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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흔적 그리고 모습/책속의 글

<도덕경>의 탄생 - 노자가 창시하고 장자가 발전시킨 은둔의 철학

by 두타행 2016. 2. 12.

<도덕경>의 탄생

노자가 창시하고 장자가 발전시킨 은둔의 철학

 

 

[시대] BC 560 ~ BC 530

[요약]

도덕경은 노자의 사상이 담겨 있는 저술로, ()를 중심으로 만물의 기원, 도덕, 정치, 철학 등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저술이 노자의 실제 저서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200년 후 전국시대 때 장자에 의해 계승, 발전했다.

장자의 사상은 노자의 사상과 함께 '노장' 사상으로 불리며,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 현실 도피 사상, 은둔사상 등 다양하게 인식되는 한편, 중국 역사상 은둔자의 철학으로 발전했다.

 

[서지적 사항]

노자가 지었다고 하나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변형 과정을 거쳐 기원전 4세기경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다고 여겨진다.

여러 가지 판본이 전해 오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나라 문제(文帝) 때 하상공(河上公)이 주석한 것으로 알려진 하상공본과, ()나라 왕필(王弼)이 주석하였다는 왕필본의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전문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당사본(唐寫本)과 육조인사본(六朝人寫本)이 있고, 여러 곳에 도덕경비(道德經碑)가 아직도 흩어져 있어 노자의 경문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근년에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의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백서노자(帛書老子)와 색담사본도덕경(索紞寫本道德經)도덕경의 옛 형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래 도덕경은 상·하로만 나누어졌을 뿐이지만 장구지학(章句之學)이 성행한 한대(漢代)에 들어와서 장·절로 나누어졌다고 보인다.

 

 

노자가 만년에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려 할 때 관지기 윤희가 그를 존경하여 한 권의 책을 얻고자 거듭 간청하니 노자는 그곳에 머물면서 도를 설파하고 단숨에 5천 자에 이르는 책을 써 주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도덕경(道德經)이 편찬된 경위이다. 일명 노자라고도 하는 도덕경에는 도가 사상의 창시자인 노자의 모든 사상이 담겨 있다.

초나라 출신인 노자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으므로 그의 생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 출신으로 이름은 담(), 자는 백양(伯陽)이며 주나라 왕실의 장서 관리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생몰 연대가 불분명하고, 행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의 이름과 생애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그를 노래자(老萊子), 태사담(太史儋)으로 부르기도 하며 노자가 정치적 원인으로 노나라로 망명했을 때 당시 17세였던 공자가 그에게 주례(周禮)에 관한 질문을 했다고 하여 공자보다 20세 정도 연상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도덕경을 전국 시대의 저술로 여기고 노자를 전국시대 인물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노자의 실재를 부정하는 학자까지 있으며, 노자에 대한 분분한 설로 인해 도덕경의 실제 저자가 노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도덕경의 저자를 노자로 보는 견해와 전국시대의 도가 유파들이 지었다는 견해가 상존한다.

도덕경은 상과 하,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상편 도경(道經)37, 하편 덕경(德經)44장으로 총 81장이다. 모든 글은 간단한 운문체로 되어 있어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되며, 도교 신자들은 후에 이것을 주문으로 외우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철학적 입장에서 전략, 전술을 다루고 있다고도 본다.

도덕경에서 볼 수 있는 노자의 사상은 철학 사상과 정치사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노자의 철학 사상 중심에는 도()가 있다. 도덕경에서는 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천지의 시초이고, 이름이 있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이다.

노자는 도를 만물의 기원으로 지칭했으며,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그것을 굳이 명명해야 한다면 ''라고 했다. 또 노자는 도를 '()'라고도 했다. 여기서 무는 존재를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무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도덕경'천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라고 적고 있다. 노자는 무에서 유가 생성되고, 유가 다시 무로 돌아가는 원리에 따라 만물이 생성되고 멸한다고 보았다. 또한 만물의 생성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불변의 법칙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위(無爲)의 원리에 따르며 인간도 천지 만물의 구성체인 만큼 무위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정치사상이다.

노자는 무위를 통한 지배를 강조해 사회 진보는 혼란을 야기할 뿐이고 생산의 발전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길 뿐이며, 탐욕은 전쟁의 원인이라고 했다. 또한 문화는 지식의 발전을 가져오고, 이는 결국 전쟁에 이용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문명이 없던 시대, 어리석을 정도로 순박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노자의 이상적 국가 형태가 '소국과민(小國寡民)'이다.

백성에게 문자 대신 새끼를 꼬아서 뜻을 전달하게 하고, 백성은 스스로 만든 음식을 맛있어 하며, 스스로 짠 옷을 입으며, 내 집에 살면서 편안함을 느끼며, 예부터 해온 것들에 만족한다. 이마에 손을 얹고 보면 이웃나라가 들어오고, 닭이 우는 소리,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어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가는 일이 없다.

이처럼 인구가 적고 작은 나라가 노자의 이상국이었다. 이러한 노자의 주장은 현실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 주장은 통치자들의 신랄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는 크고 강한 것이 작고 약한 것을 지배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노자의 사상은 약 200년 후 전국 시대 장자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장자는 노자와 함께 '노장'으로 불리는 도가의 대표 사상가로, 그의 일생에 대해 알려진 바는 적으나 저서인 장자는 도가의 핵심 경전으로 유명하다.

장자는 총 33편이 전해지며, 크게 내편, 외편, 잡편으로 나누어진다. 장자는 우언 형식을 띤 글들이 대부분이며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력이 우수하여 문학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도가 사상은 한나라 시대에는 황로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군사에 적용되었으며, 일부는 후한 시대에 도교로 발전했다.

장자 역시 도를 우주 만물의 원천이라 여겨 장자'도란 무엇인가? 그 어떤 것에서도 생겨나지 않으며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아서 그 자체가 근원적인 존재이며, 하늘과 땅이 열리기 전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라고 기술했다.

장자는 인위가 세상 모든 싸움의 원인임을 지적하고, 언어와 지식을 부정했다.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관과 판단을 거부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잊고 천지 만물과 혼연일체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이를 이룬 자를 지인(至人)이라 일컬었으며, 지인만이 절대 자유의 세상을 살 수 있다고 했다.

노자의 사상은 도덕경을 기반으로 하여 도교로 발전했다.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은 자유를 추구했다. 자유는 절대적이며, 누구라도 도를 깨닫기만 하면 절대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도가 사상은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이기도 했지만,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현실 도피 사상', '은둔의 사상'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따라서 도가 사상은 중국 역사 속에서 귀족과 지식인들에게는 패배자, 은둔자의 철학으로 여겨지며 발전했고, 어렵고 추상적인 면이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백성들에게는 종교를 떠올리게 했다.

도가 사상은 한()나라의 개국과 함께 위정자 사이에서 황로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기도 했다. 황로 사상은 황제(黃帝)와 노자의 준말로, 노자의 사상이 정치나 군사에 적용된 것을 일컫는다. 한나라 개국 초기에는 계속된 전쟁으로 백성의 삶이 피폐해졌다. 따라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더 잘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절실했다. 조참, 진평, 전숙, 급암, 직불의, 사마담 등이 황로 사상의 대가들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한 문제(漢文帝), 문제의 황후 두씨, 두씨 일가, 한 경제(漢景帝)도 황로 사상을 배웠다. 하지만 한나라 중기에 사회와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회적 모순과 민족 갈등이 격화되고 정치 상황이 복잡해지자 도가 사상은 더 이상 통치 사상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유가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천사도를 창시한 인물. 천사도는 노자를 시조로 하며 도덕경을 경전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곧 도교의 시작이었다.

한편 도가 사상의 한 줄기는 후한 시대에 도교로 발전했다. 당시 장릉(張陵)이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도 불렸던 천사도(天師道)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도교의 출발이었다. 이들은 노자를 시조로 하고, 도덕경을 경전으로 삼았다. 이후 도교는 불교와 결합하여 민간 신앙으로 발전해 현실의 고난을 비판하고, 새 세상을 원하는 민중의 바람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리하여 중국 역사상 도교의 영향을 받은 민중 봉기가 다수 일어났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옮겨온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