘어 서 있는 줄, 저건 또 무슨 줄이람.
천마총을 구경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끝도 안보이고........
구경을 하려면 3시간 이상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것 같고 어제 석굴암 관람 때도 많은 시간을 소비를 했는데 우리 가족은 아쉽지만

깨끗이 포기를 한다.


- 대릉원은.........
대릉원지구로 부른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딴

것이다.
총면적은 12만5400평으로 신라시대의 왕, 왕비, 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만의 독특한 무덤군(群)으로 크게 다음과 같은 7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① 신라미추왕릉(사적 175)
② 경주 황남리 고분군(皇南里古墳群:사적 40)
③ 경주 노서리 고분군(路西里古墳群:사적 39)
④ 신라 오릉(五陵:사적 172)
⑤ 경주 동부사적지대(東部史蹟地帶:사적 161)
⑥ 경주 노동리 고분군(路東里古墳群:사적 38)
⑦ 재매정(財買井:사적 246) 등이다.
무덤을 발굴, 조사할 때 신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天馬圖), 유리잔 및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출토된 문화재의 보고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皇南洞)에 있다.


- 구경하지 못한 천마총을 설명을 빌리자면.........
경북 경주시 황남동 고분군(古墳群)에 속하는 제155호 고분
1973년 4월 16일 발굴이 시작되어 8월 20일에 발굴되어 발표되기 전까지는 155호 고분으로 불렸다.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 별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金冠)과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이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金板)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국보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며 지금은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 대릉원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경주의 유적지만큼이나 유명한 경주 황남빵집에 들러보자.
이 빵집은 대릉원 근처에 있다. 사실 이 일대에는 맨 황남빵집, 경주빵집이 수두룩하다.
황남빵과 경주빵, 차이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상표만 틀릴 뿐 같은 빵이라고 생각되는데.....아닌가.
그리고 경주 찰보리빵도 있다. 이 빵은 황남빵과 경주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크고 얇다.
경주의 명물 경주빵을 사서 먹어보자.
그런데 어느 빵이 맛있고 어느 집이 원조람...........줄을 길게 늘어선 빵집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보면 이 빵집이 원조격인 셈이군.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본다. 그리고 앞사람에게 여쭈어본다. 줄을 서면 바로 빵을 살수가 있습니까.
아니란다. 빵을 사기 위해 번호표를 받은 다음 빵이 구워지기까지 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단다.
그럼 내 차례는 언제........1시간 이상은 기다려야할 상황.........
포기하고 길 건너편에 또 다른 경주빵집이 있다. 이 집 빵도 맛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서 바로 빵을 구입한다.
가격은 1박스에 14,000원........경주빵은 조그맣고 달달한 팥이 들어있다고.......


 

 - 대릉원 관람을 마치고 오릉을 구경하기 위해 갔지만 차량 정체로 인하여 오릉 코스는 포기.
운전대를 남산 삼릉 쪽으로 돌린다.

인터넷에서 눈 도장을 찍어 놨던 곳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 포석정과 삼릉 사이에 있는 식당에 들른다.
블로그에 많이 검색되는 식당이라 손님은 만원...........좀 기다리라는 주인장의 말씀
차례가 되어 들어가서 보니 메뉴는 주로 두부 요리에 돼지고기 수육.
우리는 두부전골과 돼지고기 수육을 주문한다.
돼지고기 수육은 한 접시에 2만원인데 양은 적은 편, 두부전골은 조금은 허접한 편.........
이 집이 맛있다고 입소문으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데 내가 사는 곳의 음식점과 비교를 하면 맛과 찬의 종류에서 차이가 나지만 첫날

저녁식사를 한 쌈밥집 음식보다는 훨씬 낫다는 나의 평가라고.........


 

 - 점심을 마치고 남산 입구에 위치한 삼릉을 찾는다.
삼릉이 위치한 곳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어서 호젓하고 한 폭의 한국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움이 묻어 나는 곳이다.


 

 

 

 배동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 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배동 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 삼릉의 아늑한 소나무숲

 

 

 

 

 - 삼릉 소나무숲에서......

 

 

 - 삼릉 바로 옆에 있는 경애왕릉 - 147
시간이 되면 문화재가 많은 등산을 겸해서 남산에 오르는 것도 경주여행에 빼놓을 수 없는 코스라고...........
다음에 오게 된다면 경주 남산과 토암산을 꼭 다녀와야지.


 

 

 - 삼릉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

 

 

- 돌아가는 길에 여행 마지막 코스인 포석정지에 들른다.
어떤 방법으로 물이 유유히 흘렀을까.
그 당시에 술잔을 띄워놓고 게임에 가까운 놀이도 즐겼을 법하고.........

관광지에 근무하는 문화해설사는 내려오는 역사를 그대로 설명해주는 것이 옳은데 가끔 보면 어떤 해설사는 사실에 가까운 역사보다는 자기가 사는 지역 위주에 맞게 역사를 설명해주는 해설사가 있어서 이것은 아니라고 본다.
신라 경애왕이 이곳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다 후백제의 견훤한테 습격을 받아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대다수의 역사는 전하는데 이곳에 근무하는 해설사는 경애왕의 죽음을 다른 이유로 설명을 하니 역사를 다시 쓰자는 말인가.


- 포석정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정원 시설물.
돌로 구불구불한 도랑을 타원형으로 만들고 그 도랑을 따라 물이 흐르게 만든 것으로서 신라귀족들은 이 물줄기의 둘레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화려한 연회를 벌였다.
기록상으로는 880년대에 신라 헌강왕이 이곳에서 놀았다는 것이 처음 나타나나 7세기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927년 11월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화려한 연회를 벌이던 중 뜻하지 않은 후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잡혀죽었다고 전하는 곳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