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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산줄기와만남/신경준과 산경표

산경표와 백두대간(백두대간과 시적상상력)

by 두타행 2011. 6. 5.

산경표와 백두대간

 양보경(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1. 조선 산의 족보, 산경표
산은 사전에 주위의 평지에 대해, 삼각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경사를 이루면서 높이 솟아 있는 지형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산은 고도의 높음과 인간의 접근의 어려움으로 인해 인간에게 신령함과 신비감을 느끼게 하며, 하늘에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이자 초월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산지가 국토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산악국가로 불린다. 산지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생활과 한 몸을 이루어 왔다. 산은 사람들의 삶의 바탕이 되었으며,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되어 왔다. 우리의 건국 신화가 태백산 신단수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도 우리 국토 환경의 특질을 반영한다. 인간이 문명을 발달시키고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함에 따라 인간에게 미치는 산지의 영향이 감소되어 왔으나, 산에 대한 경외심은 오늘날도 인간의 심성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산의 갈래, 산의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나타낸 지리서이다. 우리나라 산들의 족보인 셈이다. 책의 윗부분에 대간(大幹)·정맥(正脈) 등의 명칭을 가로로 표시하고, 그 아래에 세로로 산·봉우리·고개 등의 연결관계, 산들의 갈래를 기록하였다. 표 밖의 상단에는 그 산이 속한 군현 이름을 표시하여 행정구역상의 위치를 나타냈다. 『산리고(山里攷)』 『기봉방역지(箕封方域誌)』 『여지편람(輿地便覽)』 등 제목이 달리 붙은 본들도 있으나,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1910년에 설립된 조선광문회는 빼앗긴 국토와 역사의 줄기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조선 구래의 문헌 도서 중 중대하고 긴요한 자를 수집, 편찬, 개간하여 귀중한 도서를 보존, 전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선광문회에서 『택리지』 『도리표』에 이어서 지리서로서 세번째로 1913년에 간행한 책이 『산경표』였다. 활자본으로 새롭게 간행한 이 책의 책머리에 실린 서문 겸 해제에는 이 책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우리나라 산의 줄기와 갈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평가하였다.

"그윽히 생각해 보건대 우리나라의 지지는 산을 논한 것이 많으나 허물을 들추어 보면 산란하고 계통이 없다. 『여지고』는 신경준이 편찬한 것인데, 그 「산경」에 산의 줄기와 갈래의 내력을 바르게 서술하고 있다. 높이 솟아 큰 산이 되고, 옆으로 달려가 고개가 되고, 산이 굽이돌아 안아서 읍치(邑治)를 만든 것 등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산의 근원을 알려주는 조종이 된다. 『산경표』는 「산경」을 강(綱)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부기한 것을 목(目)으로 삼아 나열하여 놓았으니, 모든 구역의 지경과 경계가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분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탕으로 삼은 「산경」의 금상첨화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가(地理家)의 나침반이 될 만하다 하겠다."

 

  2. 조선시대의 전통적 산지 분류 체계: 1대간, 1정간, 13정맥
(그림 1: 산경표의 분류체계) 산경표의 산맥분류체계
『산경표』에는 1개의 대간(大幹)과 1개의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조선의 산줄기가 분류되어 있다. 『산경표』에 실려 있는 15개의 산맥을 차례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그림 1. 참조)


①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산부터 원산, 함경도 단천의 황토령, 함흥의 황초령 설한령, 평안도 영원의 낭림산, 함경도 안변의 분수령, 강원도 회양의 철령과 금강산, 강릉의 오대산, 삼척의 태백산,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대동맥으로 국토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산줄기이다.

 

② 장백정간(長白正幹): 장백산에서 시작, 함경도의 경성의 거문령, 회령의 차유령, 경성의 녹야현, 경흥의 백악산·조산을 지나 서수라곶산까지 함경도를 동서로 관통하는 산줄기이다.

 

③ 낙남정맥(洛南正脈): 지리산 남쪽 취령부터 경상도 곤양의 소곡산, 사천의 팔음산, 남해의 무량산, 함안의 여항산, 칠원의 청룡산, 창원의 불모산을 지나 김해의 분산으로 이어지는 동향의 산줄기로 낙동강과 남강 이남 지역의 산맥이다. 장서각 소장의 『여지편람(輿地便覽)』에는 이름이 낙남정간(洛南正幹)으로 쓰여 있다.

 

④ 청북정맥(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낭림산에서 시작, 평안도 강계의 적유령, 삭주의 온정령·천마산, 철산의 백운산과 서림산성, 용천의 용골산성을 지나 의주의 미곶산에 이르는 서쪽을 향한 산줄기로 청천강 이북 지역에 해당하므로 청북정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⑤ 청남정맥(淸南正脈): 낭림산으로부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안주의 서산, 자산의 자모산성을 거쳐 삼화의 광량산까지 이어지는 서남향의 산줄기로 청천강 이남지역이 이에 속한다.

 

⑥ 해서정맥(海西正脈): 강원도 이천(伊川)의 개연산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곡산의 증격산, 수안의 언진산, 평산의 멸악산, 송화의 달마산, 강령의 장산곶까지 황해도로 뻗는 산줄기이다.

 

⑦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에 있는 산줄기로, 강원도 이천(伊川)의 개연산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황해도 신계의 화개산, 금천의 백치와 성거산, 경기도 개성의 천마산과 부소압(송악), 풍덕(豊德)의 백룡산을 거쳐 풍덕읍치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⑧ 한북정맥(漢北正脈):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시작, 강원도 김화(金化)의 오갑산과 대성산, 경기도 포천의 운악산, 양주의 홍복산, 도봉산, 삼각산, 노고산을 거쳐 고양의 견달산, 교하의 장명산에 이르는 서남으로 뻗은 한강 북쪽의 산줄기이다.

 

⑨ 낙동정맥(洛東正脈): 태백산에서 출발하여 경상도 울진의 백병산, 영해의 용두산, 청송의 주왕산, 경주의 단석산, 청도의 운문산, 언양의 가지산, 양산의 금정산, 동래의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남쪽을 향한 낙동강 동쪽의 산줄기이다.

 

⑩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속리산에서 시작, 충청도 회인의 피반령, 청주의 상당산성, 괴산의 보광산, 음성의 보현산, 죽산의 칠현산, 백운산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⑪ 한남정맥(漢南正脈): 경기도 죽산의 칠현산으로부터 서북쪽으로 돌아 안성의 백운산, 용인의 보개산, 인천의 소래산 등을 거쳐 김포의 (북)성산에서 멈춘 한강 남쪽 산줄기이다.

 

⑫ 금북정맥(錦北正脈): 죽산의 칠현산에서 시작하여 경기도 안성의 청룡산, 충청도 공주의 쌍령, 천안의 광덕산, 청양의 사자산, 홍주의 오서산과 월산, 덕산의 가야산, 태안의 안흥진에 이어지는 금강 북쪽 산줄기이다.

 

⑬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장안치에서 전라도의 남원의 수분현, 장수의 성적산, 진안의 마이산을 거쳐 주화산에 이르는 서북 방향의 산줄기이다.

 

⑭ 금남정맥(錦南正脈): 진안의 마이산으로부터 북쪽으로 뻗어 전라도 진안의 주화산을 거쳐, 금산의 병산과 대둔산, 충청도 공주의 계룡산, 부여의 부소산과 조룡산에 이르는 금강 남쪽의 산줄기가 이에 속한다.

 

⑮ 호남정맥(湖南正脈): 진안의 마이산에서 시작, 전주의 웅치, 정읍의 칠보산, 장성의 백암산, 담양의 금성산성, 광주의 무등산, 능주의 천운산, 장흥의 사자산, 순천의 조계산, 광양의 백운산에 이르는 'ㄴ'자형의 산줄기이다.

 

  3. 산경과 산경표의 성립
현존하는 산경표의 저술 시기는 180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1776년에 개칭된 평안도의 초산(楚山), 1800년에 개칭된 함경도 이원(利原) 등의 군현명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1800년에 바뀐 충청도의 노성(魯城)은 개칭되기 이전의 지명인 이성(尼城)으로 표시되어 있어 산경표의 저본이 되었던 자료들은 18세기 후반의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산경표』의 저자는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광문회에서 간행할 때에도 저자를 알 수 없었던 듯 서문에 신경준이 편찬한 『여지고』(『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지칭)의 「산경」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편찬자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산경표』를 신경준의 저술로 단정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산경표』가 신경준(1712∼1781)이 편찬한 『산수고』 와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지만, 신경준의 저작은 아니다.

필자는 『산경표』가 1800년경에 저술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산경(山經)의 개념은 조선시대 이전, 아마도 고려시대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경이란 산의 날실, 곧 산들의 세로 줄기를 뜻한다. 산경이란 용어는 이미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보인다. 강원도 통천군 「누정(樓亭)」조에 총석정(叢石亭)을 묘사하며, 고려시대의 학자 안축(安軸, 1287∼1348)의 기문 속에 <사방의 산경(山經) 지지(地志)를 기록하는 이가 천하의 물건을 다 찾아서 적었지만, 아직 이런 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며> 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이미 안축이 생존했던 고려시대에 <산경>이라는 개념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산경의 뼈대, 백두대간
우리나라 산경의 개념의 중추는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의 개념은 언제 형성되었는가? 옛부터 산은 인간에게 숭배의 대상이었다. 특히 동양에서는 산을 인간과 유기적, 조화적 관계로 보았으며, 산을 포함한 땅을 우리들의 원형이고 어머니의 품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자연 특히 산은 국가에서 중요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는 동악(東岳)인 토함산, 남악(南岳)인 지리산, 서악(西岳)인 계룡산, 북악(北岳)인 태백산, 중악(中岳)인 부악(父岳, 지금의 팔공산)을 오악(五嶽)이라 하여, 국가적으로 중요한 제사인 중사(中祀)가 행해졌다.

토함산은 왜적에 대한 방어, 태백산은 고구려, 계룡산은 백제, 지리산은 가야지역의 수호를 맡는 호국의 의미가 컸다. 그렇지만 고유의 자연신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한 예를 들면 토함산을 동악대왕(東岳大王)으로, 선도산을 서악대왕(西岳大王)으로 봉작한 것이 그것이다. 토함산은 탈해신화의 본산이며, 선도산은 선도성모신화의 본산이다. 그런데 자연숭배가 예(禮)로 제도화되고, 국가의 성격의 변화에 따라 변모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전통이 이어져 조선시대에 산천사전제가 확립된 것은 1414(태종 14)년 이었다. 이 때에 산천의 등급을 나누어 확정하였으며, 악해독신(海嶽瀆神)을 중사(中祀), 산천신(山川神)은 소사(小祀)하도록 하였다. 악해독의 악(岳)은 산악에 대한 제사, 해(海)는 동.서.남해신에 대한 제사, 독(瀆)은 대강(大江)에 대한 제사를 말한다. 경성(京城) 삼각산(三角山)의 신(神)·한강(漢江)의 신, 경기의 송악산(松嶽山)·덕진(德津), 충청도의 웅진(熊津), 경기도의 가야진(伽耶津), 전라도의 지리산(智異山)·남해(南海), 강원도의 동해(東海), 풍해도(후의 황해도)의 서해(西海), 영길도(永吉道, 후의 함경도)의 비백산(鼻白山), 평안도의 압록강(鴨綠江)·평양강(平壤江)은 모두 중사(中祀)이었고, 경성의 목멱(木覓), 경기의 오관산(五冠山)·감악산(紺岳山)·양진(楊津) 등을 소사((小祀)로 두는 등 각각 도별로 중요한 산과 강에 차등을 두어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사전제(祀典制)는 국가적 차원에서 산천에 대한 숭앙심을 제도화, 공식화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백두대간 개념의 성립은 산경의 개념 형성에 본질적인 것이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지리산에 이르는 우리 국토의 등뼈가 되는 대간(大幹)을 말한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의 신성화와 함께 형성되기 시작한 개념이었다.

백두산은 고대부터 우리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되었으나, 일차 사료로 인정되는 관찬 사료에 백두산의 신령함이 서술된 것은 『고려사(高麗史)』의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 설화라 할 수 있다. 태조의 아버지 호경이 백두산을 둘러 보고 개성에 와 정착하였으며, 도선(道詵)의 조언에 의하여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개성의 땅의 기를 받아 왕건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왕건이라는 인물의 위대함과 비범함을 풍수에 가탁한 것이며, 이러한 비유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이 백두산을 신성한 산으로 널리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백두산이 우리 국토의 생명력의 원천이며, 그 생명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국가의 심장인 수도(首都) 명당을 이루었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기록이다.

백두대간의 개념은 공식적인 용어의 사용 보다 훨씬 앞서 이루어졌으리라 짐작된다. 특히 산을 맥으로 이해하는 인식은 풍수 사상의 보급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수가 삼국시대 이후 보편화되면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국토의 지형을 이해했을 것이다. 백두산을 우리 국토의 조종(祖宗)으로 보는 관점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특히 고려시대에 풍수가 광범위하게 수용되면서 백두산 중심의 지맥론(地脈論)은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수에서는 산을 용(龍)으로 이해한다. 용은 생명체이며, 생명체는 생동하는 움직임을 갖는다. 땅을 유기체로 인식하는 것은 동양의 전통적인 특징이지만, 풍수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백두산이 현실적으로 우리 국토의 머리로서 역할하게 된 것은 조선 초이다. 세종대에 이르러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을 확보함에 따라 백두산은 민족의 산으로 명실상부하게 자리잡았다. 17세기에 여진족의 국가인 청(淸)이 중국 대륙을 점령하면서 만주와 백두산 일대는 조선과 청 사이의 관심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그 동안 중국에서는 이 지역을 변방으로 여겨왔으나, 여진족에게는 백두산은 부족의 시조설화가 배태된 중요한 지역이었다. 결국 1712년(숙종 38)에 백두산 남쪽에 정계비(定界碑)를 건립함으로써 양국 사이의 국경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국경 문제 논의 과정에서 국왕 이하 모든 관료, 백성들도 백두산의 현실적.정치적.영토적 의의를 주목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백두산이 지녀 왔던 국토의 뿌리로서의 정신적.상징적 의미도 더욱 강화되었다고 보인다.

이 후 백두산을 포함한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대되고, 영토.정치적인 측면뿐 아니라 이 지역의 사회.인문.경제적 측면까지 확대되었다. 즉 국토 전역을 균형적으로 보는 넓은 차원으로 관심이 진전되었다. 백두산이라는 산에 대한 점적인 대상에 주목하였던 것에서 나아가 조선 후기에는 백두산을 포함한 북방지역 전체, 그 지역의 주민, 주민들의 삶에까지 관심의 폭이 넓어졌다. 백두산으로부터 가지와 줄기로 연결되는 산맥 체계를 이루었다고 보는 백두대간과 산지체계 개념은 위와 같은 국토에 대한 포괄적, 균형적 관심에서 체계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전통적 산맥 체계는 산과 강을 기준으로 한 생활권 개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전통적 산지체계는 산지와 인간의 삶을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 데서 출발한 것이며, 국토 전체에 대한 균형적 관점이 이루어지면서 체계화되었다고 보인다.

지리지와 고지도에는 16세기 중엽 이후 백두대간과 그에서 파생되는 산지체계가 틀을 갖춘 모습으로 수록되었다. 특히 18세기의 지도와 지지에서 산세를 맥(脈)으로 파악한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1720년대에 제작된 『함경도지도(咸鏡道地圖)』는 '백두산대간(白頭山大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예를 보여 준다.

고지도에는 우리 국토의 형상을 인체에 비유한 표현들이 보인다. 이 방식 또한 백두대간의 개념 형성과 체계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해동지도(海東地圖)』 『조선국팔도통합도(朝鮮國八道統合圖)』 등 여러 지도에서 우리나라 지형이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였다. 사람에 비유할 경우 백두대간은 인체의 등뼈처럼 국토를 지탱해 주는 지주의 역할을 하게 되어 그 중요성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5. 『산경표』의 특징과 의의
산경표에 나타난 산맥 체계의 특징과 그에 내재된 자연 인식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첫째, 우리나라 산줄기의 맥락과 명칭을 체계화하였으니, 산줄기를 1개의 대간과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분류하고 이름을 부여한 현전하는 최고의 책이다. 신경준이 『산수고』와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 우리나라 산의 갈래와 흐름을 정리하였으나,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15개의 줄기로 나누고, 산줄기의 이름을 뚜렷하게 부각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산줄기의 명칭 부여 등 체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여러 지도와 글들이 산견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 「천지문(天地門)」에 '백두정간(白頭正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다…대체로 일직선의 큰 산맥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중간에 태백산이 되었고 지리산에서 끝났으니…>라 하여 『산경표』의 '백두대간'과 일치하지는 않으나 '정간(正幹)'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광여도(廣輿圖)』 등 조선 후기의 지도첩 들에는 '대맥(大脈)' '내맥(內脈)' '낙맥(落脈)' 등의 표현도 보인다.

다음으로, 산맥의 체계가 하천의 수계(水系)를 기준으로 나누어져 있는 점이다. 산줄기의 이름이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청북정맥과 청남정맥은 청천강을, 청남정맥과 해서정맥은 대동강을,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은 예성강을, 임진북예성남정맥과 한북정맥은 임진강을,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은 한강을, 금북정맥과 금남정맥은 금강을 구분하는 등 주요 하천이 산맥 구분의 기준이 되어 있다. 그러나 백두대간과 장백정간은 하나의 하천 수계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산맥 이남과 태백산맥 동측의 작은 하천들을 나누는 구분선으로 대간(大幹)과 정간(正幹)으로 명칭을 부여하여 하나의 하천 유역권을 기준으로 이루어진 정맥(正脈)과 구분하였다.

실제로 산줄기의 맥을 파악하려 할 때 물줄기는 그 기준이 된다. 성호 이익(李瀷)도 <대개 백두산의 큰 줄기가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달리는 사이, 철령(鐵嶺)은 북관(北關)의 좁고 험한 곳이 되었고 조령(鳥嶺)은 동남쪽의 높고 험한 곳이 되었는데, 철령 이북으로부터는 산세가 다 서쪽으로 달려 그 맥락을 찾으려면 반드시 물을 의거하여야만 그 줄기를 알 수가 있다. 두 줄기 물 사이에는 반드시 한 줄기의 산이 있는데>(『星湖僿說』 卷1 「天地門」 潟關)고 하여 산줄기의 맥을 물줄기에 의거해서 찾을 수 있음을 이야기 한 바 있다.

자연적으로 구분된 단위인 수계(水系) 또는 하천(河川)이 지역을 격리시키는 역할을 하는 반면에, 동시에 지역을 상호 연계시켜 주는 통로의 구실을 하는 양 측면이 있음은 흔히 지적되고 있다. 한 예로 섬진강 양안, 즉 경상도의 하동과 전라도의 구례나 광양은 양 지역의 문화나 생활양식이 혼합되어 점이적인 성격을 보이고, 시장의 이용 등에서 교류가 빈번함을 볼 수 있다. 산맥 구분의 기준이 수계 즉 물줄기였음은 산줄기를 산줄기만으로 분리시켜 고찰했다기 보다, 하천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생활권 내지 지역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인문적인 측면까지 고려했던 결과라 생각된다. 이는 동양의 전통적인 자연관 즉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지 않고 유기적인 통합체로 보는 사고와도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째, 대간, 정간, 정맥 등으로 산줄기에 위계성을 부여한 점이다. 간은 줄기이고, 맥은 줄기에서 흘러나간 갈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위계적 차별성은 산이나 산맥의 크기와 높이, 넓이 등 물리적인 외형상의 차이에서 기본적으로 연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과 현상을 계층성과 차별성을 두었던 중세적인 사유, 성리학적인 사유 구조에서 말미암은 자연의 분류 체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네째, 산과 산의 분포, 위치를 줄기 또는 맥으로 파악하여 끊어짐이 없이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산들이 연속되어 이어지는 현상을 산맥으로 지칭하는 것은 오늘날도 다름이 없으나, 『산경표』에 나타난 간과 맥들은 단절이 없다. 마치 혈맥이 뻗어나가 서로 통하듯이 모든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고, 산줄기와 산줄기의 결절점에 주요 산이 위치하고 있다.

다섯째, 백두산이 국토의 중심 또는 출발점으로 인식되어 있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국왕이 거주하는 수도를 국토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앞서 살펴 본 신경준의 『산수고』는 백두산을 중시하면서도 중심을 수도인 한양(漢陽)에 두고 있었다. 산의 줄기를 중심으로 본 『산경표』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지역 인식을 체계화하고 정당화하는 논리적 작업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산경표』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산맥을 체계화한 산 중심의 인식 체계를 제시하였으나 이와 같은 산맥 분류 체계는 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6. 전통적 산천 인식 체계의 단절
<그림 2>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산맥 분류 체계이다. 전통적인 산맥 분류 체계인 그림 1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현행 산맥 체계는 지질구조에 의거한 것이다. 일본이 한국의 지질구조에 관심을 가진 것은 광산(鑛山)과 관련된 이권 때문이었다. 1880년대부터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지질 및 광상(鑛床)조사는 빈번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실시되었으며, 1890년대부터 전문적인 지질학자, 광산기술자 등을 동원하여 지질탐사를 실시하였다.  

 

(그림 2 : 현행 산맥분류체계) 현행 산맥분류체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산맥분류 체계는 일본인 지질학자인 동경제국대학의 고또분지로(小藤文二郞)가 1903년에 쓴 논문에서 제시하였던 틀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고또는 1900년부터 1902년 사이에 조선을 2회 방문하여 전국을 답사하면서 우리나라의 지질과 지형을 연구한 후 그 결과를 3차에 걸쳐 일본에서 발표하였는데, 특히 1903년 『동경제국대학기요』에 발표한 「조선산악론」(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에서 제시된 조선의 산맥 체계는 그 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동경에서 간행된 1904년의 야쓰쇼에이(失洋昌永)의 책 『한국지리(韓國地理)』도 이를 바탕으로 서술된 것에서도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905년 조선이 일본의 통감부 체제로 들어가고 교과서의 내용에도 제재를 받게 됨에 따라 조선에서 발행한 『고등소학대한지지 高等小學大韓地誌』 등 교과서도 지질구조에 의한 산맥 체계를 따르는 등 교과서 내용이 왜곡되기 시작하였다.

 



고또의 산맥분류 체계는 지질학자가 지형보다도 지질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분류한 것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땅 위의 모습이 기준이 아니라 땅 속의 지질구조를 기본으로 하여 산맥을 분류한 것이다. 땅 위에서 인간의 모듬살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생활기반인 산과 하천의 모습이 제외된 것이다. 특히 원산-강화를 잇는 지질구조선을 경계로 남북이 크게 구분되어 조선의 남과 북이 이질적인 단위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또한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맥이었던 백두대간이 마천령산맥 함경산맥의 일부 낭림산맥 태백산맥으로 조각나고, 민족의 성산(聖山)이었던 백두산은 아무런 중요한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뭇 산 중의 하나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산맥 체계는 지질구조를 중심으로 하여 파악한 것이기 때문에 산맥 사이의 연결관계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에 따라 개별 산맥들이 연속되어 있지 않고 병렬적으로 존재하며, 특히 북쪽과 남쪽의 지질구조가 달라 남북한의 산맥들은 연속되지 않고 단절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중요한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다. 맥으로 연결된 땅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며 크게 보면 하나의 뿌리를 가진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산맥 분류는 한반도를 하나의 공동체적인 뗄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기원과 성격을 가진 개체들의 집합으로 국토를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지질구조에 바탕한 산맥 체계에는 하천 등 물줄기가 완전히 배제된 점이다. 산수(山水)를 함께 고려했던 『산수고』는 제외하더라도, 산줄기만을 대상으로 하여 분류한 『산경표』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산경표』의 산맥 체계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산맥만을 대상으로 하였음에도 수계(水系)가 포함된 것이었고 오히려 수계(水系)가 기준이었다. 지형을 이해할 때 그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을 포함시켰는가, 인간을 배제하고 땅속의 구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는가 하는 차이는 결과는 땅을 바라보는 사고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다. 하천 중심의 인식 체계라 할 수 있는 조선의 자연 인식체계는 인간을 바탕에 둔 인간주의적 자연지리학이라 부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20세기에 도입된 서구 및 그를 수입한 일본의 자연지리학이나 지형학 체계로 변모되면서 인간을 배제한 채 자연적인 측면만을 고려하였으며, 그것도 땅 속의 지질을 기준으로 산맥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에 의해 성립된 산맥체계에 대한 반발과 그를 시정하기 위한 계몽적 노력은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는 민간차원에서 실시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광문회에서 1913년에 『산경표』를 간행한 것도 그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식민지 통치 기간 동안에 이러한 산맥체계는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고, 조선의 원형적인 자연 인식 체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7. 우리 삶의 터전, 산지의 진정한 보전은?
전통의 단절은 곳곳에서 자취를 드러내고 있다. 근대 학문의 성립이 그러했듯이 지리학의 경우도 우리의 전통적인 지리학과 단절된 채, 지리학이라는 옛 이름 아래 서구의 근대 지리학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 결과 풍수지리를 포함한 과거의 지리학은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인식되기도 하였다. 전통지리학이든 근대지리학이든 그 기본적인 과제는 우리가 살고 있고 또 물려주어야 할 자기 국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이다. 국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라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책이 여암 신경준의 『산수고』와, 그리고 저자 미상의 『산경표』이다. 이들은 국토의 뼈대와 핏줄을 이루고 있는 산과 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지리서이며, 한국적인 국토 인식 방식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마지막으로 안타까움에 사족을 달아 본다. 『산경표』와 백두대간이 일반에 알려지면서 백두대간의 이름을 찾고, 백두대간을 보전하자는 움직임과 지리학계 등 관련 학계에의 질타가 매섭다. 전통적인 우리 산의 이름과 체계에 대해 학계와 민간 모두 관심을 지니고 연구, 보전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백두대간의 어느 부분이 훼손되고, 어느 부분이 도로나 자원 개발에 의해 잘려 나가고, 훼손되고 있는지 등 백두대간에 대한 조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백두대간에 대한 보전, 전통회복 차원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우리나라 생태지역이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야생 동물의 생태통로 등을 설치하고 있는 것은 이제 생태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백두대간 종주 인구가 만 여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최근에는 어느 은행의 수천명의 직원이 한 번에 수백명씩 백두대간 종주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고도 언론에 보도되었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밟는 것이 그 이름을 찾는 방법이고, 보전하는 방법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백두대간을 올라가는 것은 백두대간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등허리를 짓밟는 것이 아닌가?

산은 우리가 기대야 할 마지막 쉼터이며, 터전이다. 요즘 표현으로 생태권인 것이다. 우리 조상들처럼 어머니나 종교적 대상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산은 녹음과 산소와 각종 동식물의 생태 보고로서 우리 국토의 생명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곡식을 낳고 도시와 공장과 문화생활을 가능케 해 주는 물줄기를 흐르게 하는 원천이다.

산은 멀리서 바라보아도 좋다. 산자락의 계곡에 발을 담그고 바라 보아도 그 산의 품 안에 들어선 것 같으며, 산의 향기와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이름의 회복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백두대간 보전이 필요한 것이며, 진정한 보전은 백두대간을 인간의 발로 짓밟고 인간의 발 아래 두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산줄기를 존경하고 정성으로 받들어 주어 스스로 살아 나가며, 인간과 조화롭게 대화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 가자. 백두대간만 중요하고 백두대간만 보전해야 하는가? 14개의 다른 지맥들은 중요하지 않은가? 우리 몸의 대동맥만 살아 있으면 나머지 몸통과 팔다리로 연결되는 핏줄들은 다 끊어져도 좋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