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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산줄기와만남/대동여지도&김정호

대동여지도의 독도법(박재민 작성)

by 두타행 2011. 6. 1.

대동여지도의 독도법

목차
  1. 알려진 김정호의 생애와 의문점
  2. 지도 제작의 배경 및 목적
  3. 풍수지리적 국토관에 영향을 받은 대동여지도
  4. 우리나라 고지도의 제작 기법과 대동여지도
  5. 대동여지도의 특성과 독도법
  6. 동시대 다른 나라의 지도와 대동여지도의 비교
  7. 우리가 만든 과기원지도
  8. 대동여지도의 의의
  9. 참고자료(새로 쓴 교과서의 김정호)
10. 참고문헌


1. 알려진 김정호의 생애와 의문점

김정호의 생애에 대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1934년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어독본에 의해서다. 이 책에서는 김정호가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또 그가 지도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과거의 당시의 지도 제작 수준이 형편없었던데 있었다고 왜곡한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우수성을 깎아 내리고, 당시의 조선정부는 우수한 인재 아끼지 않는 무능한 정부였다는 비판자료로써 사용하기 위함이였다.  
김정호의 생애에 의문이 가는 부분은 먼저 그가 옥사당했다는 부분이다. 옥사설이 틀렸음을 짐작할 수 있는 증거 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죄인을 다루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더구나 그가 옥사를 했다면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야 하지만 어떤 자료에도 이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둘째,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청구도,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등이 몰수당하거나 압수당한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셋째, 대동여지도의 판목을 압수하여 모두 소각했다고 하였는데, 현재 대동여지도 판목 한 장이 숭실대학교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1931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전시한 고도서전관 목록에 판목 두 장이 들어 있으며, 그 밖에도 출품을 거절한 일본인이 대동여지도 판목 수십 장을 비장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또, 고산자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최성환 후손들도 대동여지도의 판목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들이 화재로 없어졌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대동여지도의 판목은 압수당하지도 않았고 불태워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넷째, 고산자 김정호가 죄인이었다면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발행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유재건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함부로 싣지 못했을 것이다.
다섯째, 고산자와 가까웠던 최한기, 최성환, 그리고 비변사에 있는 국가 기밀 지도를 제공해 준 신헌 장군 등이 연루되어 어떠한 처벌이라도 받았어야 할 텐데, 그러한 기록이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김정호가 전국을 세번씩이나 답사하고 백두산을 여덟번 씩이나 올랐다는 사실에도 의문이다. 세권의 지리지와 4편의 지도를 제작한 김정호에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또, 그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기록에 보면 김정호가 전국을 두루 답사하였다고 지적한 사람은 없고, 오로지 기존의 지도들을 두루 모아 좋은 점을 따서 집대성시켰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백두산 등정에 20여일이나 인적이 없는 곳을 가야하는데 김정호 개인이 그런곳을 8번이나 갈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김정호는 실제 답사를 통해 지도를 만든것이 아니라 그가 수집할 수 있는 지지나 읍지 또는 많은 지도를 통해 보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필요에 따라 부분적인 답사를 통해 지도를 완성해 갔을 것이다.


2. 지도 제작의 배경
역사적 배경 및 제작 목적 - 김정호는 지도유설(제1단에 실림)에서 地志를 서술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목적을 밝히고 있다. 지도유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1) 지지와 지도가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자료임을 강조하였다. 민정(民政)을 살피고 호구(戶口)나 전부(田賦 세금을 받음) 밝히는 것이 지지라면 지형이나 도로망, 행정경계를 구체적으로 알아 보기 위해서 지도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2) 지도의 활용면에서 군사적인 용도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설명했다. 이는 그의 후원자가 군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수 있다. 이는 김정호가 그의 후원자로부터 비변사의 지도를 받아 참조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써 실학자들이 아방강역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과 같이 김정호도 국가존속을 위한  자주국방의 필요성이 절실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저서인 대동지지의 전고항목에 과거 외국의 침략을 빠짐없이 모두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대동지지에서  평안도는 건연, 다른 지역은 전고라는 항목에서 각 군현의 군사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3) 김정호는 지도유설뿐만 아니라 동여도에 많은 문장을 실었다. 그는 국가발전의 기틀로서 국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좌도(左圖)로서의 지도와 우서(右書)로서의 지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동여도지·여도비지를 통하여 완벽한 지지로서의 대동지지를 저술하였고 청구도·동여도를 제작한 후 손색 없는 지도로서의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것이다.


3. 풍수지리적 국토관에 영향을 받은 대동여지도
풍수지리는 중국에서 들어왔지만, 한국인은 이를 우리 국토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민족지리학(民族地理學)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오히려 중국보다도 한국에서 풍수지리는 더욱 맹위를 떨쳤다.
지도를 놓고 보더라도 중국지도는 풍수적 관점이 매우 약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지도는 고려에서 조선말의 대동여지도에 이르기까지 풍수적 관점으로 일관되어 있다. 산의 높이보다는 산맥의 흐름을 중요시하여 그리는 방법, 즉 간룡법(看龍法)이 적용되고, 전국의 8도를 오행(五行)의 5방색(5方色)으로 구별하여 채색을 넣은 것이 그것이다.
또한 한반도를 사람이 서쪽을 향해 서 있는 모습으로 이해하고, 백두산을 한반도의 태조산(太祖山)이자 인체의 머리로 간주하여 장엄하게 그려 넣고, 백두산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큰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하여 인체의 척추로, 백두대간에서 서쪽으로 뻗은 13개의 작은 산맥들을 정맥(正脈)으로 표현한 것, 그리고 제주도와 대마도를 인체의 두 다리로 이해한 것도 전형적인 풍수적 관점이다. 말하자면 한반도를 살아 있는 생명체의 형상으로 보는 것이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서울과 전국의 모든 읍(邑)들이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도시와 취락으로 조성되었고, 또 그러한 관점에서 지도에 형상화되어 있다. 한반도 안의 수많은 도시와 취락은 한반도라는 큰 생명체와 유기적 관련을 가지면서 독자의 작은 생명체를 형성한다. 이 경우, 백두대간과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 생기(생기)가 왕성하여 길지(吉地)가 많고, 큰 인재를 많이 낸다.
산수를 뼈와 혈관으로 이해할 때, 산맥은 결코 끊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뼈가 끊어지면,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지표상으로는 산맥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경우라도 산맥은 지하로 이어진다고 본다. 그래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우리나라 고지도에서는 산맥을 그릴 때 모든 산맥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그린다. 이 점은 산맥을 끊어서 그리는 오늘날의 지도작법과는 전혀 다르다.


4. 우리나라 고지도의 제작 기법과 대동여지도
회화식   - 비과학적, 전체지도의 53.3%
동양화식 - 한 폭의 훌륭한 그림 같은 지도
백리척식 - 토지의 광활에 따른 지도를 제작하는 과학적 기법이 가미된 지도
방안도법 - 방안을 그리고 그 안에 지형의 광활에 맞추어 과학적인 축소법을 이용한 제작기법
경위도식 - 경위선표식: 경위도의 개념은 적용했지만 오늘날의 경위도와 다름
                경위도식: 현재의 경위도 개념을 적용


* 대동여지도의 제작상의 특징
대동여지도는 청구도, 동여도와 마찬가지로 확대축소의 원리를 기하원본에 두고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대동여지도는 보다 종래의 지도들보다 과학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즉, 종래의 전국도들은 각 도별 지도를 종이의 크기에 따라 축척을 각양각색으로 그려서, 8도를 하나로 엮어서 전국도를 만들려 하면 그 축척이 맞지 않아서 맞지 않았다. 가령, 충청도와 경상도는 그 면적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똑같은 크기의 종이에 그리려다 보니 그 축척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8도 지도를 한 장의 전국도로 합치려 해도 잘 맞지 않았다. 또한 일정한 축척의 도별 지도에도, 그린 사람이 중요한 부분은 크게 그리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작게 그리는 등, 그 축척이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기하원본의 확대축소법을 도입했기 때문에, 22첩의 지도를 합치면 훌륭한 전국도가 된다.


* 대동여지도와 세계지도와의 비교

대동여지도가 완성된 시기는 19세기말로서, 이 시기의 세계의 지도는 벌써 현대적 측량 기술이 도입되어 현대적 기법의 지도가 제작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앞서 개항한 중국과 일본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이미 현대적 기법으로 지도를 제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와 같은 시대의 세계의 지도와의 비교는, 그 제작 기법에서부터 차이가 나므로 비교 자체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는 전통적 기법으로 제작된 지도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우수하기 때문에, 그 우수성을 짚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 목판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필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막을 수 있으며 대량 생산의 길을 터놓았다.
+ 지도표를 사용하여 지도의 주기 내용을 간결화하고 고지도를 근대화시켰다. 14개의 지도표 사용. 동여도보다 간결하게 표시(이는 동여도가 필사본,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이므로)
+ 분합이 자유롭게 22첩으로 만들어 상하를 연결하며 도별지도도 되고 전부 연결하면 전국도가 되도록 제작하여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하였으면 접으면 책 크기만 하여 휴대하고 다니기에 편하도록 제작하였다.
+ 전통적인 고지도 제작 양식인 배수의 6체를 사용하고 방안도법을 이용하였으며, 확대 축소할 때에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미하여 고지도의 정확성을 기하였다.
+ 다른 어느 고지도보다 주기내용이 많아 풍부한 정보량을 담고 있다.
+ 10리마다 점을 찍어 여행할 때 이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 전통적인 기법으로 그린 지도들은, 현대의 지도들처럼 색깔이 가미되지 않고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선만으로 그렸는데, 이럴 때에 지도 위에 그려진 하천이나 강의 그림과 도로의 그림이 혼동될 수도 있다. 하지만 김정호는 지도를 그릴 때 하천이나 강은 곡선으로 그리고 도로는 직선으로 그리고, 또 도로의 10리마다 점을 찍음으로써 그러한 혼동을 없앴다.

 

※ 기하원본(幾何原本)
1605년 베이징에서 6권으로 출판되었다. 원서는 C. 클라비우스가 교정한 《Euclidis elementorum libri》(15권)로서,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리치의 구역을 중국의 관리 서광계가 필기, 정리한 것이다. 외래문화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중국인들도 이 책을 중용하여 여러 번 간행하였으며, 청나라의 강희제는 이것을 만주어로 번역시켜 간행하였다. 나머지 9권도 후에 영국의 선교사인 A.와일리와 이선란(청조 말의 수학자)의 협력으로 전부 번역되었다. Geometry에 기하(幾何)라는 한자어를 붙인 것은 이 책이 최초이다.
우리나라에는 정조 때에 수입되어, 여러 문관들에 의해 연구되어 김정호의 활동시기인 순조 때에는 이미 연구가 끝나 있었다. 최한기를 통해서 이 책을 접한 김정호는, 그의 작품들인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를 보다 과학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5. 대동여지도의 특성과 독도법
1). 대동여지도의 구성.
대동여지도는 남북을 120리 간격으로 하여 22단으로 나누고, 각 단은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1절(折)로 하였다. 즉 1절을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지도로 만들어 휴대와 열람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1절의 크기는 약 가로 20㎝, 세로 30㎝ 정도이며, 모든 단을 연결하면 가로 약 3.3m, 세로 약 6.7m의 대형 지도가 된다. 축척은 대략 1:216,000 정도이다.
제1단에는 지도유설, 팔도에 대한 통계표, 수도 한양의 지도인 경조오부(京兆五部)가 그려져 있으며, 1단 좌측면에는 지도표(地圖標)가 있어 14개 항목, 22종의 기호가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유설에는 지도 제작의 목적이 나와 있는데, 여기서 김정호는 국토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국가 발전의 기틀이므로 좌도(左圖)로서의 지도와 우서(右書)로서의 지지가 꼭 필요하며, 특기 국방상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2). 대동여 지도의 뛰어난 점
지도표 사용과 목판 인쇄본 - 김정호의 지도는 특수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이가 추구하는 지도는 모든 국민이 보아 유익한 것이라야 했다. 평화시에는 백성을 다스리고 여행하는 데 쓰이며, 전쟁시에는 쳐들어오는 적을 막는 데 쓰이는 것이 지도라고 믿었다.
목판본의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은, 그처럼 중요한 지도를 쉽게 보급하고 정확성을 유지시키기 위한 김정호의 신념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목판인쇄 수준은, 사방 10리 평방의 상황을 파리 대가리만한 글자로 판각한다 해도, 지도 1촌 평방(2.5㎠) 속에 한두 개의 산이름, 강이름을 넣기 어려웠던 정도였다. 그것이 김정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나 그이는 포기하지 않고 지도표(地圖標)를 창안했다. 즉, 글자 대신 부호를 만들어 썼다.
세밀한 활자가 지원되지 않았던 시절의 지도는 글자를 종이의 빈 공간에 적당히 배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도상에 새긴 지명과 실제 위치 사이에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김정호는 청구도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
예를 들어 '나주 역(驛)'을 표기할 때 '驛'이라는 글자는 정확한 실제 위치에 표기하고, '나주'는 근처의 적당한 공간에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해설에 덧붙이기를 "지도를 전사(傳寫)할 때 그 점을 특히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런 부탁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베끼면서 '나주역'을 한데 묶어 적당히 옮길 가능성이 상존했다. 그래서 창안한 것이 지도표다.
동여도에서부터 '驛'이라는 글자 대신 ' '(지도표 참고)라는 부호를 사용한 것이다. 지도표는 모사과정에서의 오류를 줄인다. 또한 지도판독을 용이하게한다. 그것도 못 미더웠던지 아예 나무에 새겨버린 것이 대동여지도다.


(1) 어떤 기호가 사용되었나?
영아, 읍치, 성지, 진보, 역참, 창고, 목소, 봉수, 능침, 방리, 고현, 고진보, 고산성, 도로
① 營衙(영아) - 병영(兵營 : 병마절도사), 수영(水營 : 수군절도사), 감영(監營) 등 군영(軍營)을 일컫는 말. 이곳에서 절제사·첨절제사·동첨절제사·수군만호·절제도위 등을 지휘·감독하였음. 곧 영문(營門)에 속하는 관아(官衙)라는 뜻. → 4. 鎭堡(진보) / 진(鎭)의 주진(主鎭)에 해당함.
  감영(監營 : 감사), 관찰사영(觀察使營 : 관찰사), 순영(巡營 : 순찰사), 상영(上營)은 모두 같은 뜻으로, 오늘날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직책과 관련된  명칭임. 영(營)이 읍치(邑治)에 있는 경우에는 이 기호(回)를 표기하지 않음.
② 邑治(읍치) -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의 치소(治所). → 오늘날의 시청, 군청(의 청사). 읍성(邑城)이 있으면 ◎, 성이 없으면 ○표시 안에 고을 이름을 적되 부, 목, 군, 현등의 단위명칭은 생략하였음.
   읍성은 읍치(邑治)를 직접 보호하기 위한 내성(內城)과 고을의 외곽에 축 조한 외성(外城)으로 구분함.
③ 城池(성지)-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성(城)의 둘레에 파놓은 연못(池). 여기서는 산성(山城)과 궐성(闕城 : 궁궐 외곽의 성을 생각하면 됨. 일종의 외성.)을 의미함. 성지(城地)는 성(城)과 그 영지(領地)를 의미함.
④ 鎭堡(진보) - 진(鎭)과 보(堡).
   진(鎭) :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지방행정구획의 하나이며 조선조 때의 진은 각 병영·수영·감영 밑에 둔 지방대의 진영(鎭營)을 일컬음. 조선시대에는 주진(主鎭 :절도사가 주재하는 병영), 거진(巨鎭 : 절제사, 첨절제사가 주재), 제진(諸鎭 :동첨절제사, 수군만호, 절제도위가 주재) 등 3등급이 있었음. 여기서는 거진(巨鎭)과 제진(諸鎭)을 이름.
   보(堡) : 흙으로 축대를 쌓아 만든 작은 성. → 진(鎭) 예하 병력의 주둔지로 볼 수 있음.
⑤ 驛站(역참) - 역(驛)과 참(站). 쉽게 역말(驛馬)을 갈아타던 곳으로 보아도 됨.
   역(驛) : 중요 도로에 약 30리 간격으로 설치되었고, 말과 역졸을 두어 공문을 전달하는 이외에 공무 여행자에게 말을 제공하고 숙식을 알선하며 그 밖에 관물(官物)의 수송도 담당하였음.
   참(站) : 역과 역 사이에 공무 여행자가 쉬도록 마련한 장소.
   역참제(驛站制)는 조선 선조 때 통신망 위주의 파발제로 고쳤음.
   역원(驛院), 원(院) :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의 편의를 위하여 역로(驛路)에 설치한 숙박시설.
⑥ 倉庫(창고) - 창고 : 여기서는 관창(官倉)을 이름.
⑦ 牧所(목소) - 목장(牧場) : 국가적(행정, 군사)으로 필요한 말을 먹이던 곳.
⑧ 烽燧(봉수) - 봉화(烽火). 여기서는 봉수대(烽燧臺)를 말함.
    봉수대는 봉화를 올리는 설비를 갖춘 곳.
⑨ 陵寢(능침) - 능(陵)은 임금이나 왕후의 묘(墓)를 말함. 능침(陵寢)이란 죽은 임금(왕후)의 침소(寢所)라는 뜻임.
    능호의 첫글자를 기호(○) 안에 표기함.
⑩ 坊里(방리) - 태종 13년(1413) 이후 현행 읍(邑)·면(面) 동(洞)에 해당하는 지방행정 구획의 하급단위로서 면(面)·방(坊)·사(社)가 있었으며, 방(坊)은 현행 동(洞)과 유사함. 여기서 방리(坊里)는 하급행정구역명을 통칭함.
⑪ 古縣(고현) - 폐현(廢縣). 폐지(통합, 이전)된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의 옛 치소  
⑫ 古鎭堡(고진보) - 고진(古鎭)과 고보(古堡). 옛 진(鎭)과 보(堡).
⑬ 古山城(고산성) - 옛 산성. 곧 주둔군이 없이 비워둔 산성.
⑭ 道路(도로) - 도로. 10리마다 방점을 찍는다.

대동여지도의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현대 지도의 범례에 해당되는 지도표를 사용했다는 데 있다. 14개 항목의 22개나 되는 범례를 이용하므로써 좁은 지면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 14개 항목 중 읍치(邑治), 역참(역참), 목소(목소), 능침(능침), 도로(도로), 방리(방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군사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이는 지도유설에도 기술되었듯이, 지도가 전시에 군사 작전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의견을 실제로 지도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도표에는 없지만 군현 경계를 점선으로 표시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행정 조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찬가지로 산지와 하천 역시 대동여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만 지도표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 아마도 이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너무나 상식적인 기호였기 때문일 것이다.


(2) 산지와 하천은 어떻게 표현하였을까.
대동여지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굵고 검은 선으로 표시된 산줄기이다. 즉, 산을 개별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모든 산을 연결하여 표현하였다. 한편 산지의 크기는 선의 굵기를 이용하여 나타냈는데, 낮은 산지는 가늘게, 높은 산지는 산형을 중복하여 표현하였다. 그리고 태백산과 지리산 같이 산세가 험한 산은 산정을 특별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은 풍수 지리 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산들이 줄지어 선 모습을 통해 기의 흐름을 표시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하천과 산맥은 산자분수령(山自分水領,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의 원칙을 지켜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현대의 산맥 인식과는 다른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천은 쌍선과 단선으로 표현하였는데 항해가 가능한 하천은 쌍선으로, 불가능한 하천은 단선으로 나타내었다. 이는 조선 시대의 수운 체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3) 도로와 행정 경계, 섬은 어떻게 표현하였을까.
조선 시대의 도로는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대로(大路)와 대로에서 갈라진 간로(間路)로 구분되었으나, 대동여지도에서는 모두 같은 굵기의 선으로 표시하였다. 조선 시대는 대략 30리마다 역참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대동여지도의 도로에는 수많은 역참들이 나타나 있다.
또한, 도로에 10리마다 방점을 찍어 어떤 구간이라도 거리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이 방점 간의 거리가 지도상에서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평가 지역에서는 대략 2.5㎝ 정도이나, 산악 지역의 도로나 꾸불꾸불한 도로에서는 이보다 짧게 나타난다. 이는 길의 가파름과 굽이진 정도를 평면인 지도상에 나타냈기 때문이다. 한편 지도를 흑백으로 목판 인쇄하였을 때 생길 수 있는 하천과 혼돈을 피하기 위해 도로는 직선으로 표현하였다.
대동여지도에서 점선으로 표현된 조선 시대의 군현 경계는 오늘날의 행정 경계와 달랐다. 강이 경계가 될 때 오늘날에는 강의 가운데를 행정 경계로 삼지만, 조선 시대에는 강을 토막 내어 각 부분을 이웃 군현끼리 나누어 가졌다. 산 줄기도 마찬가지여서, 오늘날에는 산의 능선이 행정 경계선이 되지만 조선 시대에는 각 산의 소속이 분명했다. 이것은 지도 제작의 한계가 아니라 그 당시의 행정 제도를 반영한 것이다. 한편 조선 시대의 행정 경계는 오늘날과 같이 인위적으로 나눈 경계가 아니라 자연 환경에 따른 생활 권역으로 구분되었음을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오류가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곳은 도서 지방이다. 대동여지도에는 1,105개나 되는 섬이 나타나 있는데, 이들 섬은 방향과 거리가 정확하지 않으며, 지형도 실제 모습보다는 그림에 가깝게 표현되었다. 아마도 이는 목판 인쇄라는 한계와 자료의 미비 때문일 것이다.


6. 동시대 다른 나라의 지도와 대동여지도의 비교
1). 서양지도 제작기술발전의 시대적 배경..
1500년대 이후 서양에서는 세계탐험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유럽의 각 나라에서는 식민지를 더 확보하기 위해 지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지도 제작 기술이 많이 발달하게 되었다.

2). 그 시대 다른 나라 지도의 예
1783년 일본 전도.
1. 정확한 경위도법을 이용하였다. 2. 동서남북의 방위체계를 이용하였다. 3. 해안선이나 섬들의 모양이 현대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라는 점으로 보아 이 시대에 일본에서도 이미 현대의 지도와 별 차이가 없는 우수한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7. 우리가 만든 과기원지도

8. 대동여지도의 의의
세계의 지도 발달사를 집대성한 「지도학사 The History of Cartography」 시리즈의 한국편을 집필한 레드야드(Gari Ledyard)는 <대동여지도>를 한국의 지도 중에서 지도학적으로 가장 우수한 지도라고 평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려 온 동양 지도의 지지(地誌, text)적인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우리 나라의 지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을 지도의 여백이나 지도 안에 기록하여 많은 정보를 담았던 전통이 강했다.

대동여지도는 목판본 지도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면서도 품격을 갖춘 지도이다. 내용상의 풍부함 위에 목판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선명함을 지니고 있다. 정밀한 도로와 하천, 정돈된 글씨와 기호들,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있는 산줄기의 조화와 명료함은 다른 어느 지도도 따를 수 없는 판화로서의 뛰어남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산자 김정호는 위대한 지도학자이면서 훌륭한 전각가였으며, 지도의 예술적 가치를 실현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즉 지도의 미적 품격을 추구했던 모습을 통해 지도를 예술로 인식, 승화하려 했던 김정호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대동여지도가 많은 사람에게 애호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목판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에게 널리 보급될 수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소장·휴대·열람하기에 편리한 데에 있었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18세기에 상세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지도는 일반인들은 볼 수도, 이용할 수도 없는 지도였다. 김정호는 정밀한 지도의 보급이라는 사회적 욕구와 변화를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하였던 측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이 아무런 기반이 없는 데에서 혼자의 독자적인 노력으로 대동여지도와 같은 훌륭한 지도를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비변사와 규장각 등에 소장된 수많은 앞선 시기의 지도들을 검토하고 종합한 결과인 것이다.


9. 참고자료 - 새로 쓴 교과서의 김정호
"어서 와. 오느라고 힘들었지 ?"
소년 김정호는 친구 최한기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최한기는 방으로 들어서며 들고 온 책 보퉁이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정답게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정답게 마주 앉았다. 김정호와 최한기는 어릴 적부터 뜻이 잘 맞아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이게 그 책들인가 ?"
김정호는 얼은 책 보자기를 풀었다. 집안이 가난한 그는 양반 자제로 부유하게 사는 최한기에게서 언제나 책을 빌려 읽곤 하였다.
"음, 이것이면 우리 고장의 지리지를 쓸 수 있을 것 같네."
  김정호는 늘 자기 고장의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고 싶어하였다. 지리지란 그 지방의 기후나 토지, 산물, 인구 등의 상태, 그리고 그 지방과 관련된 과거와 현재의 중요한 사실들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지도를 만들려면 그 곳을 여러 번 가 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
최한기의 말에 김정호는 고개를 저었다.
"얼핏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그러나 그렇지 않아. 그냥 돌아만 다닌다고 해서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높은 산에 열 번을 올라가 지형을 살피고 그린들 온전한 지도를 만들 수 있겠어 ? 지도를 만들려면 우선 많은 지식이 필요해."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초 지식부터 다져야 한다는 것이 김정호의 생각이었다. 최한기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김정호의 정열은 변함이 없어 지도 그리는 일을 삶의 전부로 삼았다. 김정호가 살던 1800년대는 이미 조선 초기와는 달리 사회가 많이 변하였다. 그래서 그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지리지와 지도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고 느꼈다.
김정호는 우선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많은 지리지와 지도를 살펴보았다. 지리지를 서로 비교해 보니, 엇갈린 기록이 많아 어느 한 기록을 따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여러 지도를 살펴보니,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거기에 기록된 내용은 이미 옛날 것이었다.
또, 각 고을의 지도를 만든 방법이 달라 서로 연결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점들을 새로이 보완하고 고쳐서 1834년에 통일된 우리 나라 지도를 완성하였다. 이것이 그가 서른 살 무렵에 남든 청구도이다. 이와 함께 그는 새로운 지리지도 만들었다.
김정호는 그 고을에 양반 수가 얼마나 되며 그 족보가 어떻다는 내용은 지리지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 고장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나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말고 기록에 남겨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김정호는 지리지가 지도의 근본이 되므로,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산줄기를 중심으로, 이 쪽과 저 쪽의 기후가 다르고 말도 다르다. 그리고 환경에 따라 생활 방식도 다르다. 그냥 땅만 갈라 표시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지리지와 지도를 함께 보아야 그 지방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1856년, 김정호는 <동여도>를 완성하였다. 이 지도는 궁궐뿐만 아니라 관청에서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지도 역시 종이에 그려서 만든 것이라 여러 곳에서 사용하려면 일일이 붓으로 베껴야만 했다. 이러한 작업은 매우 힘들 뿐만 아니라, 뭇 백성이 보아야 제 땅을 지키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정확한 지도를 대량 생산하기 위하여 목판에 지도를 새기기로 결심했다.
하루는 최한기가 김정호를 찾아갔는데. 몹시 앓고 이었다.
"아니, 이마가 불덩어리일세. 식구들은 어디 가고 ?"
"논에 벼 이삭 주우러 갔네. 내가 아프다고 누가 방에 자꾸 드나들면, 일하는 데 방해가 돼. 그래서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어."
최한기는 상처투성이가 된 김정호의 손을 보고 더욱 놀랐다. 손은 부르트고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 목판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게 아니가 ?
"목판을 만들기 시작했군."
최한기는 김정호의 열정이 눈물겨웠다.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 이처럼 고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구도 변변치 않던 그 때에 나무를 삶고 그늘에 말려서 톱으로 고르게 켠 다음, 일일이 손으로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좀 도와 줌세."
최한기는 번번이 김정호의 행동에 감동하곤 하였다. 그는 일찍이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열심히 새로운 학문을 배웠다. 그러면서 틈틈이 김정호의 지도 만드는 일을 도왔다.
김정호는 가로의 길이가40센티미터 정도, 세로의 길이가 30센티미터 정도인 목판 앞 뒷면에 도엽 126장을 새겼다. 그는 목각을 종이에 찍어 보고, 틀린 곳이 있으면 당장 고쳐서 완전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마침내 1861년, 그는 오랜 고생 끝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 그 목판을 종이에 찍어 이어 놓으면 그 높이가 이층 건물보다 높은 6미터 60센티미터나 된다.
<대동여지도>의 '대동'은 우리 나라를 일컫는 말로, 동방의 큰 나라라는 뜻이다. 이 말에는 우리 나라가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큰 존재라는 의미도 있다. 김정호의 이러한 생각에서 우리는 그의 자주성을 엿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생명의 원천인 물줄기를 중심으로 지형을 나타내고 있어, 산과 물의 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지도 제작법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나라만의 독특한 기법인데,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서 이 전통 기법을 보다 정확하게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김정호는 지도에 십 리마다 점을 찍어 고을 사이의 거리를 표시하였다. 그리고 산성과 봉수대도 나타내어, 나라가 위급할 때에 군사 지도로도 쓸 수 있게 하였다.
김정호는 지도 그리는 일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아 <대동여지도>와 같은 위대한 문화 유산을 남겼다. 누구보다도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한 김정호의 정신은 그가 만든 지도와 함께 언제까지나 우리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참고 :위 글은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역사를 바로 알리려는 분들의 쉼 없는 노고에 힘입어 1997년 교과서 개편 때 왜곡된 사실을 모두 바꾸고 , 정말 존경받아야 할 고산자의 인생 역정을 사실적을 그려냈습니다. 진실의 힘과 보이지 않는 분들의 열정이 되돌려 놓은 역사를 즐겨 보시기 바랍니다.


10.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이상태 <한국고지도 발달사> 서울: 혜안, 1999.
한국도서관학연구회 <韓國古地圖> 景仁文化社 , 1982
이찬 <韓國의 古地圖 - Old maps of Korea> 서울: 汎友社, 1991
조석필 <태백산맥은 없다>
양보경 <고산자 김정호의 지리사상>
지리교사 모임 '지평', <지리로 보는 세상>
<출판저널> (1991/04/20)
     - 우리고지도, 어떻게 만들어 져왔나. - 삼국시대부터 해방이후까지 지도발달의 전개
<월간 산> 1990년 12월호. '산악인 이우형씨 '대동여지도' 완성했다.
http://www.polestarmap.co.kr
http://myhome.shinbiro.com/~kiyoun/j213a5.htm

http://ngi.ngi.go.kr  

http://my.dreamwiz.com/nac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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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ogether.or.kr/gilbut/
http://plaza1.snu.ac.kr/~minny/etc04.html
http://www.thingskorean.com/kor/theme5/main.htm
http://my.netian.com/~younggnn/data/history/history5-1gundaitadong/h51-7-5.htm
비디오자료 : KBS 영상사업단 <김정호와 대동여지도> 1990

-한글파일에는 사진들과 또 각장의 맨 밑부분에 각주형식의 참고문헌들과 인용한 사이트를 적어놓았는데 복사하는 과정에서 옮겨지지 않음을 말씀드립니다. 친구들과 같이 준비한 '대동여지도의 독도법' 이라는 제목의 내용의 프린트 물이였습니다.
발표후 토론내용에 대해서 적어보겠습니다. 제 기억에만 의존해서 적는 것이라 전달하는 과정에서 정확하지 않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저희는 김정호가 전국을 3번이나 답사하고 백두산을 8번 오랐다는 사실이 과장되고 와전된 주장이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김정호가 전국을 직접 돌면서 지도를 만들지 않았더라도 지도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전국을 최소한 한번 이상을 돌아다녀야 하고 그 과정에서 지형답사형식으로 직접 조사를 하지 않았을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김정호가 계속 한곳에만 머무르며 지도를 만들기엔 자료도 불충분하고 미심쩍은 부분이 분명히 있었을꺼라 추측하고 답사형식의 이동이 있었을 겁니다.
저희가 kbs에서 구입해 본 비디오 자료에서, 어느 분께서(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현재 대동여지도로 잘못 알려진 '대동여지전도'를 목판 4장으로 복원하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복원'이라는 점의 특성상 원 제작자가 처음 만들 때보다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고, 대동여지도의 목판과의 크기차이도 있겠지만 126/4=약31. 31*1년=31년. 물론 정확한 기간은 알수 없지만 126장의 목판을 새기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을 것이고 김정호 개인이 전국을 답사하면서 목판제작까지 하기엔 시간상의 무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정호 혼자서 목판을 판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려서 목판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김정호가 특별히 언급하지 않고 대동여지도에 대한 기록이 적어, 추측일 뿐입니다.
'김정호는 지도제작을 위해 꼭 직접 답사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상태님이 쓰신 '한국 고지도 발달사'에 나와있는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만드는 과정으로 대신 설명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확히 전해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직접 답사하지 않아도 각 지역의 지도를 모아서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라고 옛 문헌을 인용한 부분이 나옵니다. 이에 미루어 김정호도 지도를 편집하는 과정으로도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흔히들 지도제작 하면 먼저 '답사'라는 단어를 떠오르는데 정확한 지도를 위해서는 답사보다는 '수학적 계산과 지식'이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편집하면서 '기하원본'에 나와있는 확대 축소법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정호가 축적이 다른 지도들을 모아서 일정한 축척의 한 장의 전도를 만드는 데는 그만의 기술이 있었을 텐데요, kbs비디오에 보면 '기하원본'에 '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내용이 나와있고 김정호도 그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장점 중에 목판으로 새겨서 널리 보급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종이 값이 싼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 두 장도 아닌 22첩의 지도를 평민들에게까지 널리 보급할수 있었겠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대동여지도의 기호표를 보면 대부분이 군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군사지도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과연 이러한 지도가 평민들에게 널리 보급하기 위함 이였을까요. 또 많이 보급했다면 과연 몇 질 정도 복사를 해서 배포를 했었을 것인지. 많이 배포를 했다면 지금까지도 몇몇이 소장하고 있거나 여러 권 남아있어야 하는데(이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대동여지도가 몇 질 정도 남아있는지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김정호가 대동 여지도를 목판에 새긴건 지도를 평민들에게까지 널리 보급 한다기 보다는 정확한 지도를 제작해 백성들을 다스리는 위정자에게 나누어 주기 위함이라고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또 당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의 장거리 이동이 필수적이었을 것이고 점점 정확한 전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김정호는 그러한 지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더욱더 교역과 장거리 이동을 활성화 시키고자 지도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정호가 평민의 신분으로써 규장각과 비변사의 지도들을 볼 수 있었던건 친구 최한기와 최한기의 소개로 만난 신헌,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최한기와 김정호의 친분을 흔히들 둘이 어려서부터 친구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평민이었던 김정호와 양반이었던 최한기가 친구가 될 수가 있다는건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어렸기에 친한 친구였었고 그 관계를 유지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김정호와 최한기의 만남을 김정호가 어른이 되어서 규장각을 찾아갔을 때 처음으로 만났으며 최한기가 김정호의 뜻에 공감해 도와주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교수님께선 김정호와 최한기가 어렸을때부터 친구라는 이야기는 후세사람들이 둘의 관계를 잘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하셨습니다. 규장각과 비변사의 중요한 지도를 아무에게나 쉽게 보여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자기분야에 대해 깊게 연구하여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된다면 여기저기서 부탁을 하고  일을 맡기는 것처럼, 김정호도 30대쯤엔 이미 지도에 관한 명성과 노하우가 쌓였을 것이고 당시 지도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최한기가 김정호의 이야기를 듣고 무장인 신헌을 소개시켜주는 한편 둘의 도움으로 비변사와 규장각의 지도를 볼 수 있도록 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교수님께서도 교수님의 상상력을 동원한 이야기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이후 약 100년 동안 우리나라는 지도 제작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일본이 만든 지도를 아무런 비판없이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를 단지 일본의 영향으로 돌린다면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상 기억나는 것을 적어보았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고 교수님의 설명이 있었지만 잘 못 들은 부분도 있고 억지로 덧붙이자면 전달과정에서 불확실(?)해 질 것 같아서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 자료출처 : 백두대간 첫마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