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개를 찾아서/여원재
- 영호남의 관문, 운봉고원의 두 고개
남원 가는 길에 빛고을을 먼저 갔다. 거기 살기는 의사로 살되 백두대간에 미쳐 마음 늘 산에 두고 사는 사람 하나 있어 만날 약속은 있었지만, 이왕 빛고을에 왔으 니 새 단장을 했다는 망월동에 들러 어스름까지 거닐다가 밤늦어 남원으로 갔다. 깊은 밤, 잠든 남의 마을 기어드는 일에 이골이 난 사람이라면 오히려 아는 이 없는 게 더욱 마음 편한 법. 시절이 시절에 물들어 굳이 나그네보다 붙박이가 더 많은 여관방을 찾아가지 않아도 좋고, 더러는 어쩌다 이 아득한 곳까지 집을 떠나왔는가 걱정하면서 아무 빈터에나 차를 세워 담요 한 장으로 견디는 여름밤도 참 고마워라.
길모퉁이, 밤새 한 잠도 자지 않고 뜬눈으로 길을 가리키던 신호등이 있었다. 어디 에든 길은 있다고, 너무 절망하지 말라고, 고맙게도 화살표까지 꺼내 보이면서 밤새 새우잠의 머리맡을 일깨우던 선지식 같은 신호등이 있었다. 어쩌자고 나의 길은 한 낮에만 빛나고 밤이면 깜깜하여 보이지 않는가. 마침내 어두워도 보이는 길만이 길 이라고 누군가 신호등 아래 쏜살같이 질주하였으니 오오, 이 밤에 나는 또 길을 잃었구나. 길 위에서 길 잃었으니 그 또한 나의 길. 날이 밝으면 그 모든 전조등을 켜고 온통 불붙는 마음으로 지리산에 가리라.
전설 속의 여인이 지키는 고개
두고 온 중부에는 장마비가 온다는데 남부의 아침에는 햇살이 곰실거렸다. 장수 길로 10리 남짓, 게서 다시 올곧게 난 들길을 두어 마장 건너면 슬그머니 몸을 틀어 구비치는 고갯길이 바로 전설 속의 여인이 지키는 고개, 여원재(女院峙)다. 흔한 이야기로는 왜구의 노략질이 한창이던 무렵 고갯마루 주막에 살던 젊고 아리따운 주모에 얽힌 전설이 남아 있다. 비록 저녁마다 사립에 붉은 등 내다 거는 몸일망정 어찌 왜구의 노리개가 되랴고 벼린 칼로 제 가슴을 도려내어 죽었으니 사람들이 고갯마루 길섶 바위에 돋을새김하여 장차 미륵이 되었단다.
여원재 넘어 운봉 들판에 가면 옛 이야기는 그저 황산 싸움뿐이다. 태조 이성계가 싸움의 주인공이니 조선시대의 옛 글 역시 너나없이 다투어 기록을 남겼는데, 때는 우왕 6년(1380) 9월이며 적장의 나이는 겨우 십 오륙 세나 되는 아지발도였다. 태조 가 활을 쏘아 아지발도를 죽인 자리는 지금도 붉은빛이 역력하여 피바위라 부르고, 일제 시대에 여지없이 동강나버린 대첩비가 고스란히 화수리 비전 마을에 누워 있다. 신통한 일로, 지금도 운봉 토박이의 열 가운데 아홉은 읍장 이름은 몰라도 아지발도는 다 안다. 거의 ‘아스팔또’에 가까운 발음으로 기억하는 그 어린 왜장 이름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 아예 귀에 박힌 탓이다.
소문이 그만하였으니 여원재와 더불어 이야기 하나쯤 남기지 않았을 터인가. 팔량치(八良峙)를 넘어온 아지발도를 향하여 태조가 여원재를 넘을 적에 백발의 여인이 나타나 승리를 점쳐 주었단다. 더불어 여원재란 이름도 싸움에 이긴 태조가 지었다 는 것이다. 주막의 젊고 아리따운 주모가 죽어 백발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길 턱 아래 마애여래불이 그 여인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옛길로 한양에서 진주, 통영으로 가던 제 6로가 지나는 길목이었으니 주막에 드는 나그네마다 입에 거품 꽤나 물었을 성싶다.
여원재와 팔량치 사이, 운봉 고원
도형으로 말하자면 대충 사다리꼴을 닮았다. 아래 꼭지점의 왼쪽은 남원이며, 오른쪽은 함양이다. 당연히 위 꼭지점의 왼쪽이 여원재라면 오른쪽이 팔량치다. 여원재와 팔량치 사이, 그러니까 사다리꼴 윗변에 들어앉은 고원이 바로 운봉과 인월이다. 생김이 그러하니 여원재 길을 남원에서 오를 적에는 오르막이 버겁지만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이내 내리막이 없고, 반대로 함양에서 오르는 팔량치 도 다름없다. 크게 보면, 해뜨는 곳과 해지는 곳에 각각 반쪽의 고개가 걸렸으니 여원재와 팔량치를 합쳐야 비로소 한 고개가 완성된다.
여원재에서 팔량치까지는 24번 국도 길로 얼추 40리가 안 되고 운봉과 인월 사이는 20리 남짓하다. 운봉은 본래 신라와 백제의 접경이 되어 때에 따라 주인이 뒤바뀌는 일은 진한과 마한 시절부터 자주 있었다. 연구가들은 602년 백제의 신라 모산성 (아영성, 아막성과 함께 모두 운봉의 옛 이름이다) 공격을 들먹이며 대략 이 무렵을 전후하여 여원재에 국경이 이루어져 있음을 짐작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느 때 인가는 팔량치를 국경으로 삼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백두대간 동쪽의 운봉땅이 지금처럼 전라도가 되고 영호남이 팔량치에서 갈리는 것은 고려 시대부터라고 문헌들은 적었다.
운봉이야 구름 걸린 지리산 자락이 지어 보낸 이름일 것이 틀림없고, 인월은 황산 싸움에서 날이 어두워지자 태조가 달을 끌어다 밝혀 싸움에 이겼다는 전설을 품은 이름이다. “천석꾼은 디글디글 혔구, 조선 팔도가 다 아는 만석꾼도 있었다”는 운봉 들판 구경을 겸하여 운봉현의 형옥(刑獄) 터가 남았다는 유평 마을에 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산은 높고 들은 아득하여 고원이란 말이 더욱 새롭다. 유평 마을 숲 속에 남았다는 형옥 터는 얼마 전에 숲을 없애고 논밭을 일구어 결국 찾지 못하고, 남원이나 함양 보다 무려 20일이나 빨라 7월 중순이면 이미 벼이삭이 팬다는 들판을 가로질러 동구에 장승이 서 있는 서천 마을로 되돌아 나갔다.
목기와 벅수와 동편제의 고을
딱히 그렇게만 꼽으면 이내 서운하여 몇몇이 돌아앉겠지만 운봉하면 다투어 앞에 나서는 것이 목기와 동편 소리, 그리고 운봉 사람들이 흔히 벅수라고 부르는 장승이다. 운봉에 가서 다짜고짜 ‘들머리에 장승이 서 있는 마을’을 물으면 사람들은 참 난감해 한다. 그런 마을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말이다. 우선 읍에서 가까운 마을부터 꼽자면 서천리와 북천리가 있고 여원치에서 작은 동산을 에돌아 오르면 권포리가 있다. 인월면과 아영면에도 여전히 장승이 동문을 지키는 마을은 흔하고 산내면의 민중 도량 실상사 장승은 너무 유명하여 이미 대접받는 문화재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되었다.
운봉의 장승은 영락없이 평생 흙과 더불어 늙어온 농투산이 차림으로 우스꽝스러운 엄포와 우락부락한 해학이 쪼아낸 건강한 농경 문화의 표본이다. 그 험상함은 깊은 밤중에 홀로 마주 하여도 결코 무섭지 않으며, 더러 잘못이 있더라도 사정을 얘기하면 짐짓 모른 체 헛기침을 던질 듯한 관대함은 절문을 지키는 사천왕과 사뭇 다르다. 보면 볼수록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보다는 손님을 마중 나온 늙은 이장 부부에 더 가깝다. 아무려나 저렇게 돌에 새긴 마음 동구에 세워두고 잠든 마을 사람들의 꿈길 참 편하리. 그만 간다 하니 또 금세 낯빛이 슬퍼 입술 삐죽이는 서천 마을 벙거지 장승이여.
서천에서 인월로 10리 길이면 길섶에 황산대첩비를 알리는 푯돌을 만난다. 푯돌이 가리키는 소나무 숲길로 들어가면 전촌 마을이고, 운봉의 골물을 모아 장차 진주 남강으로 흘러가는 여울을 건너면 비전 마을이다. 모두 대첩비을 두고 얻은 이름인 데 비전 마을은 송홍록에서 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동편 소리가 나고 자란 곳이다. 비전 마을의 첫집 바람벽에는 앞산 이름 없는 무덤에서 흘러나온다는 ‘내 소리 받아가라’를 현수막에 걸어 소리 마을의 전통을 뽐내고 있었다. 송홍록 일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빨래터의 널돌까지 모두 수난을 당한다는 비전 마을에는 명창 박초월의 생가가 남아 변함없이 소리 찾는 이들이 줄을 선다.
성(姓)으로 부르는 고개 이름
이야기의 시작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마한의 왕이 진한의 공격을 막기 위해 정장군(鄭將軍)에게 지키도록 한 고개는 정령치가 되고, 황장군이 지키던 고개는 황령치가 되었다. 정령치는 남원에서 노고단으로 넘는 포장길이 이미 오래 전에 관광길이 되어 부산하고, 황령치는 다만 달궁 뒷산의 ‘황나드리’란 지명과 관련하여 실마리를 찾는데 아직 분명치는 않다.
달궁 이야기는 다시 살이 붙어 대략 기원을 전후하여 멸망하는 마한의 마지막 왕이 행궁을 삼아 최후의 항전을 벌인 무대로 발전한다. 더불어 가깝게는 노고단 아래 성삼재 역시 각각 성이 다른 3명의 장수로부터 이름을 얻고, 멀게는 팔량치마저 8명의 병사가 지켰다는 내력으로 그런 이름을 얻었다는 전설이 되었다. ‘달을 끌어다 싸웠다’는 전설이야 아무렇거나 달구경이 그만인 인월에서 보면 팔량치는 생김이 마치 시위 당긴 활처럼 휘어, 다만 그 활과 달을 말미암아 인월의 이름 내력을 떠올려 보는 것도 크게 흉볼 일은 아닐 터이다.
조선시대의 팔량치는 팔량관(八良關)이라 하여 꼬박 나라에서 지켰다. 나랏길이 지나는 중요 길목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왜적으로부터 호남의 곡창을 지키는 으뜸 관문이었던 탓이다. 흔적은 역력하여 흥부 마을로 자부심이 대단한 성산 마을에는 지금도 산성 자리가 뚜렷하며, 팔량치에 여원재까지의 산성만도 그 수를 한참 헤아려야 한다.
지금은 합민성에서 합미성, 할미성, 성산산성까지 사람마다 제멋대로 부르는 팔량관 산성에 올라보니 과연 함양 땅의 전망이 창창하여 거칠 게 없다. 마한에게는 진한의 땅이었고, 백제에게는 신라의 땅이었던 곳. 잠시 수자리 살던 신라 병사의 눈으로 보니 그리운 고향집이 참 아득하여 창검 대신 사진기와 수첩을 내려놓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산성에 오를 때면 늘 지고 가는 짐 같은 생각이지만 사람이 마소처럼 머리 숙여 밥 먹지 않는 한 이 땅에 싸움 그치는 날은 없으리. 그리하여 사람도 산천도 끝내 싸움으로 사라지리. 아아, 우리는 어찌하여 내 밥도 남의 밥도 그저 꼿꼿이 먹어야 배부른 이상한 짐승이던가.
놀부처럼, 그리고 흥부처럼
두 돌이 가까운 아들 녀석, 자기가 말 배운 게 얼마나 되었다고 티브이를 보면서 ‘에스이에스’를 찾는다. 그게 뭔지도 모를 듯 싶지만 웬걸 다 안다. 내가 ‘우리 아들은 천재야’라고 하면 아내는 그저 퉁명스럽게 ‘보통일 뿐’이란다. 그애 누 나인 다섯 살 난 딸애는 애비도 잘 모르는 팝송을 흥얼거린다. 놀이방에서 덧돈을 주고 미국산 선생에게 배운 영어 솜씨이니 애비보다 한결 발음이 정확하다. 애비는 종종 그들이 먹는 밥의 절반은 남의 밥인 것이 두렵다.
누구든지 팔량치 고갯마루에 가면 으레 흥부와 놀부, 그 케케묵은 옛이야기를 떠올려야만 한다. 흥부가에, “경상도는 함양이요 전라도는 운봉인데 운봉 함양 두 고을 품에 흥부가 사는지라”, “흥부가 어디에 살았는고 하니 팔량치 재 밑에 살았것다”, “연재(현지에 사는 사람들은 여원재는 연재, 팔량치는 팔령이라 부른다)를 넘어 비전을 지나 흥부집에 당도하니”로 등장하는 흥부네 집이 바로 그곳인 까닭이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가 더 이상 아무런 삶의 잣대도 되지 못하는 이 시절에, ‘아끼기는 놀부요, 마음은 흥부 같은 사람’을 그리워한다면 분명 촌스러운 대접을 받으리. 그러나, 그래도 변함없는 우리들의 화두는 ‘점점 더 많이 필요한 남의 밥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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