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
양보경 /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18세기의 지리학과 신경준
학문의 내용과 수준은 그 시대의 생활양식의 구조와 지식의 축적 속에서 형성된다. 조선시대의 자연과 공간, 지리에 대한 인식체계의 변화는 조선 사회의 생활양식의 변화와 지식의 축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자연, 지리의 중요성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하고자 하는 노력은 조선 후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 후기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가 지역 내지 국토의 공간구조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인식한 실학적 지리학자들이 이를 주도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지리학의 다양화, 계통지리학적인 전문화의 추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18세기는 조선 후기 문화의 꽃이 활짝 피었던 시기이며, 지리학에서도 지리지, 지도, 실학적 지리학이 이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16세기 이후 지방 단위로 개별, 분산적으로 편찬되었던 읍지들을 국가가 종합하여 18 세기 중엽에 전국 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로, 18세기 말에는 『해동읍지(海東邑誌)』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의 전국 읍지들은 공시적(共時的)인 지리지로서 전국 각 지역의 사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 밖에 『추관지 (秋官志)』 『탁지지(度支志)』 등의 관서지(官署志), 『호구총수(戶口總數)』 『도로고(道路考)』, 『산수고(山水考)』 등 다양한 주제별 지리서가 활발하게 편찬되었던 것도 동일한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세기는 조선의 지도 발달사에서도 획기적인 전환기였다. 지도의 정확성 등 지도 제작 기술의 발달, 양적인 증가가 전국 지도, 도별도, 군현지도, 관방도와 같은 특수도 등 다양한 종류의 지도에서 이루어졌다. 또 이 시기에는 17세기의 이수광, 한백겸, 유형원에서 싹튼 실학적 지리학이 체계화되고 발달하고 성숙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사회변화와 함께 국토·지역의 구조가 변화함을 인식하고, 지리학의 중요성과 실용성을 주목하여 지리에 관한 저술들을 남겼다.
그러나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1712∼1781)처럼 방대한 지리학 저술을 남기고, 자신의 지리적 지식을 인정받아 국가적인 편찬사업으로 연결시켰던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많은 실학자들이 재야에서 활동하였음에 반하여 그는 국가적인 사업에 재능과 학식을 발휘하여 조선 후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실천적 지리학자라는 점에서 다른 실학파 지리학자들과 구별된다.
묻혀진 지리학자, 신경준
신경준은 전라도 순창에서 태어났다. 고령 신씨가 순창에 거주한 것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자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申末舟)가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한 15세기 부터였다. 신경준은 서울, 강화 등에서 수학하였으며, 한때 소사, 직산 등에 옮겨 살았으나 1744년에 다시 순창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관직에 나아간 것은 43세 때인 1754년(영조 30)에 실시된 증광향시에 급제하면서 부터였다.
늦은 나이로 관계에 진출한 그는 승문원 기주관,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서산 군수, 장연현감, 사간원 헌납, 종부시정 등을 거쳤으나 관직생활은 그리 순탄한 편은 아니어서 15년만인 1769년(영조 45)에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영의정 홍봉한이 울릉도의 영유권에 관한 외교관계의 문건으로 삼을 수 있는 책을 편찬할 것을 청하여, 이 때 홍봉한의 천거로 비변사의 낭청(郎廳)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영조는 신경준이 편찬한 『강역지(疆域誌)』를 보고 그로 하여금 『여지편람(輿地便覽)』을 감수하여 편찬하게 하였다. 『여지편람』을 본 영조는 그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文獻通考)』와 비슷하다 하여 『동국문헌비고』로 이름을 바꾸어 새로 편찬하게 하였다. 1770년(영조 46)에 찬집청을 설치하여 문학지사 (文學之士) 8인을 선발하고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도록 함에 따라, 신경준은 「여지고(輿地考)」 부분을 관장하였다. 역대국계(歷代國界), 군현연혁(郡縣沿革), 산천( 山川), 도리(道里), 관방(關防):성곽(城郭)·해방(海防)·해로(海路)로 구성된 목차에서 볼 수 있듯이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는 그의 해박한 지리 지식을 종합하여 편찬한 것이었다.
그는 당대에는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였던 뛰어난 지리학자였으나,1) 20세기의 지리학계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지리학보다도 국어학자로 일찍부터 평가를 받았으나2) 그의 주요 저작은 지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저서 중에 시문과 성리학적인 글들과 『훈민정음운해』 외에 대작(大作)은 『산수고(山水考)』, 『강계고(疆界考)』 『사연고(四沿考)』 『도로고(道路考)』 『군현지제(郡縣之制)』 『가람고(伽藍考)』 「차제책(車制策)」 등 대개 지리학적인 것으로서, 여암만큼 다방면에 걸친 지리학 저술을 남긴 사람은 없다.
여암이 저술한 지리에 관한 장편의 글들은 그가 세상을 뜬 뒤 홍량호의 서문을 붙여 편찬한 『여암집(旅庵集)』(규장각 소장, 8권 4책, 필사본)과 1910년에 후손들이 목판으로 간행한 『여암유고(旅庵遺稿)』(13권 5책)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문집에는 그가 남긴 시문(詩文)만 묶여져 있다.
신경준의 업적과 그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 1939년부터 『여암전서(旅庵全書)』를 간행하였는데,3) 원래 계획했던 신경준의 저작을 다 싣지는 못하였으나 『도로고』를 제외한 지리에 관한 글들이 대부분 실리게 되었다. 1976년에, 기존에 출간되었으나 구하기 어려운 『여암유고』와 『여암전서』, 그리고 여암전서에서 간행하지 못하였던 『도로고(道路考)』와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海)』, 연보, 후손댁에 전하는 『강화도전도』 『팔도지도』 등을 합해서 다시 『여암전서(旅庵全書)』(경인문화사 간)라는 이름으로 간행함으로써 여암의 저술이 대부분 망라되었다
조선 역사지리학의 체계화
1756년에 편찬한 『강계고』는 신경준의 저작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동국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우리 나라 역대의 강계와 지명 등을 고찰한 역사지리서로서 일본, 대만, 유구국(오키나와), 섬라국(태국) 등도 별도 항목으로 설정되어 있다. 역사지리학은 당시에는 지명의 고증, 영토 국경 수도와 도시의 위치 및 그 변화 등을 고찰하는 것을 지칭하였으며 , 오늘날의 역사지리학의 개념과는 상이하다.
조선의 역사지리학을 체계화하였다고 평가받은 『강계고』의 서술체제는 대체로 국가적 단위를 중심으로 각국의 국도(國都)와 강계(疆界)를 정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도와 강계 항목에서는 각 조항마다 관련이 있는 지명이나 산천, 국가들을 덧붙였다. 서술방식 및 자료이용과 관련된 특징을 보면, 문헌실증적인 입장이 관철되고, 내용적으로는 주로 강역에 대한 비정과 지명고증이 특징이다. 특히 언어학이나 금석학 지식을 역사연구에 적극 응용하였으며, 역사지리고증에 방언을 활용하거나 음사(音似 ) 이찰(吏札) 등의 자료를 적극 활용한 점도 발전적인 면모이다.
또한 많은 다양한 자료, 기존의 문헌자료 외에도 금석문이나 사찰자료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였다. 문헌자료에서도 사료의 인용범위를 넓혀, 야사자료, 그리 고 만주일대를 조선과 삼한의 지역으로 비정하였던 『요사』 『성경지』와 같은 자료도 요동과 요서지역에서의 열국들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인용하였다. 『강계고』에 나타난 강역인식은 주로 기자조선 및 한사군, 고구려 등 국가들의 초기 중심지를 요동일원으로 비정함으로써 확대된 영역관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동시기의 이익이나 이종휘의 영역관보다는 상대적으로 좁으나, 조선 전기의 영역관에 비해서는 구체적이고 확대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강계고』는 당시까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룩한 우리나라 역사지리에 관한 가장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인 연구서 중의 하나였다.4) 옛 국가, 영토, 지명의 변천 등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하였던 역사지리학의 탐구는 주체로서의 국토의 중요성과 자국(自國)의 역사성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신경준 이후 한진서, 정약용 등으로 이어졌다.
사회와 공간의 변화 인식:유통과 유통로의 파악
신경준은 유통과 유통로에 관한 저술로 『도로고』와 『사연고』를 남겼다. 『도로고 』(4권 4책)는 어로(御路)와 서울부터 전국에 이르는 육대로(六大路), 팔도 각 읍에서 사계(四界)에 이르는 거리, 그리고 사연로(四沿路), 대중소(大中小)의 역로(驛路), 파발로(擺撥路), 보발로(步撥路), 봉로(烽路), 해로(海路), 외국과의 해로, 조석(潮汐), 전국 장시의 개시일 등 각종 도로 즉 육로와 해로, 정기시장이 망라된 글이다.
1770년에 쓴 『도로고』 서문에 나타나 있는 신경준의 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로의 공익적(公益的) 성격을 뚜렷이 부각시켰으며, 도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로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인식하여 도로고를 저술하였다. 사회와 경제 가 발전함에 따라 그 중요성이 가장 먼저 점증되는 분야가 도로임을 간취하였으며, 환경지각(environmental perception)의 개념을 알고 있었다. 중국 고제(古制)를 바탕으로 현실문제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정밀한 이론의 추구를 기했으며, 도로 이정(里程)에서도 정확한 측정을 요구하였다. 또한 도로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치정(治政)의 기본으로 치도(治道)를 내세웠다.5)
『도로고』는 유통경제, 시장경제, 화폐경제가 활성화되고, 육로와 수로 등 도로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던 당시의 사회상을 가장 잘 정리하여 반영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공간적인 변화의 상호작용, 그리고 양자의 관계의 중요성을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18세기 후반 이후 『도로표(道路表)』 『정리표( 程里表)』 『도리표(道里表)』 등의 책자들이 많이 제작되고, 도리표를 함께 그린 지도들이 출현하는 것도 이 책의 영향을 반영한다. 『사연고(四沿考)』는 압록강(鴨綠江), 두만강(豆滿江)과 팔도해연로(八道海沿路), 그리고 중국과 일본으로의 해로(海路), 조석간만 등 바다를 낀 연안지역을 정리한 글이다.
자원이나 도로의 측면에서 바다와 해안 도서가 지니는 경제적인 효용성, 연해 지역에 대한 국가 민간의 관심의 증대, 바다가 지니는 국방상의 중요성 등을 깊이 인식한 데서 출발한 글이라는 점에서 신경준의 사회와 지역에 대한 통찰력과 체계적 정리를 보여 주는 저술이다.
지도 제작
우리 나라 지도 발달의 전환기였던 18세기 중엽에 신경준은 지도 제작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동국여지도발(東國輿地圖跋)” “동국팔로도소지(東國八路圖小識)” “어제여지도소서(御製輿地圖小序)” 등의 글을 보면 그가 지도 제작에 일가견을 가지고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지도 발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던 농포자 정상기(1678∼1752)와 아들 정항령, 손자 정원림까지 삼대에 이어졌던 지도 제작의 기법을 정항령과 친교가 있었던 신경준도 나누어 가졌음을 지도에 관한 그의 글에서 살필 수 있다.6)
1769년 국왕 영조가 『강역지』 편찬에 관해 물었을 때, 신경준은 36 0주의 각읍지도를 따로 만들 것을 건의하였으며, 『동국문헌비고』 편찬을 진행하면서 영조의 명에 따라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제작하였다. 『여암유고』 권5, 「발(跋)」 ‘동국여지도발(東國輿地圖跋)’에 의하면 신경준은 정 항령(鄭恒齡)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영조가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게 하고, 신경준에게 별도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 것을 명하자, 신경준은 공부(公府)에 있는 지도 10여건을 검토하고, 여러 집을 방문하여 소장된 지도들을 살펴보았으나 정항령이 그린 지도 만한 것이 없어 정항령의 지도를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지도에 약간의 교정을 가하여 6월 초6일에 시작하여 8월 14일에 지도 편찬 작업을 완료하였다. 그리하여 열읍도(列邑圖) 8권, 팔도도(八道圖) 1권, 전국도(全國 圖) 족자 1축을 임금께 올렸다. 이 지도는 주척(周尺) 2촌(寸)을 하나의 선으로 하여 세로선 76, 가로선 131개의 좌표 방안 위에 그렸던 방안지도(方眼地圖)였다. 방안지도(또는 경위선표식(經緯線表式) 지도)는 모든 군현지도를 같은 축척으로 그림으로써 군현지도들 사이의 분합(分合)을 가능하게 한 지도이다.
이로써 전국의 각 군 현지도를 연결시켜 지역별, 도별, 나아가 전국지도로 합해 볼 수 있고, 나누어 볼 수도 있다. 동일한 축척을 가진 군현지도들은 대동여지도와 같은 대축척 전국지도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되었으며, 일정한 축척을 적용함으로써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려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안에 1리, 혹은 10리, 20리 방안을 그리고 그 위에 지도를 그리게 되면, 지역과 지역 간의 거리 파악이나 방위, 위치 등이 더욱 정확하고 정교하게 된다. 축척의 적용, 대축척지도, 전국을 포괄하는 공간적 범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18세기 중 후반에 여러 종 제작된 방안지도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신경준은 회화식지도의 전통과는 다른 방안지도를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의 제작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자연인식의 체계화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산천(山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하였으니, 여암 신경준의 『산수고』가 그 선구였다. 『산수고』는 우리 나라의 산과 하천을 각각 12개의 분(分)·합(合) 체계로 파악한 한국적 지형학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산수(山水)를 중심으로 국토의 자연을 정리하였으나, 그 속에는 인간 생활과 통합된 자연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산수고』는 국토의 뼈대와 핏줄을 이루고 있는 산과 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지리서이며, 한국적인 산천 인식 방식을 전해 준다.7) 『산수고』는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은 산(山)이요, 만 가지 다른 것이 모여서 하나로 합하는 것은 물(水)이다. (우리 나라) 山水는 열 둘로 나타낼 수 있으니, (산 은) 백두산으로부터 12산으로 나누어지며, 12산은 나뉘어 八路(팔로)가 된다. 팔로의 여러 물은 합하여 12水가 되고, 12水는 합하여 바다가 된다. 흐름과 솟음의 형세와 나누어지고 합함의 묘함을 여기에서 가히 볼 수 있다.”고 하여 『산수고』를 쓰게 된 동기와 산수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 서문에는 나라의 근간이 되는 산과 강을 분합의 원리로 파악하여 대칭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음양의 구조로 이해하였던 저자의 생각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의 주요 산과 하천을 각각 12개로 파악한 점도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자연관과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연의 운행을 보면 1년은 열 두 달로 완결되며, 우주 만물에는 양과 음이 있다.
우리 나라의 산천도 일반 자연법칙과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어 12개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있으며, 산수의 흩어짐과 합함, 우뚝 솟아 서 있음과 아래로 흘러내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국토를 소우주로 이해하여 완결적인 존재로 파악하던 당시 사람들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산 중에는 삼각산을, 물은 한강을 으뜸으로 쳤으니, 이는 京都(수도)를 높이는 것이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서문에서는 백두산에서 조선의 산들이 시작하는 것으로 기록하였으면서도 실제 산의 분포를 서술할 때는 한양의 삼각산에서 시작함으로써, 그가 백두산 중심의 사고와 수도 중심의 사고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산수고』는 이와 같이 우리 나라 전국의 산과 강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조망하여 전 체적인 체계를 파악하고, 촌락과 도시가 위치한 지역을 산과 강의 측면에서 파악한 책이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산천을 산경(山經)과 산위(山緯), 수경(水經)과 수위(水 緯)로 나누어 파악하였던 사실을 신경준의 『산수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전체적인 구조를 날줄(經)로, 각 지역별 산천의 상세하고 개별적인 내용을 씨줄(緯)로 엮어 우리 국토의 지형적인 환경과 그에 의해서 형성된 단위 지역을 정리 한 것이다. 신경준의 우리 나라 산천에 대한 이와 같은 체계적인 파악은 전통적 지형학 또는 자연 지리학의 체계화로 평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자연현상을 주제로 하여 전문적으로 접근하였던 『산수고』에서 우리는 지리학의 다양화와 계통지리학적인 요소, 나아가 근대지리학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8)
지리학의 종합화와 공유화
신경준은 왕명에 의한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 참여함으로써 당시까지의 문물과 제도를 정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지리 관련 내용을 총정리한 「여지고」 부문을 담당하여, 그의 지리에 관한 저술을 「여지고」에 종합해 놓았다.『동국문헌비고』는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選),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 등 13고 10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 「여지고」는 17권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핵심적인 위치를 구성하였다.
『동국문헌비고』「여지고」는 신경준의 여러 역사와 지리에 관련된 저술들을 종합 정리하는 차원에서 편찬된 것으로, 고려와 조선전기 자료와 연구성과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전문적으로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던 한백겸, 유형원, 홍만종, 임상덕 등 관련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종합 정리하였다. 따라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는 한백겸 이후 일련의 역사지리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헌비고 「여지고 」는 전장 제도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백과전서학적 연구에, 개인들이 발전시켜 온 역사지리학의 연구성과를 정부적인 차원에서 최대한 결집시키면서 이룬,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발전의 중요한 결과물이자 발전의 지표라고 평가할 수 있다.9)
그러나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는 역사지리학뿐만 아니라 교통, 시장, 군사, 방어, 산천과 같은 경제지리학, 국방지리학, 자연지리학, 문화지리학 등이 종합된 책으로, 신경준의 사상이 결집된 책이다. 또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는 개인적인 수준의 학문 연구를 사회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 저술이며, 사회적인 검증을 거친 실천적 지리서라 할 수 있다. 이는 신경준이 지식의 사적 소유를 넘어 이를 공유화하려는 노력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지리적 공간적 지식의 공유화는 개인과 사회의 공간 인식의 범위를 확대시키고, 사회 경제 변화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신경준의 저술들은 더욱 빛을 발한다.
각주
1) 『承政院日記』 1,308책, 영조 46년 8월 3일 “上曰 申景濬地圖 承旨曾前見之乎 浩修曰 未見而聞之 則別樣爲之云矣 本來以地理學有 名稱 而承此下敎 渠竭力爲之矣” 洪良浩는 신경준의 학문에 대하여 백 가지 학문을 모으되 자신이 도로 절충하여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여암 신공은 큰 재주와 넓은 식견을 지녔으면서도 넓고 깊이 찾는 노력을 더하여 ……심오한 도리를 끄집어 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백 가지의 학문을 모으되 자신의 도에 절충을 하였다. 말로 드러낼 때에는 넓어서 다함이 없고 선명하여 꼭 들어맞으며, 글로 나타낼 때는 이전 사람들의 말을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드러냈다. 규칙에 구차히 속박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원칙에 벗어나지 않아 탁연히 일가로서의 학문을 이루었으니, 유가 드문 굉재이며 희세의 통유이다.”(『耳溪先生集 』 권11, 「旅菴集序」; 『耳溪洪良浩全書』) 또한 그가 여러 학문에 박학하면서 특히 우리 나라의 산천과 도리에 더욱 밝았음을 강조하였다. “於本國山川道里 尤瞭然 如在目中”(『耳溪先生集』 권33, 「左承旨旅庵申公景濬 墓碣銘幷序; 『耳溪洪良浩全書』)
2) 정인보, 1937, “훈민정음운해 해제,” 『한글』 5권 4호(통권 44호) 강신항, 1959, “신경준의 기본적 국어학 연구태도,” 『국어국문학』 통권 20호 ______, 1965, “신경준의 학문과 생애,” 『성대문학』 11집 ______, 1969, “훈민정음운해,” 『한국의 고전 백선』 동아일보사
3) 여암의 5세손인 申宰休가 편찬하고, 정인보와 김춘동이 교열하여 新朝鮮社에서 간 행하였다.
4) 朴仁鎬, 1996, 『朝鮮後期 歷史地理學 硏究』, 이회, pp. 88-99 『강계고』의 내용은 이 글을 참조하였음. 5) 崔昌祚, 1986, “旅菴 申景濬의 地理學解釋,” 『茶山學報』 第8輯, 茶山學硏究院, pp. 44-46
6) 『旅庵集』 제4책, 雜著, 卷七, “東國輿地圖跋” “東國八路圖小識”
7) 신경준과 『山水考』 『山經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拙稿, 1994, “조선시대의 자연인식체계,” 『韓國史市民講座』 제14집, 一潮閣, pp.70-97를 참조
8) 백두대간 등의 명칭으로 조선의 산줄기를 정리하여 유명한 책 『산경표』는 『산수고』와는 체제, 내용, 양식이 전혀 다른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산경표』를 신경준의 작으로 단정하고 있으나, 『산경표』는 신경준이 지은 책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의 근거로 일본 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輿地便覽』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여지편람』이 영조가 동국문헌비고 편찬의 과정에서 언급한 『여지편람』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점, 현전하는 『山經表』에는 19 세기 초에 변화된 지명 등이 기재된 점, 『산경표』에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 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
9) 朴仁鎬, 앞의 책, p.17, p.274
「월간국토」 99년 5월호
※ 백두대간 첫 마당 홈페이지에 올려진 자료이며 사용허락을 받았음
'우리산줄기와만남 > 신경준과 산경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학자이자 실학자인 여암 신경준... 그는 누구인가 (0) | 2011.06.07 |
---|---|
산경표와 백두대간(백두대간과 시적상상력) (0) | 2011.06.05 |
가벼운 만남 - 산경표 (0) | 2011.06.05 |
산경표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 (0) | 2011.06.05 |
신경준의 『산수고』와 『산경표』 (0) | 2011.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