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양보경(성신여대 교수)
1. 한국 지도의 고전(古典),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우리나라 고지도의 대명사이며, 우리나라 지도의 고전이다. 1898년 일본 육군이 조선 침략의 기초 단계로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측량기술자 60명과 한국인 2 ~ 3백명을 비밀리에 고용하여 1년 강 조선을 샅샅이 뒤져 5만분의 1 지도 3백장 정도를 만들었는데, <대동여지도>와 큰 차이가 없어 감탄하였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이어진 일본의 한국 토지측량에 <대동여지도>를 사용하였다는 일화와 함께 <대동여지도>의 정확성과 훌륭함을 전해 주는 증거로 널리 전해 온다. 일본 국회도서관에는 일본 육군에서 군사지도(兵圖)로 사용하였던 <대동여지도>가 보관되어 있어, 이 이야기가 전설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 지도의 발달사를 집대성하기 위해 미국에서 진행중인 세계적인 작업 『지도학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시리즈(총 8권)의 한국편 서술 「한국의 지도학("Cartography in Korea)」(Gari Ledyard 집필)에서도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에 가장 많은 내용을 할애하였다.
위와 같은 타국의 평가가 없었다 하더라도,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고지도, 나아가 우리나라 지리학의 대명사로 인정받고 있다. 현전하는 <대동여지도>중 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본은 보물 제 8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는 1934년 일제가 교과서에 수록한 이래 남한의 초등학교 교과서와 북한의 중등과정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지리학자, 최고의 지도이다.
<대동여지도>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고지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 관해 잘못 알려진 사실도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 가장 자세하고 가장 큰 지도, 국가의 무관심 속에 김정호 개인이 만든 지도, <대동여지도>이전에는 훌륭한 지도가 없었던 획기적인 지도,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하며 백두산을 일고 차례나 오르면서 만든 지도, 그러나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 하여 결국 김정호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국가에 의해 불태워진 지도라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를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대동여지도>를 일반 집의 벽에 걸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지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대동여지도>가 아닌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를 <대동여지도>라고 소개하고 있는 책들도 있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대동여지도>는 어떠한 지도인가 ?
2. 우리나라 최대의 전국지도
<대동여지도>는 전국지도(全圖)이다." (그림 : <청구전도(청구전도)>- 목판본(가채), 김정호, 1861년, 22첩, 첩31.2 ×20.2 cm, 지도 660.0 ×410.0 cm,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대동여지도>의 초간본인데 후에 소장자가 채색을 하고, 표지에 지도 제목을 <청구전도>로 바꾸어 붙였다. )
지도의 유형을 나눌 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지도에 포함된 대상 지역의 범위에 따라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나눈 지도의 유형에는 세계를 그린 세계지도(또는 天下圖), 한 나라 전체를 그린 전국지도, 도를 단위로 그린 도별지도(道別圖), 군현 및 그 하위 지역을 그린 분도(또는 군현지도), 외국을 그린 외국지도, 주요 도시를 그린 도성도, 궁궐. 관청을 그린 궁궐도(宮闕圖). 관아도(官衙圖), 군사지역과 변경지역을 그린 군사지도인 관방지도(關方地圖), 기타 특수도 등이 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국을 대상으로 그린 전도이다. 전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지도이므로, 다른 어느 유형의 지도보다도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지도로서 의의를 지닌다. 우리나라 전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우리 국토를 어떻게 표현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도가 바로 전국지도이기 때문이다. 전국지도는 여러 유형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제작된다. 그러므로 각 유형의 지도의 종합이며, 제작 당시 지도학의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동여지도>는 현존하는 전국지도 중 가장 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는 전체를 펼쳐 이으면 세러 6.6m 가로 4.0m에 이르는 대형지도가 되어, 적어도 3층 높이 이상의 공간이 있어야 걸 수 있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는 <대동여지도>를 상설 전시해 놓은 곳이 거의 없다. 높이 7m이상의 공간을 갖춘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동여지도>를 잘 볼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지도가 크기 때문에 웬만한 책자에는 <대동여지도>를 수록하기가 힘들었다. 너무 축소되기 때문에 지도의 내용과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책에 수록하기 위한 사진 촬영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책에는 <대동여지도>의 부분만을 수록하곤 하였으며, 이 또한 <대동여지도>의 전모를 일반인들이 보기 힘들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1925년 10월 8, 9일자 동아일보는 김정호에 관한 기사를 싣고, 기사 끝에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대동여지도>의 출판을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김정호를 위대한 영웅으로 널리 알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조선광문회에서 <대동여지도>를 보급하려 하였음을 보여 준다. 1910년에 설립된 조선광문회는 빼앗긴 국토와 역사의 줄기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 조선 구래의 문헌 도서 중 중개하고 긴요한 자료를 수집, 편찬, 개간하여 귀중한 도서를 보존, 전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니, <대동여지도>의 출간 의도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으며, 1936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2/3로 축소한 <대동여지도>의 영인본을 간행한 것이 최초의 고지도 영인사업이었다.
이후 <대동여지도>는 여러 차례 영인 간행되었다.( 주 : 1965년에 한국사학회(韓國史學會), 1973년 삼진사(三珍社)가 한국사대계본(韓國史大系本)으로 영인 발행하였고, 1976년에는 1973년의 영인본을 바탕으로 경희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에서 『대동여지도 색인』을 발간하였다. 이어 1985년에 광우당(匡祐堂)에서 원본 크기로 발행을 하였으며, 『대동여지도 별권 색인표』를 함께 간행하였다. 1990년에는 <대동여지도>의 시방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는 「동여도(東輿圖)」(23帖)의 지명을 <대동여지도>에 첨가한 2/3 축소 복간본을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대동여지도>에 비하여 7,400여 개가 더 많이 수록된 「동여도」의 지명을 첨가한 『대동여지도 - 동여도 주기 첨가. 축소판』은 면명(面名) 등 7,400여 개의 지명을 별색 활자로 첨가하여 고지명 연구, 지역의 역사지리. 향토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판매, 간행한 영인본의 경우 모두 원본 크기의 <대동여지도>가 아니라 2/3로 축소된 모습이었던 것도 <대동여지도>의 크기가 컸음을 반영한다. 한국학 관련 학자들과 산악인들이 많이 보고 있는 2/3축소본 <대동여지도>의 경우 지도의 면적은 원본 지도의 44.4%, 즉 원본의 반에도 못 미치는 크기여서 원본의 위용을 제대로 맛볼 수 없는 시각상의 단점을 지니고 있다.
3. 경위선표식 축척지도
큰 지도가 좋은 지도인가 ?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흔히 조선 후기의 지도학의 성과로 손꼽는 것이 대축척지도(大縮尺地圖)의 발달이다. 지도는 지표면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일정한 크기로 지표 현상을 줄여서 나타내는데, 이 줄인 비율 즉 지도상의 거리와 지표상의 실제거리의 비율을 축척이라고 한다. 대축척지도란 현실을 될수록 크게 종이에 나타낸 지도이며, 소축척지도란 많이 줄여서 현상을 작게 표현한 지도이다. 대축척지도의 제작이 어려운 것은 지도가 커지는 만큼 그 안에 채워야 할 내용이 많으며, 정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축척이 두 배로 커지면 지도의 면적은 네 배로 커진다. 작게 그리면 직선으로 표현된 해안선도 크게 그리면 곡선으로 그려야 하는 것처럼, 대축척지도는 단순히 소축척지도를 확대한 것이 아니다. 크기에 상응하는 정확성과 풍부함을 수반할 때 대축척지도로서의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는 지도에 축척을 명시한 축척지도이며, 경위선표식(經緯線表式) 지도이다. 경위선표식 지도란 비교적 일정한 크기의 방안(方眼 : 눈금)을 바탕에 그림으로써 축척을 적용하여 그린 지도를 말한다. 방안을 사용한 지도는 방안지도, 또는 옛 문헌의 표현을 빌어 경위선표식 지도, 선표도(線表圖), 방안좌표지도(方眼座標地圖) 등으로 불러 왔다. 이 밖에도 계란(界欄), 방격(方格), 방괘(方罫), 획정(劃井)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경위선표는 오늘날의 지도에서의 경위도좌표(經緯度座標)가 아닌 단순한 가로 세로의 눈금선을 뜻하며, 경위선표식 지도는 17세기 후반 이후 우리나라 지도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이전 지도에서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축척을 표시하였다. <대동여지도>를 펴면 원고지같이 눈금이 그려져 있는 면이 보인다. 가로로 8개, 세로로 12개의 눈금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지도 한 면을 그대로 나타낸 것으로 제목이 쓰여 있지 않다. 이를 오늘날 우리들은 '방안축척표' 또는 '방괘표(方罫表)'라고도 부른다.이 한 개의 눈금(方眼)에 '매방(每方) 10리'라고 기록하여 눈금 하나가 10리임을 명시하였다. 또 '매편(每片) 종(縱) 120리, 횡(橫) 80리'라고 기록하여 지도의 한 면(片)의 동서 길이가 80리, 남북 길이가 120리임을 나타냈다. 하나의 눈금 즉 10리가 2.5cm이고, 지도 한 면이 동서로 80리이므로 20cm, 세로는 120리이므로 30cm가 된다.
지도상에서 축척은 일반적으로 거리를 가늠하는 데 사용된다. <대동여지도>는 한 면이 120리 ×80리로서 쉽게 거리를 짐작할 수 있도록 고안 된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전체가 227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백을 제외한 지도 부분은 213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의 목판에는 지도 두 면(판)을 앉혀 목판의 매수는 126판이며, 뒷면에도 지도를 판각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목판 1면에는 지도 4면에 해당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목판은 총 60장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주 : 현재 <대동여지도>의 목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총 11장(지도 25면),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1장(2면)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동여지도>목판의 재질은 피나무이며, 크기는 가로 41 ~ 42.5cm, 세로 29.7 ~ 31.3cm, 두께 1.0 ~ 1.5cm이며, 숭실대본은 가로 42.2cm, 세로 31.8cm, 두께 1.0 ~1.5cm이다.)
축척은 지도 내용 속에도 표시되었다. 즉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거리, 축척 표시 방법은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특히 도로상의 10리 점은 그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평탄한 지역에서는 10리 간격이 멀게, 산지가 있는 곳에서는 10리 간격이 가깝게 표시되었다. 이는 10리 간격의 점이 지도의 축척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지형적인 조건을 알려주며, 지점과 지점간의 직선 거리가 아닌 도로상의 거리를 표현한 것임을 알게 한다. 실제 지도 이용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편리한 지도가 아닐 수 없다.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얼마인가 ? 이는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쟁점이다. <대동여지도>의 축척에 관한 이견은 1리를 오늘날의 거리 단위로 환산하는 데서 연유한다. 오늘날 우리는 10리를 4km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일제시기 이후 일본의 거리 단위가 도입된 이후의 일이다. 19세기 후반, 즉 <대동여지도>를 만들던 당시의 10리가 오늘날의 거리 개념으로 얼마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당시의 10리를 4.2km로 보는 견해와 5.4km로 보는 견해이다. 10리를 4.2km로 보게 되면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약 1 : 160,000 정도가 되며, 10리를 5.4km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축척은 1 : 216,000이 된다.
1 : 160,000계열의 축척을 주장하는 견해는 지도의 크기와 실제 지표면의 크기를 대비하여 축척을 계산한 것으로, 면적. 지점 간의 거리 등으로 계산한 것이다. 1 ; 216,000의 축척은 경위도 1도의 거리 관계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주 : 1 : 160,000계열의 축척이란 1 : 160,000 ~ 1 ; 168,000의 축척을 주장하는 견해를 말한다. 이는 축척을 측정하는 방법에서 오는 차이인데, 약 1 : 160,000으로 보는 견해(방동인, 이찬, 홍시환, 김두일), 약 1 : 162,000으로 보는 견해(전상운, 우낙기), 약 1 ; 164,000으로 보는 견해(한균형), 1 : 165,000 ~ 168,000으로 보는 견해(원경렬), 1 ; 166,000 ~ 168,000으로 보는 견해(김상수)가 있다. 또 <대동여지도>의 축척을 1 : 216,000으로 보는 견해는 성남해, 이상태, 이우형 등의 주장이다.) 축척이 실제 지표상의 거리를 지도상에 어떤 비율로 줄여 나타냈는가 하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1 : 160,000 계열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사실 18세기에 만든 '비변사지도(備邊司地圖)'와 같은 지도는 1 : 50,000 ~ 80,000의 축척을 지닌 경위선표식 지도로, 이 지도를 이으면 <대동여지도>보다 큰 우리나라 지도가 된다. 그러나 이 지도는 군현지도였지 전국지도는 아니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지도 중에서 가장 크고 자세한 지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전국지도 중에서 가장 큰 대축척지도이다.
4. 내용이 풍부하고 지도학적으로 우수한 지도
앞서 언급한 『지도학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시리즈의 한국편을 집필한 레드야드(Gari Ledyard)는 <대동여지도>를 한국의 지도 중에서 가장 지도학적으로 우수한 지도라고 평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려온 동양 지도의 지지(地誌, text)적인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우리나라의 지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을 지도의 여백이나 지도안에 기록하여 많은 정보를 주고자 하였던 전통이 강했다. 김정호가 앞서 만들었던 전국지도인 <청구도>에도 이러한 전통이 강하게 반영되어, 군현명 옆에 인구, 전답, 군정(軍丁), 곡식, 별칭, 군현품계, 서울까지의 거리 등을 써넣어 지도가 복잡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글씨를 가능한 줄이고, 표현할 내용을 기호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확립하여 현대지도와 같은 세련된 형식을 보여 주었다.
이를 위하여 '지도표(地圖標)'라는 방법을 고안하였는데, 이는 지표상의 각종 현상을 지도상에 기호로 표현하였는지를 그려 놓은 것으로 현대 지도의 범례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14개 항목 22종이 표시되었다. 예를 들어 능(陵), 역(驛), 창(倉), 방리(坊里), 산성(山城), 진보(鎭堡), 고현(古縣) 등의 경우 공통된 어미를 지도에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즉 문수산성의 경우 산성 표시 기호를 그리고 '문수'라고만 기록하여 글자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대동여지도>에는 총 11,760여 개의 지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글자의 수를 줄인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한 예로 산천, 봉수(烽燧), 능침(陵寢), 역참(驛站), 창고(倉庫), 고개 등과 현재의 주요 현상은 물론 옛 현(古縣 ; 옛 읍터), 옛 진보(鎭堡), 옛 산성(山城) 등 당시에는 이미 사라진 역사적인 흔적을 기록해 놓아 지역의 옛 모습을 알고자 할 경우 <대동여지도>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대동여지도>의 내용과 표현상 가장 큰 특징은 산과 물의 특징적인 표현과 분별성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산이 가장 강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 이유는 산을 독립된 하나의 봉우리로 표현하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산맥)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줄기를 가늘고 굵게 표현함으로써 산의 크기와 높이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형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분수계(分水界)와 산줄기가 이를 통해 명료하게 나타난다.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대간(大幹)을 가장 굵게 나타냈으며, 다음으로는 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큰 강을 나누는 정맥(正脈)을 굵고 그리고, 정맥에서 갈라져 나가 큰 내를 이룬 줄기를 그 다음으로 굵게 표현하는 등 산줄기의 위계에 따라 굵기를 달리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지녔던 산천에 대한 인식체계를 지도화한 것으로, 지도의 사상적인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지도 속에는 당대인들의 국토관, 세계관 등이 담겨져 있다. <대동여지도>의 산천 표현을 통해 우리는 지도의 중요한 기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산맥 표현은 풍수나 묘자리를 그린 산도(山圖)에서도 보였지만 이를 지도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은 <대동여지도>이다. 현대의 등고선식 지도를 보고 산맥을 찾는 것은 전문가들도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우리 국토의 맥락과 산줄기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동여지도>를 찾는 이유는 <대동여지도>가 가진 산천 표현의 뛰어남과 그 정확성 때문이다. <대동여지도>가 고전(古典)인 이유를 여기에서도 본다.
<대동여지도>의 장점은 많지만 특히 주목되는 내용이 도로, 군현의 경계 표시, 봉수, 역원, 1,100여개에 달하는 섬(島嶼), 목장, 그리고 앞서 언급한 역사지리적인 옛 지명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도로 표현이 독특하여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대동여지도>에서 도로는 직선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지도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이는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이기 때문에 흑백으로 인쇄될 수밖에 없었고 곡선으로 표현되는 하천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도로를 명확히 인식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하천과 더 명확히 구별하기 위해 10리마다 도로에 점을 찍었다. 10리 간격의 점은 축척과 함께 길의 거리를 알려 주어 이용자에게 매우 편리함을 주게 되는 장점을 보인다.
5. 인쇄본 지도 - 지도의 보급과 대중화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목판으로 간행한 목판본 지도, 즉 인쇄본 지도라는 점이다. 물론 15세기부터 목판본 지도가 우리나라에서 제작되었다. 신숙주가 1471년(성종2)에 지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에 포함된 일본 유구국 지도가 그 효시이다. 우리나라 지도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1년)에 수록된 <팔도총도(八道總圖)>를 비록한 9장의 지도가 가장 앞선다. 그러나 이들은 독립된 지도가 아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간행 이후 민간에서 이 유형의 지도만을 모아 지도책을 만들었고, 이들 중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동국지도(東國地圖)>나 조선 후기에 유행한 지도책 등 목판본도 많은 수에 달했다. 또한 18세기 이후에는 지도 수요의 증가에 따라 목판본 지도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목판지도의 증가는 서울지도뿐만 아니라 전국지도, 군현지도 등 지도의 여러 유형에서 다함께 일어났다.
목판지도는 지도의 보급과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다. <대동여지도>는 상세하고 내용이 풍부한 대형 목판본 전국지도였다. <대동여지도>이전에 목판본 전국지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목판본 전국지도로는 세로 길이 1m정도의 <해좌전도(海左全圖)>와 길이 140cm정도의 <팔도전도(八道全圖)>등이 있다. 이러한 크기의 전국지도는 벽에 걸어 놓고 한 눈에 우리나라 전체를 조망할 수 잇는 장점이 있지만 , 작은 크기의 지도에 더욱이 목판으로 새겨서 만들 경우 각 지역의 산, 하천, 역원 등 상세한 내용을 담기가 어렵다.
<대동여지도>는 <해좌전도>와 비교할 때 길이로 약 6.7배, 넓이로는 약 45배이다. 그러므로 지역에 관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정보를 수록할 있는 크기였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세한 정보와 지도를 인쇄본으로 만들어 보급했다는 것이다. 인쇄본으로 만들 경우 가장 큰 장점은 많은 수의 지도를 찍어낼 수 있어 지도의 보급이 용이하고, 지도를 대중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자세한 지도들이 많았으나 그 지도들은 필사본으로서 제작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또 내용이 상세하고 풍부한 지도일수록 일반 국민들에게 접근이 어려운 관청이나 궁중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산자 김정호는 방대한 크기의 <대동여지도>를 목판으로 인쇄했다. 그러므로 상세하고 내용이 풍부한 지도를 접하기 어려웠던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대동여지도>는 획기적인 지도였을 것이다. <대동여지도>가 국민들에게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목판본 지도여서 여러 본을 찍을 수 있고, 많은 사람에게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호는 1834년에 전국지도인 <청구도(靑邱圖)>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청구도>는 목판본이 아닌 필사본 지도책이었는데, 김정호가 27년에 걸쳐 수정하여 만든 발전된 지도가 <대동여지도>였으며, <청구도>에 비해 획기적으로 개선한 점이 바로 목판본의 형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에서 지도가 소수의 관리, 학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김정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김정호는 국토의 모습을 담은 지도가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할 교양이며, 국가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지도와 지지가 하다고 생각했음을 엿볼 수 있다. 김정호가 만든 서울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역시 목판본으로, 서울을 담은 목판지도의 백미로 꼽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대동여지도>는 목판본 지도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면서도 품격을 갖춘 지도이다. 내용상의 풍부함 위에 목판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선명함을 지닌 것이다. 정밀한 도로와 하천, 정돈된 글씨와 기호들,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있는 산줄기의 조화와 명료함은 다른 어느 지도도 따를 수 없는 판화로서의 뛰어남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산자 김정호는 위대한 지도학자이면서 훌륭한 전각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휴대용 절첩식 지도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국지도이면서도 보기 쉽고 가지고 다니기 쉽게 만든 지도이다. 김정호는 이를 위해 <대동여지도>를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형태로 만들었다. 이 점은 <대동여지도>에 앞서 1834년(순조 34)에 김정호가 완성했던 전국지도인 <청구도>와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형태상으로 <대동여지도>는 분첩절첩식의 형태로 되어 있어 책자의 형태로 된 것에 비해 매우 간략하고, 지도가 보거나 가지고 다니기에 매우 편리하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 22층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고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여 전국지도가 되도록 하였다. 1층*첩)의 지도는 동서로 8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1절(折 또는 1版)로 하고 1절을 병풍 또는 아코디언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 지도를 만들었다. 22첩을 연결하면 전체가 되며, 하나의 첩(帖)은 다시 절첩식으로 접혀져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형태이다.
분첩절첩식 지도는 가지고 다니거나 보관, 열람에 매우 편리하다. 일부분이 필요할 경우 일부분만을 뽑아서 휴대하며 참고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강릉까지 여행을 할 경우 지도 전체를 가지고 갈 필요 없이 서울에서 강릉까지 수록된 제 13층 지도만 뽑아서 가지고 가면 된다.
또한 절첩식 지도의 장점은 부분으로 자세히 볼 수 있고, 서로 이어 볼 수 있어 분합(分合)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를 한 장의 종이에 그렸을 경우, 세로 6.6m 가로 4.0m 정도의 큰 지도가 되어 가장자리의 지명만 읽을 수 있고 대부분의 중심부에 있는 지명은 읽을 수 없다. 또 책자로 만들었을 경우 넓은 지역을 한번에 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분첩절첩식 지도는 필요한 부분을 선택하여 연결함으로써 대형 지도가 지니는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7. 동양식 전통지도의 집대성, 금자탑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하여 초간본을 찍어 내고, 1864년(고종 원년)에 재간본을 찍어낸 지도이니, 우리나라 고지도의 역사에서는 비교적 나이가 어린 지도이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내용상으로는 지지(地誌)에 기초하여 풍부하고 상세한 정보를 수록함은 물론, 지도학적으로는 조선 후기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지도 발달의 성과를 종합한 지도였다. 그것은 지도의 윤곽, 지도의 내용, 지도의 형태 등 모든 면에서 앞선 시기의 여러 지도의 장점을 취하여 발전시킨 것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국가가 중심이 되어 지도를 제작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국가와 관청은 물론 민간에서도 지도 제작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김정호는 조선 후기에 발달했던 군현지도, 방안지도(경위성표식 지도), 목판지도, 절첩식지도, 휴대용지도 등의 성과를 독자적으로 종합하고, 각각의 장점을 취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대동여지도>의 가장 뛰어난 점은 조선 후기에 발달했던 대축척지도의 두 계열, 즉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이후 민간에서 활발하게 전사되었던 전국지도. 도병지도와 국가와 관아가 중심이 되어 제작했던 상세한 군현지도를 결합하여 군현지도 수준의 상세한 내용을 겸비한 일목요연한 대축척 전국지도를 만든 것이다.
<대동여지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목판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었으며, 개인적으로 소장. 휴대. 열람하기에 편리한 데에 있었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18세기에 상세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지도는 일반인들은 볼 수도, 이용할 수도 없는 지도였다. 김정호는 정밀한 지도의 보급이라는 사회적 욕구와 변화를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하였던 측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이 아무런 기반이 없는 데에서 혼자의 독자적인 노력으로 <대동여지도>와 같은 훌륭한 지도를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비변사와 규장각 등에 소장된 이전 시기에 작성된 수많은 지도들을 검토하고 종합한 결과인 것이다.
고종대에 총융사,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76년(고종 13) 판중추부사로서 일본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우리측 대표였던 신헌(申櫶)은 그의 문집『금당초고(禁堂初稿)』의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에서 자신이 지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와 민간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완벽한 지도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며, 이 일을 김정호에게 위촉하여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무관이었던 신헌의 도움이 있었다면, 그리고 신헌 자신이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면 김정호는 관청에 소장되어 잇던 여러 지도를 두루 열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호가 앞선 시대의 여러 사람의 노력과 그 작품들을 면밀하게 살피고 대조하여 뛰어난 지도로 결집하였음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김정호가 아무런 바탕 지도없이 지도를 만든 것은 아니었으며, <대동여지도>를 빼앗기고 옥사하였다는 것도 이제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분명해지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전통적인 동양식 지도의 마지막 금자탑이다. 그것은 <대동여지도>가 조선시대 사람들의 국토관과 지역에 대한 인식을 가장 분명하게 담고 있고, 그것을 지도학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한 지도이기 때문이다.
※ 자료출처 : 백두대간 첫마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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