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승지를 가다 - 충남 서천군 비인면
충남 서천군 비인면 (庇仁面) 을 보러 가는 날, 하늘은 짓궂게도 비를 내렸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구름은 생각을 몰고/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라는 서천 출신 나태주 시인의 마음이 떠오른다.
그는 이어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쓰고/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자고 나니 눈두덩이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안개. …" ( '대숲 아래서' 의 일부) 라며 축축한 날 만나고픈 님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안개비에 뿌렸다.
선비의 고장 비인을 지켜온 성북리 5층 석탑 (고려시대). 갓쓴 선비의 모습이다. |
산골과 갯마을이 함께 있는 비인의 첫 인상은 이렇게 다가왔다. 비인을 십승지로 꼽은 비결은 '남격암
산수십승보길지지' 다. 이 책은 "평평 울울이 가장 길하고 내포의 비인.남포가 다소 낫다" 고 했다.
여기서 '평평 울울' 은 동해안의 평해와 울진으로 대개 비정한다. 이에 비교되는 서해안의 십승지가
비인과 남포라는 뜻이다. 그런데 비인이 십승지의 하나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비갠 다음날
비인향교 옆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전홍석 (73) 옹은 "타향살이를 오래 하다 3년 전에 고향에 돌아왔다" 고 한다. "비인이 십승지라는 걸 아는
사람은 100세 넘은 노인뿐일 걸. " 저승에나 가서 물어보라는 뜻이다. 어린 시절 그런 얘기를 들었지만 "믿지
않는다" 고 했다.
향교 뒷산 월명산 주위를 공군비행기들이 쉴새없이 나른다. 노인은 더 이상 목청을 높여 대꾸하기가 힘들다는
듯이 밭이랑에 눈길을 떨어뜨렸다. 비인의 원 이름은 비중 (比衆) 이다.
신라 경덕왕이 비인으로 고친 이후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 1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이름이다. 굳이 지명의 의미를 캔다면 '어진 것을 감싼다' 는 뜻이다. 조선조에 들어 서울의 사대부들이 이곳에 모여 들었다.
고려중엽 이후 서해안은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고 조선조 세종 때 (1418) 는 비인 앞바다 마량진에 왜선 50척이 나타나 우리 병선을 불사르고 비인성까지 공격했다. 이 싸움 이후 평지에 있던 비인성은 현재의 위치인 산 위로 올라왔다.
그 뒤에도 비인은 전란이 비껴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울 사대부들이 즐겨 낙향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택리지의 지적은 이렇다.
"여러 읍과 이웃해 있고 뱃길이 편리하여 서울과 가깝기 때문" 이라는 것.
그런 점을 중시한다면 비인은 과거보다 미래를 위해 남겨진 땅이다. 한때 이곳에 공단을 유치하려던 정부의
발상도 지역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선비의 상징 인 (仁) 을 숭상하는 비인 사람들의 '양반기질' 이 이웃
한산면 (韓山面)에 뒤질 리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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