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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산줄기와만남/신경준과 산경표

가벼운 만남 - 산경표

by 두타행 2011. 6. 5.

가벼운 만남  - 산경표

 

 

 『산경표』(山經表)는 그 글자의 뜻을 풀어 보면 '산줄기의 흐름을 나타낸 표'라는 뜻입니다. 이 책에는 옛 문헌에 언급되고 지도상에 이미 표시되어 왔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던 산의 계보를 도표로 정리하고 산줄기 이름을 붙였습니다.(산줄기와 갈래에 관한 내용 정리는 여암 신경준에 의해 1770년경에 이루어졌습니다.) 표의 기재 양식은 그림과 같이 상단에 대간·정맥을 표기하고 아래에 산(山)·봉(峰)·영(嶺)·치(峙) 등의 위치와 분기관계를 기록해 놓았고, 난외 상단에는 주기(註記)로 소속 군현이 적혀 있습니다.

(그림 : 『산경표』의 첫 장으로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과 족보식으로 나열된 산줄기를 볼 수 있습니다.)

『산경표』의 구성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와 똑같은 방식으로 적어 놓아 '우리 나라 산에 관한 족보'라고 보면 됩니다. 족보에 '시조 할아버지'가 있듯이 '백두산'이 시조 할아버지로서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족보에 종손의 계보가 있듯이 이 땅 산줄기의 종손은 '백두대간'이 됩니다. 그리고 종손의 계보에서 갈라져 나간 차남격의 계열이 열넷이 있는데, 그것이 '장백정간', '낙남정맥'...이런 식으로 갈라져 나가 1정간 13정맥이 됩니다. 그렇게 갈라져 나가는 나눔의 기준은 강이나 하천 등 물(수계)이 됩니다. (이러한 원리에 대해서는 '백두대간'항목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산 어디에든 올라 산마루(능선)만 따라서 가면 결국 시조 할아버지인 백두산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산경표』는 우리 조상들이 이 땅에 대해 가져왔던 지리적인 인식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산경표』의 발굴은 이 땅의 산줄기들이 제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동여지도>를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었던 열쇠도 바로 『산경표』였습니다. 한마디로 『산경표』는 이 땅을 이해하는 관문입니다. 『산경표』가  유명해진 것은 그 책에 백두대간(과 1정간 13정맥)이라는 용어들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는 것외에 특별할 까닭은 없습니다. 지리이론서도 아니고 더더구나 누가 편찬했는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산경표』에 실린 백두대간으로 인해 막연하게 추측해오던 이 땅의 산줄기가 명확한 이름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편찬자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에 따라 여암 신경준이 1770년경에 편찬했다는 설과 여암 신경준이 지은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와 『산수고』(이 두 책은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거의 비슷함)를 토대로 하여 누군가가 1800년대 초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습니다. 초기에는 신경준이 편찬했다는 설이 널리 퍼졌으나 현재는 1800년대 초라는 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이 책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암 신경준은 이 책이 있게 한 첫번째 인물입니다. 두번째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신경준의 저술을 토대로 『산경표』를 만든 사람입니다. 최남선의 조선광문회는 그 세번째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조선광문회가 출간한 『산경표』가 없었다면 아마 백두대간은 영원히 잊혀졌을지도 모릅니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의 연구를 통해 백두대간을 부활시킨 이우형은 그 네번째 인물입니다. 이우형은 백두대간을 시각적으로 인식하는데 큰 기여를 한 산경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다섯번째는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를 영인 출판하고  해설을 붙인 박용수입니다. 여섯번째는 백두대간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 조석필입니다. 마지막으로 『산경표』를 한글화하여 '미래를 열어놓은' 현진상입니다. 이 분들의 노고는 오늘날 『산경표』가 있게 한 바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