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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산줄기와만남/십승지이야기

십승지를 가다 - 경북 봉화군 춘양

by 두타행 2011. 7. 14.

십승지를 가다 - 경북 봉화군 춘양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햇밥 고기 배부르게 먹고/떠나려니 생각나네/햇밥 고기 생각나네/울고 왔던 억지 춘양/떠나려니 생각나네"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전래하는 '억지 춘양' 이라는 속요이다. 예나 지금이나 배부르고 등 따시면 서민은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런 줄 모르고 산간오지라고 하여 오기를 두려워 한다면 그건 순전히 주는 복을 차버리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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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라국 구리왕의 전설을 전해주는 위패. 새마을사업으로 파괴된 성황당 자리에 마을 촌로들이 다시 세웠다.

 조선조가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태백산 아래 이곳 각화사에 사고 (史庫) 를 지은 것만 보아도 춘양이 지닌 지리적 여건을 짐작할 수 있다. 춘양은 태백산이 소백산으로 건너가는 과협처 (기를 모으는 곳)에 도래기재를 만들면서 남향받이로 생긴 마을이다.

지금은 영동선 기차가 면소재지를 지나고 한 여름 피서객이 몰려드는 불영계곡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를 끼고 있어 벽지라는 인상은 많이 가셨다. 그런데도 여전히 춘양은 새색시처럼 얼굴을 숨기고 있다. 특히 마을 어구이자 면을 관통하는 운곡천의 수구 (물 빠져나가는 곳)에 삼척봉이란 둥근 산이 마을을 가리고 있어 주의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돼 있다.
'정감록' 은 물론 여타 비결서도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춘양을 반드시 꼽고 있다. 춘양을 두고 '소라고기 (召羅古基)' 라 했고 이는 옛 부족국가시절에 이미 이곳에 소라국이라는 독립된 나라가 있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춘양면 일대가 외부의 도움없이 자생할 수 있는 지역임을 말해준다. 또 전란을 피하기 좋다는 것은 임진왜란 때 서울의 사대부들과 서애 유성룡의 형 유운룡이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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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남쪽의 첫 도회지인 춘양면. 풍부한 물산과 좋은 인심은 한번 오면 떠나기가 좀체 어렵다고 한다. 지금은 사과재배지로 명성을 얻고 있다.

 춘양면은 3개 지구로 나눌 수 있다. 도래기재 밑의 서벽리 일대와 중간 마을격인 도심리 그리고 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의양리가 그것이다. 이들 3개 지역은 모두 외부와 차단된 듯한 지리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각 지역마다 쌀과 밭작물이 주업이었으나 지금은 집집마다 사과나무를 심어 '경북 능금' 의 주산지로 바뀌었다.
춘양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소나무로 불리는 춘양목 (春陽木) 의 집산지로, 또 우구치리의 금정광산에서 캐내는 금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흘러간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흔히 봄 춘 (春) 자를 파자 (破字) 하면 삼인일 (三人日) 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보면 춘양은 적어도 세번은 좋은 시절을 맞게 돼 있다. 단순히 피난처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또 한번의 영화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볼거리·숙박시설

    ▶각화사와 사고터 :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터와 중창한 각화사. 절 주변에는 옛 춘양목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두내약수 : 봉화군내에서는 물야면의 오전약수와 함께 위장병 등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고 있다.

    ▶와선정 : 학산리 소재. 서울 선비 5명이 병자호란때 피란와 지내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