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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산줄기와만남/대동여지도&김정호

고산자 김정호의 지리사상

by 두타행 2011. 6. 1.

고산자 김정호의 지리사상

                                                                                   - 양보경, 성신여대 지리학과 교수 -


김정호의 생애와 업적

고산자 김정호는 우리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지리학자로 누구나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가 만든 <대동여지도> 또한 우리 나라의 고지도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김정호 자신이나 그가 지도나 지지를 제작한 과정 등은 잘 밝혀져 있지 않다. 고산자의 출생지는 오랫동안 황해도 봉산(鳳山)이라고 알려져 왔는데, 1980년대 후반에는 황해도 토산(兎山)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어쨌든 고산자는 황해도에서 출생하여 서울로 옮겨와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호의 출생과 사망시기도 분명하지 않다. 청도 김씨(淸道 金氏) 족보에도 김정호는 실려 있지 않으며, 조선 후기의 어느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장을 역임하고, 고지도 연구에 업적을 남긴 김양선(金良善) 목사는 김정호가 1804년에 태어나 1866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하였다. 근거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이 지적은 타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김정호의 마지막 저작으로 추정되고 있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민비(閔妃)를 고종의 왕비로 기록한 것으로 볼 때 1866년까지는 생존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호와 그의 업적에 관한 기록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4종 정도이며, 그나마도 매우 간략하다. 오주 이규경(五洲 李圭景)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의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과 「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球圖辨證說)」, 조선시대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모은 겸산 유재건(兼山 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중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 혜강 최한기(惠崗 崔漢綺)가 쓴 <청구도(靑邱圖)> 제문(題文), 고종대에 총융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76년(고종 13)에 판중추부사로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우리측 대표였던 신헌(申櫶)의 문집 『금당초고(禁堂初稿)』에 실린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등에서 김정호와 그의 작업에 대한 부분적인 모습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김정호는 서울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1840년대), 그리고 전국지도인 <청구도> (1834), <동여도(東輿圖)>(1857),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 1864)를 제작하였으며, 전국지리지인 『동여도지(東輿圖志)』(1834∼1844), 『여도비지(輿圖備志)』(1853∼1856),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를 편찬하였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전국지도와 전국지리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가 국내의 지도·지지 제작 특히 전국을 대상으로 한 지도·지지 제작에 특별한 관심과 의지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산자 김정호의 친우이며, 19세기의 뛰어난 실학자인 혜강 최한기가 세계지도와 세계지지의 제작에 힘을 기울였던 것과 대비되며, 두 사람이 역할 분담을 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김정호의 지도와 지리사상
<청구도>(1834) <동여도>(1857) <대동여지도>(1861, 1864) 등 김정호가 만든 지도들은 전도(全圖)이다. 전도는 우리 나라 전체를 그린 지도이므로, 다른 어느 유형의 지도보다도 우리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지도로서 의의를 지닌다. 우리 나라 전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우리 국토를 어떻게 표현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도가 바로 전국지도이기 때문이다. 전국지도는 여러 유형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제작된다. 그러므로 각 유형의 지도의 종합이며, 제작 당시 지도학의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정호는 조선 후기에 발달했던 군현지도, 방안지도(경위선표식 지도), 목판지도, 절첩식지도, 휴대용지도 등의 성과를 독자적으로 종합하고, 각각의 장점을 취하여 전국지도들을 만들었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들의 뛰어난 점은 조선 후기에 발달했던 대축척지도의 두 계열, 즉 18세기 중엽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東國地圖)> 이후 민간에서 활발하게 전사되었던 전국지도·도별지도와 국가와 관아가 중심이 되어 제작했던 상세한 군현지도를 결합하여 군현지도 수준의 상세한 내용을 겸비한 일목요연한 대축척 전국지도를 만든 데에 있다.

김정호가 만든 전국지도들은 현존하는 전국지도 중 가장 크다. 이들은 전체를 펼쳐 이으면 세로 6.6m 가로 4.0m의 대형지도이다. 이 지도들은 지도에 축척을 명시한 축척지도(縮尺地圖)이며, 경위선표식 지도이다. 경위선표식 지도란 비교적 일정한 크기의 방안(方眼)을 바탕에 그림으로써 축척을 적용하여 그린 지도로서 선표도, 방안좌표지도(線表圖, 方眼座標地圖) 등으로 불러 왔다. <대동여지도>는 한 면을 남북 120리 동서 80리로 구획함으로써 쉽게 거리를 짐작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축척은 지도 내용 속에도 표시되었다. 즉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나타냈다. 특히 도로상의 10리점은 그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 지형적인 조건을 알려 준다.



세계의 지도 발달사를 집대성한 『지도학사 The History of Cartography』 시리즈의 한국편을 집필한 레드야드(Gari Ledyard)는 <대동여지도>를 한국의 지도 중에서 지도학적으로 가장 우수한 지도라고 평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려 온 동양 지도의 지지(地誌, text)적인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우리 나라의 지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을 지도의 여백이나 지도 안에 기록하여 많은 정보를 담았던 전통이 강했다. 김정호가 앞서 만들었던 전국지도인 <청구도>에도 이러한 전통이 강하게 반영되어, 군현명 옆에 인구, 전답, 군정(軍丁), 곡식, 별칭, 군현품계, 서울까지의 거리 등을 써 넣어 지도가 복잡하게 보였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글씨를 가능한 한 줄이고, 표현할 내용을 기호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확립하여 현대 지도와 같은 세련된 형식을 보여 주었다.

<대동여지도>의 내용과 표현상 가장 큰 특징은 산과 물의 특징적인 표현과 분별성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산이 가장 강하게 눈에 들어 온다. 그 이유는 산을 독립된 하나의 봉우리로 표현하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산맥)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줄기를 가늘고 굵게 표현함으로써 산의 크기와 높이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형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분수계(分水界)와 산줄기가 이를 통해 명료하게 드러난다.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대간(大幹)을 가장 굵게, 다음으로는 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큰 강을 나누는 정맥(正脈)을 굵게 그리고, 정맥에서 갈라져 나간 줄기를 그 다음으로 굵게 표현하는 등 산줄기의 위계에 따라 그 굵기를 달리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지녔던 산천에 대한 인식체계를 지도화한 것으로, 지도가 사상(思想)의 투영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김정호는 <청구도> 범례에서 “산마루와 물줄기가 지면의 근골과 혈맥”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땅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당대인들의 국토관, 자연관이라 할 수 있으며, 김정호는 전통적인 자연관을 지도에 가시적이고 적확하게 반영하였던 것이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에서 또 주목되는 내용이 도로, 군현의 경계 표시, 봉수, 역원, 1,100여개에 달하는 섬(島嶼), 목장, 그리고 역사지리적인 옛 지명들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도로 표현이 독특하여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대동여지도>에서 도로는 직선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지도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었다. 이는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이기 때문에 흑백으로 인쇄될 수밖에 없었고 곡선으로 표현되는 하천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도로를 명확하게 인식시켰다. 또한 하천과 도로를 더욱 명확히 구별하기 위해 10리마다 도로에 점을 찍었는데, 도로상의 10리 간격의 점은 축척과 함께 길의 거리를 알려 주어 이용자에게 매우 편리한 거리 표현 방식이다.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이며, 김정호가 앞서 만든 지도보다 개선된 점이 목판본 지도 즉 인쇄본 지도라는 점이다. 목판지도는 지도의 보급과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다. <대동여지도>가 유명해진 것은 목판본 지도이므로 여러 본을 찍을 수 있고 많은 사람에게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세하고 내용이 풍부한 지도를 접하기 어려웠던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대동여지도>는 획기적인 지도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지도가 소수의 관리, 학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김정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김정호는 국토의 모습을 담은 지도가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할 교양이며, 국가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지도와 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음을 엿볼 수 있다. 김정호가 만든 서울지도로서 서울 목판지도의 백미로 꼽히는 <수선전도> 역시 목판본으로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목판본 지도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면서도 품격을 갖춘 지도이다. 내용상의 풍부함 위에 목판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선명함을 지니고 있다. 정밀한 도로와 하천, 정돈된 글씨와 기호들,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있는 산줄기의 조화와 명료함은 다른 어느 지도도 따를 수 없는 판화로서의 뛰어남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산자 김정호는 위대한 지도학자이면서 훌륭한 전각가였으며, 지도의 예술적 가치를 실현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즉 지도의 미적 품격을 추구했던 모습을 통해 지도를 예술로 인식, 승화하려 했던 김정호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전국지도이면서도 보기 쉽고 가지고 다니기 쉽게 만든 지도이다. 김정호는 이를 위해 <대동여지도>를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형태로 만들었다. 이 점은 <대동여지도>에 앞서 1834년(순조 34년)에 김정호가 완성했던 전국지도인 <청구도>와 가장 다른 점이기도 하다.

분첩절첩식 지도는 책자 형태의 지도에 비해 간략하고, 보거나 가지고 다니기에 매우 편리하다. 또한 절첩식 지도의 장점은 부분으로 자세히 볼 수 있고, 서로 이어 볼 수 있어 분합(分合)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우리 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 22층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고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여 전국지도가 되도록 하였다. 1층(첩)의 지도는 동서로 8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1절(折 또는 1版)로 하고 1절을 병풍 또는 어코디언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 지도를 만들었다.

22첩을 연결하면 전체가 되며, 하나의 첩은 다시 절첩식으로 접혀져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부분만 필요할 경우 일부분만 뽑아서 휴대하며 참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강릉까지 여행을 할 경우 지도 전체를 가지고 갈 필요 없이 서울에서 강릉까지 수록된 제13층 지도만 가지고 가면 된다. 김정호가 지도를 실제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살피는 데 유용한 자료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대동여지도>가 많은 사람에게 애호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목판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에게 널리 보급될 수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소장·휴대·열람하기에 편리한 데에 있었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18세기에 상세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지도는 일반인들은 볼 수도, 이용할 수도 없는 지도였다. 김정호는 정밀한 지도의 보급이라는 사회적 욕구와 변화를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하였던 측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이 아무런 기반이 없는 데에서 혼자의 독자적인 노력으로 <대동여지도>와 같은 훌륭한 지도를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비변사와 규장각 등에 소장된 수많은 앞선 시기의 지도들을 검토하고 종합한 결과인 것이다.


김정호의 지리지와 지리사상
김정호는 전국 지도 외에 전국지리지인 『동여도지(東輿圖志)』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를 편찬하였다. 『동여도지』(20책 중 17책 영남대 도서관 소장)는 김정호가 편찬한 최초의 전국지리지로서, 1834년∼1844년 사이에 편찬되고, 1861년경까지 계속 수정·보완되었다. 『여도비지』(20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는 최성환(崔王星煥)과 김정호가 함께 편찬한 지지이며, 『대동지지』(15책, 고려대 도서관 소장)는 김정호의 마지막 저작이다.

『여도비지』는 각 도별로 군현 단위의 지지만을 수록하여 김정호가 단독으로 편찬한 나머지 두 지지와 상이한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동여도지』는 지역별 지지 외에 『「역대주현(歷代州縣)」 「역대강역(歷代疆域)」 「역대풍속(歷代風俗)」 「역대관제(歷代官制)」 「정리고(程里考)」가 수록되어 역사지리적인 내용과 도로에 관련된 내용이 첨가되었다.『대동지지』는 각 도별 군현 지지를 앞에 두고, 후반부에 「산수고(山水考)」 「변방고(邊防考)」 「정리고(程里考)」 「방여총지(方輿總志, 歷代志)」 등을 수록하였다. 『대동지지』의 체제는 『동여도지』의 것을 한층 발전시킨 형태로서 『동여도지』의 내용에 산맥과 하천, 국방 문제 등을 강화한 것인데, 이 두 부분은 전하지 않는다.

『동여도지』와 『대동지지』의 체제는 이전의 전국지리지나 읍지에서 예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 방식이다. 즉 각 지역 단위로 지역의 성격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지와, 강역·도로·국방·산천 등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시킨 형태로서 주목된다. 이는 조선 전기의 전국지리지 편찬과 조선 후기의 읍지 편찬의 맥을 계승한 후 조선 후기에 새로 꽃피운 실학적 지리학의 연구 성과를 지리지라는 틀에 종합하여 집대성하려는 시도였다고 보인다.

현대지리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지역지리학의 연구방법과 계통지리학적인 연구 방법을 결합하여 완벽한 지지를 만듦으로써 국토를 보다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틀을 『대동지지』에서 정립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실학적 지리학의 대두와 발전은 상업·유통 경제의 발달 등 국내의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와 그와 관련된 국토 공간 구조의 변화에 바탕한 것이기 때문에, 실학적 지리학을 지리지에 접합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변모되고 있던 사회, 경제, 공간 구조를 반영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


내용상으로 보면, 김정호의 지지들은 이전의 전국지리지나 읍지들과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첫째, 전통적으로 중시되던 인물·성씨·시문에 관련된 항목들과 내용이 제외되어, 지리지의 사실적, 물질적 측면이 강조된 점이다.

둘째는 군사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동여도지』에는 무비(武備) 편을 두고 『성지(城池)』·『전략(戰略)』 조를 항목으로 설정하였으며, 『대동지지』에는 『전고(典故)』조를 독립항목으로 만들어 외국의 침략과 역대 전투를 기록하였다. 『대동지지』에서는 『산수(山水)』 『성지(城池)』 『영아(營衙)』 『진보(鎭堡)』 『봉수(烽燧)』 『창고(倉庫)』 『진도(津渡)』 『목장(牧場)』 등의 조항도 국가의 방어와 관련된 것으로 설명하여 국방을 중시하였던 그의 지리적 사고를 읽을 수 있다.

셋째, 내용의 철저한 사실성과 고증을 기초한 지지 편찬의 자세, 계속적인 보완을 통한 지역의 변화상을 반영한 태도 등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지지학(地誌學)의 논리를 살필 수 있다. 이러한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3종의 지지는 각기 특징을 지니고 있다. 『동여도지』는 김정호가 섭렵한 많은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비교, 인용함으로써 자료 수집에 노력한 고산자 지지(地誌)의 초기 형태이다. 『여도비지』는 내용의 압축과 간략한 서술이 특징이다. 이 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각 도의 첫머리에 정리되어 있는 호구(戶口), 전부(田賦), 강역표(疆域表), 극고표(極高表), 방위표(方位表), 군전적표(軍田籍表) 등의 군현별 통계표이다.

특히 그의 지도 제작에 참고가 되었다고 보이는 극고표와 방위표는 다른 책에서 보기 힘든 기록이다. 『대동지지』는 김정호의 일생의 집념과 노력이 결집된 지지이다. 『대동지지』에는 성숙한 지리학자로서의 자세와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이 책에는 김정호의 독자적인 견해가 정리되어 있는데, 연혁, 지명, 산천, 도로 등에서 드러난다. 또한 철저한 사실성에 기초하여 분명하지 않은 내용은 과감하게 삭제하고, 항목을 조정하였다.

김정호가 편찬한 3종의 전국지리지는 조선 전기에 국가적인 사업으로 시행하였던 전국지리지 편찬 이후, 그리고 17세기 후반 반계 유형원이 편찬한 <동북여지지> 이후에 제작된 가장 훌륭한 사찬 전국지리지이다. 그는 전통적 지역지리학인 지지학과 계통지리학에 가까운 실학파 지리학의 양대 맥락을 결합하여 새로운 지지학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김정호 사상의 진보성
김정호는 지리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업적과 그의 영향은 우리 국토와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 모든 분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는 당대의 지리학을 종합하려 했던 그의 선진적인 자세와, 그의 저작들이 지니는 사실성에 기인한다. 고산자 김정호는 국가의 경영에서 지도와 지지를 제작하고 활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천하의 경륜은 모두 지지도에 있다(『추측록(推測錄)』 권6 『추물측사(推物測事)』 ‘지지학’).”고 한 최한기의 지적은 김정호의 견해이기도 하다. 김정호는 지지와 지도를 상호보완적인 존재로 인식하였으며, 지도의 미진한 곳을 지지로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하여 개인의 힘으로 지도와 지지를 집대성하고,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결국 그가 이룩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 편찬은 19세기 조선의 국토 정보를 집대성하여 구축하고,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국토 정보화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실천한 선각자라 할 수 있다. 그가 만든 지도와 지지들은 전통적인 동양식 지도와 지지의 마지막 금자탑이다. 그의 작품들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국토관과 지역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투영하고 있는 점에서 시대성을 발휘하며, 이는 지도와 지지가 성취해야 할 본질에 성공적으로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고산자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를 제작, 편찬한 데서 나아가 이들 자료를 간행하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도 간행을 달성한 것은 국토에 대한 정보를 국가와 지배층이 독점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며, 국토 정보를 일반에게 보급하여 국민들이 공유할 대상으로 인식했음을 보여 준 것이다. 국토 정보의 구축과 체계화는 물론, 정보를 보급하고 대중화하려 하였던 그의 사상이 급변하고 있던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현실 속에서 더 돋보인다.또한 <대동여지도>에서 볼 수 있는 휴대용 형태의 지도 제작은 상세하고 풍부한 국토 정보를 이동하면서 이용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는 점에서 선진적이다. 이용자와 수요자를 고려한 것이며, 역시 지역 정보의 실제적인 활용을 추구한 것이다.

한미한 계급 출신이었던 김정호가 광범위한 국토 정보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학문을 주도하였던 사회계층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즉 조선 전기에는 국가 주도의 지도·지리지 편찬이 이루어졌고, 조선 후기에는 국가와 양반층이 중심이 되어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일반 평민층에서도 고급 국토 정보에 접근하여 그것을 한층 발전시켜 새로운 국토 정보 체계로 구축할 수 있었다는 것은 김정호 사상의 진보성을 보여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개인을 탄생시켰던 조선 사회와 국토의 변모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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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출처 : 백두대간 첫마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