頭陀行의 강 따라 길 따라
지리산 둘레길 답사
풍요로운 땅을 찾아서 - 전북 남원시 주천면, 운봉읍
☞ 다녀온 날 : 2010년 10월 2일(토요일)
☞ 날씨는 : 맑음
☞ 누구와 : 홀로
☞ 어디서 어디까지 : 남원 주천면 장안리-남원 운봉읍 비전마을 코스
☞ 주요 답사 코스 :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주천파출소)-행정교-비부정(솟보거리주막)-주천면 내송마을-개미정지
(서어나무숲)-솔정지-구룡치-사무락다무락-주천면 회덕마을(당산나무 쉼터)-운봉읍 노치마을
(백두대간 마을, 노치샘)-덕산저수지-질매재-동복오씨 묘역-운봉읍 가장마을-덕산교-가장교-운봉읍
행정마을(행정교, 서어나무숲)-운봉읍 엄계마을(엄계교)-남원양묘사업소-운봉읍 소재지(운봉사거리)
-운봉초등학교-운봉읍 서천리 서림공원(석장승)-운봉읍 북천마을 협동교-운봉읍 신기교-운봉읍
사반교-운봉읍 비전마을(황산대첩비, 가왕 송흥록, 국창 박초월 생가)
【지도】국토지리정보원 발행 1:25000 지형도(남원, 운봉)
【참고사항】
- 운봉-주천구간은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이 지금도 잘 남아있는 구간이다.
특히 10km의 옛길 중 구룡치와 솔정자를 잇는 회덕∼내송까지의 옛길(4.2km)은 길 폭도 넉넉하고
노면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경사도가 완만하여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둘레길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 운봉-인월구간은 너른 운봉 들녘을 따라 지리산 서북능선과 백두대간을 조망하며 호쾌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10km 전 구간이 제방 길과 임도로 되어 있어 길 폭이 넓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고,
황산대첩비, 국악의 성지, 송흥록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다.
- 길을 바꾸는 곳에서는 나무로 된 이정표와 도로에 화살표시가 잘 되어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 걷는 도중 곳곳에는 간이매점이 있어 라면, 음료, 식수, 커피 등 간단하게 요기를 할 수가 있으며
민박집이나 가든, 식당 등을 만나기 때문에 그때 상황에 따라 해결하면 된다.
♣ 지리산 둘레길 나들이
우리의 山下에는 아름답고 풋풋한 삶이 있습니다
우리의 山下에는 정겹고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산하에는 애환과 희로애락, 민족성,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우리의 산하와 그리고 길,
우리 민족만이 느낄 수 있는 사랑과 뿌리깊은 文化가 숨쉬고 있습니다.
올레길, 둘레길, 마실길, 산소길
모두가 다 정겹고 나의 故鄕 같은 길입니다.
전부터 시간이 되면 걷고자 했던 지리산 둘레길........
산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걷는 길이 조금은 밋밋할 것 같아 미뤄왔는데
지리산 둘레길이 모 방송국에 소개되면서 둘레길을 걸어보기로 한다.
먼저 지리산 둘레길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지리산길(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16개 읍·면, 80여개 마을을 잇는 300여km의 장거리 도보길이란다.
2011년까지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環)형으로 연결하였단다.
지리산 길은 사람과 생명, 성찰과 순례의 길........
지리산 길(둘레길)은 지리산 둘레를 잇는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길이란다.
한 땀 한 땀 수놓듯 이어가는 지리산 둘레길을 통해 만나는 사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모든
생명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 보시기를.......
외따로 떨어져 지내며 이제나저제나 사람의 채취를 느끼고 싶어 동구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시는
할머니, 소로 이랑을 갈며 한 해, 한 철 농사를 이어가는 농부, 한 때는 좌, 우로 나뉘어 낮과 밤을
달리 살아야 했던 아픈 상처도 지리산 길은 품고 있단다.
길의 출발은 순례길, 2004년 생명 평화를 이 땅에 뿌리고자 길을 나선 순례자들의 입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지리산 순례길이 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나왔다고.......
그 제안이 다듬어지고 구체화된 게 지리산길(둘레길)이란다.
지리산길은 소외된 지역의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이 길 위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평온함과 평안,
공존과 화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고......
참 바쁜 세상살이 살붙이마저 마주 대할 시간이 자주 없다.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지만 마음은
허허롭기만 하다. 지리산 길(둘레길)에 오셔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웃과 정을 나누는 시공의
길을 느껴보고 처음과 같이 앞으로도 지리산 길(둘레길)은 나눔과 되돌아봄의 길이어야 한다고........
책임여행, 공정여행........
지리산 길(둘레길) 대부분은 이곳에 사시는 주민들의 도움과 양해로 열렸단다. 지리산 길(둘레길)이
열리고 우리사회가 유행을 쫓듯 많은 분들이 오시기 시작하는데 때론 관광버스를 타고 오시기도
한다고.....
관광이란 이름의 여행이 이뤄지는 곳에서는 경쟁과 자본의 논리만 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짬도
없고, 여유와 성찰은 더욱 불가능하다.
내 주장과 내 권리만 쫓아가다 보니 힘겹게 일하는 지역 분들의 농작물에 손을 대기도 하고 먹다
버린 쓰레기들이 나 뒹굴고, 서로 많은 사람을 재우려는 지역의 욕심도 보인다.
지리산 길(둘레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물이든 동등한 인격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남원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주천 소재지)부터 시작하여 남원 운봉읍 구간을 답사하기 위해
직행버스를 타고 남원으로 이동한다.
남원에 도착해서 시내버스를 타고 남원 주천면에 가려 했지만 시내버스 시간이(남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주천, 육모정행 하루 16회 운행) 맞질 않아 택시를 이용한다.
택시를 타고 기사님한테 요즘 둘레길 사람들이 많이 오죠, 여쭈어 보니 추석에는 엄청나게 많이 왔단다.
나는 속으로 방송의 위력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먼 나 또한 이렇게 가고 있으니 말이다.
택시요금 6,400원을 지불하고 남원 주천면 파출소 앞에서 내린다.
가을 하늘이 곱다.
들판은 하루가 다르게 황금색으로 변해가고 가을의 대명사인 코스모스도 활짝 피어 남정네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09시 30분, 주천면 파출소 옆으로 지리산 둘레길은 열려 있다.
벌써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둘레 길을 떠나고 있으며 지리산 둘레 길을 알리는 나무 이정표가
친근하기만 하다.
우측으로는 영재봉이 우뚝 솟아 있다.
행정교를 건너면 비부정
비부정은......
옛날에는 이 길목에 솟보거리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전남지방, 경남 일부에서 한양 가는 유일한 옛길로서 전북과 전남 경계인 숙성치-원터거리-솟보거리
주막-목넘어 고개를 거쳐 한양을 가는 길목이었고,
신라시대에는 함양을 거쳐 경주로 통하는 길,
조선시대에는 한양 가는 유일한 길로 지금은 비부정이라는 쉼터가 자리 잡고 있다고......
비부정에서 운봉까지는 13.6km나 된다.
- 남원 주천면 출발점인 주천파출소(사진 좌측), 둘레길은 파출소 좌측으로 지나가고(사진 우측)
- 친근한 나무 이정표와(사진 좌측)둘레길은 주천면에 있는 행정교를 지난다(사진 우측)
- 행정교에서 본 지리산 영재봉
- 비부정(사진 위 좌측), 비부정에서 내송마을로 가는 도로(사진 위 우측),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택시번호까지(사진 아래 좌측)
- 남원 주천면 들녘
09시 59분, 비부정에서 남원시 이백면 쪽으로 조금 걷다가 내송마을(안솔치)에 다다른다.
내송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 한양 조(趙)씨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그 후로 경주 김(金)씨, 서산
류(柳)씨 등 여러 성씨들이 차례로 들어와 30여호 마을을 이루면서 주위의 비옥한 농토와 산림을
토대로 부유한 마을로 만들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출신 조경남(趙慶南)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 내송마을(안솔치)
10시 05분, 의자가 있고 커다란 나무 그늘이 있어 쉬어가기 좋은 서어나무 숲이다
이곳을 개미정지라고 부른단다.
- 서어나무숲이 있는 개미정지
처음으로 간이매점을 만난다. 우리나라 관광지에서는 돈만 가지고 있으면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마 이곳이 솔정자인 것 같다.
솔정자는........
솔정자는 20여년 전만 해도 나무를 하러온 지게꾼들이 주천 들녘과 멀리 숙성치와 밤재를 바라보면서
땀을 식히던 곳이며 전설에 따르면 정유재란 당시 숙성치를 넘어 남원성을 향하는 왜군을 향해 조경남
장군이 활시위를 당겼던 곳이라고도 한단다.
솔정자를 마을 사람들은 솔정지라고도 부른다고..........
- 이곳이 솔정자로 생각된다.
걷는 자의 배려를 위해 이정표도 잘 설치되어 있고 소나무 숲길은 아늑하기만 하다.
- 걷기 좋은 소나무 숲길
10시 56분, 구룡치에 다다르며 쉬어 가는 이들이 많다
구룡치는......
구룡치는 남원 주천면의 여러 마을과 멀리 남원 산내면 달궁마을에서 남원 장을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단다.
남원 산내면 달궁마을 주민들은 거리가 멀어 남원 장에 가려면 2박 3일에 걸쳐 다녀와야 했을 정도인데
구룡치를 거치면 빠르게 갈 수가 있었다고.....
또 구룡치를 장길로 이용하는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백중(음력 7월 15일)이 지나고 마을별로 구간을
나누어서 길을 보수해서 이용해 왔는데 지금도 예전의 보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고 한다.
지나가는 길에 웅덩이 하나를 발견한다. 생태계의 보고라고 하며 일명 곰샘이라고 한다.
- 이곳이 일명 곰샘이라고(우측)
11시 18분, 아름다운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 곳이며 사무락다무락이다. 이름이 특이하다.
사무락다무락이란 사망(事望)다무락(담벼락의 남원말)이 운율에 맞춰 변천된 것으로 보이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무사함을 빌고 액운을 막아 화를 없애고자 지날 때마다 돌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 이곳이 사무락다무락이라고......
11시 34분, 회덕마을이다. 간이매점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회덕마을은 임진왜란 때 밀양 박(朴)씨가 피난하여 살게된 것이 마을을 이룬 시초라고 한다.
원래는 마을 이름을 남원장을 보러 운봉에서 오는 길과 달궁쪽에서 오는 길이 모인다고 해서 모데기라
불렀단다. 그 뜻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을 한 곳에
모아 이 마을을 이루었으며, 회덕마을은 평야보다 임야가 많기 때문에 짚을 이어 만든 지붕보다
억새를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었으며 현재도 두 가구가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회덕마을 앞에는 쉬어가기 좋은 당산나무 쉼터가 있다.
- 주천면 회덕마을 전경
- 회덕마을에 있는 간이매점
- 회덕마을에 있는 이정표(1박 2일 팀의 김종민은 이곳에서 방향을 잘 못 잡아 고기리 쪽으로
내려가는 실수를.....)
- 회덕마을 앞의 당산나무 쉼터
- 억새를 이용하여 만든 회덕마을의 새집이 보인다.
노치마을로 가는 길에는 만복대, 고리봉, 백두대간 능선이 발길을 함께 해준다.
이곳 노치마을에는 수확이 다 끝나버렸다. 다른 지역보다 벼 베기가 일찍 끝나는 곳이다. 어쩌면
우리는 벌써 봄을 기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1시 56분, 남한에서 유일하게 백두대간 길이 통과하는 마을이다.
노치마을은 조선 초에 경주 정(鄭)씨가 머물러 살고 이어 경주 이(李)씨가 들어와 살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노치마을은 해발 500m의 고랭지로서 서쪽에는 구룡폭포와 구룡치가 있으며 뒤에는 덕음산이 있고
지리산의 관문이라고 말하는 고리봉과 만복대를 바라보고 있으며 구룡치를 끼고 있다.
마을에서는 마을 이름을 “갈재”라고 부르는데 이는 산줄기의 높은 곳이 갈대로 덮인 것에서 유래한
것이란다.
현재는 백두대간이 관통하는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치마을은 고리봉에서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위에 있어 비가 내려 빗물이 왼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오른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마을이다. 또 노치샘은 물맛이 좋은 샘으로 알려져 있다.
노치마을 뒤 오래된 소나무 아래에서 점심을 먹는다.
-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노치마을(좌측)과 노치마을 뒤에 있는 노송(우측) -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 수확이 벌써 끝난 노치마을 앞의 들녘과 지리산 만복대, 고리봉을 바라보고 있다고.......
- 노치마을
- 노치마을에 있는 노치샘
- 노치마을 전경과 지리산 서북능선
우리의 들판과 우리가 걷는 길은 언제나 정겹다.
우리가 거둬들인 수확이 작을지라도 우리는 늘 감사하며 산다. 지리산 둘레길은 때로는 논 둑길을
걸어가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말이다.
덕산저수지를 옆에 두고 걷게되며 주천면부터 이곳까지는 20년 전까지 운봉, 산내 사람들이 남원장을
보러 다니던 옛길이란다.
- 코스모스 길을 걷는 지리산 둘레길
- 지리산 둘레길인 논둑 길(좌측)과 덕산저수지(우측)
13시 35분, 질매재를 넘어서 가장마을에 다다른다.
우리네 동네 어귀에는 정자나무 숲이 있다.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가장마을은 풍수지리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화장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가장리
(佳粧里)라 불렀다 한다. 지금은 들녘에 농사짓는 움막터를 뜻하는 농막장(庄) 자를 써 가장리
(佳庄里)로 쓰고 있단다.
마을 사람들은 옥녀봉 아래에 옥녀가 베를 짜는 옥녀직금의 천하명당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300여 년 전 이곳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동복 오(吳)씨와 강릉 유(劉)씨라고 하며 그 후 창녕 조씨와
김씨, 박씨 등이 입주하게 되었단다. 마을이 뱀 형국으로 마을 앞에 입석을 세워 뱀의 기를 눌러
마을의 액 막음을 하고 있단다.
- 동복오씨 묘역과 간이매점(우측)
- 가장마을 정자나무 숲
덕산교 앞에서 둘레 길은 좌측 제방으로 이어진다.
13시 49분, 둘레 길은 가장교 건너서 제방으로 따라가며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여느 밭에서는 금추가 먹음직스럽게 잘 자라고 있다.
- 덕산교(좌측)와 제방을 따라 가는 둘레길(우측)
- 둘레길은 가장교를 건너서 좌측 제방길로(위 좌측)
14시 02분, 운봉읍 행정마을을 지난다.
행정마을에는 아름다운 서어나무 숲이 있는데 그냥 지나쳐 버렸다.
행정교 건너서 좌측 제방으로 따라가다가 엄계교 앞으로 둘레 길은 이어진다.
서부지방산림청에서 관리하는 양묘사업소를 통과한다.
좌측으로 백두대간의 고남산이 지척이다.
- 운봉읍 행정마을과 회관
- 둘레길은 행정교를 건너서 좌측 제방으로 이어진다.
- 둘레길은 남원양묘사업소를 통과한다.
- 백두대간의 고남산이 보이고..........
14시 34분, 남원 운봉읍 사거리에 도착한다.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십승지 이야기가 있다.
십승지란 천지 대개벽이 일어날 때 재앙을 피하기에 좋은 10군데의 지역을 말한다.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에 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인간은 끔찍한 질병과
굶주림, 추위와 더위, 공포에 시달리게 되고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함으로서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십승지에 들어가는 사람은 이러한 끔찍한 재앙으로
부터 목숨을 보전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자손이 끊기지 않고 후세에까지 보존될 것이라고
하여 재난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십승지의 정확한 위치는 책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십승지를 언급한 책은 <정감록>, <남서고 비결>,
<남격암 산수 십승보길지지>, <감결>, <징비록>, <운기구책>, <유산록> 등 60여종이 있는데......
이미 알려진 대로 책자에 기록 된 수많은 십승지 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열 곳의 십승지는 전란이나
환란을 피해 숨어 들어가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었던 곳을 말하는데 그중 한곳이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 일대를 십승지 중의 하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운봉읍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보면......
지리산 주변에는 구례나 남원, 경남의 함양, 하동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있다.
모두가 한 폭의 그림 같은 마을이고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정감록에 따르면 이 도시들보다
지리산으로 오르는 중간지대인 운봉(雲峰)을 십승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
운봉은 오늘날 전북 남원시 운봉읍과 그 주변을 가리킨다. 이곳은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연달아
나며 가히 오래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운봉은 동으로 팔랑치, 서쪽에 여원치라는 큰 재를 두고 있다.
북에는 덕유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막고 있고 남에는 지리산이 자연경계를 이룬다.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운봉으로 가려면 각각 팔랑치와 여원치를 넘어야 한다.
가령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려면 이 두 재만 단단히 지키면 된다. 해발 평균 450m, 서울 남산의 두 배
높이에 자리한 운봉은 그런 점에서 하늘의 요새라고 하겠다.
고려 말 남해안을 날뛰던 왜구들도 이곳을 범하지 못했고 근세의 동학농민전쟁은 물론 해방후 빨치산
전투에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지리산 등반을 하는 경우 대개는 88고속도로 지리산IC에서 인월로 빠져나와 곧장 뱀사골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 결과 운봉은 등반객에게도 낯선 곳이다. 인월에서 운봉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황산과 덕두산
자락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 자신의 눈을 의심할 만큼 광대한 평야가 전개된다.
80년대 들어 목축업과 고랭지 작물이 일부 시작됐지만 여전히 이곳의 주산물은 쌀이다.
지리산 자락의 풍부한 물과 맑은 공기가 가을이면 들녘을 황금벌판으로 물들인다.
외부의 간섭이 없고 먹을 식량이 풍족하면 인심은 절로 좋게 마련, 여기에다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주변의 산들이 하나같이 살기(殺氣 를 벗고 있어 인물 역시 보장한다.
발복의 시기는 북으로 흐르는 하천(광천)이 운을 받는 지금부터다. 그래서 십승지는 제때에 들어가야
복을 누린다고 했다.
- 남원 운봉읍 사거리
- 운봉읍 소재지(좌측)와 운봉초등학교(우측)
운봉농협이 있는 운봉사거리에 도착하며 둘레 길은 직진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회지로 떠나간 산골의 읍소재지는 가끔 지나치는 곳이지만 언제나 조용하다.
운봉초등학교에서 서림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서림공원에는 서천리 당산이 있는데 당산은 마을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며, 이곳 서천리
당산에는 한 쌍의 돌장승이 있는데 외형상 구분은 불분명하지만 남쪽의 것은 남자, 북쪽의 것은
여자라고 한다.
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뜻으로 남녀 장승에는 각각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이라 새겼단다.
두 장승 모두 벙거지를 쓰고 수염이 달렸으나 여자 장승에는 귀가 없단다. 수수한 노인 모습을 한
여 장승은 키는 작지만 실제 인간 모습에 가까우며 얼굴표정이 사실적이란다.
이 여장승은 마을을 수호한다는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서민의 소박한 표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민속예술의 연구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단다.
- 운봉읍 서림공원으로 가는 길
- 서림공원(좌측)과 서천리 장승(우측)
서림공원에서 둘레 길은 운봉 들녘을 적셔주는 람천을 따라 걷는다.
14시, 55분, 아무데다 주저앉으면 편안한 자리 아닌가. 북천마을 협동교에서 바래봉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간다.
운봉읍 신기마을 앞으로 이어지는 제방 길을 따라서 걷는다.
신기마을은 선조 28년(1595) 임진왜란이 휴전상태에 접어들어 왜적이 잠시 철수하고, 영남이 아직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혼란스런 때 이곳에 터를 잡은 입향조는 인동 장씨 장덕복(長德福)이었다.
영남의 전란에 고통을 받다가 지리산이 바라보이고 우뚝 솟은 운봉 고원이 마을을 보호하고 만복이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명당터인지라 새 삶을 시작하는 터전이란 뜻으로 새터(신기,新基)라 하였단다.
소(牛) 형국인 마을 북쪽 쇠잔등이가 잘려 마을의 쇠한 기운을 막고자 주민들이 직접 토성(土城)을
쌓았다고도 한다.
- 둘레길은 서림공원에서도 제방길로(좌측), 협동교에서 쉬어간다(우측) - 1박 2일팀의 이승기가
걸었던 코스이다.
- 바래봉이 지척이다.
- 운봉 들녘을 적셔주는 람천 -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 둘레길은 신기마을 앞 제방 길을 따라간다.
걷는 제방 길에는 쑥부쟁이가 지천으로 피어 있고 가을 바람이 조금은 차갑게 느껴진다.
이 풍요로운 땅을 걷는 사람들이 저 만치서 줄을 지어간다.
16시 03분, 가왕 송흥록, 국창 박초월 생가가 있고 또 황산대첩비가 있는 운봉읍 비전마을에 도착한다.
비전마을은 황산대첩비가 세워지고 이 비각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단다. 마을이 비(碑) 앞에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비전(碑前)으로 불리게 되었고 마을 5리
전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첩비를 지날 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이 곳에서
말에서 내려 걸어와 비 앞에서 절을 하였단다.
이곳에는 구한 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의 주막과 기녀(기생)와 소리꾼, 가마꾼(轎軍)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비전을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단다.
또한 조선말 동편제의 가왕(歌王)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이 태어난 곳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으로 동편제의 고향으로 국악의 성지가 있는 곳이다. 비전 마을이 동편제의 발상지가 된 것은 이곳
하마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이 곳은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고려 군은 이성계를 최고지휘관으로 삼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李豆蘭)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들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완전히 섬멸하였다.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金貴榮)의 글, 송인(宋寅)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왜구의 침탈에 맞서 우리 선조들이 꿋꿋하게 일구어낸 역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참고로 동편제는......
판소리는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 크게 세 유파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중 동편제는 섬진강 잔수
(전남 구례)의 동쪽지역 명창들에 의해 완성되어 구례, 남원, 순창, 곡성, 고창 등지에서 성행한
판소리를 말한다.
명창 가왕 송흥록(宋興錄)이 발전시켜 국창 송만갑이 완성시켰다. 웅장하면서 호탕한 소리인 우조를
많이 사용하고 발성초(發聲初 입을 열어 처음 내는 소리)가 진중하다. 통성을 쓰며 소리 끝을 짧게
끊는 등 대마디 대장단의 특징이 있다.
동편제의 명창으로는 가왕 송흥록을 비롯해 송광록, 박만순, 송우룡, 송만갑, 유성준, 박봉래, 박초월,
김소희, 김정문, 임방울, 정광수, 박봉술 등이 있다.
- 람천과(좌측)쑥부쟁이(우측)
- 운봉읍 비전마을에 있는 황산대첩비 전경
- 황산대첩비
- 황산대첩비의 어휘각(우측)
- 가왕 송흥록 생가(좌측)와 국창 박초월 생가(우측)
가느다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남원 주천에서 시작한 지리산 둘레길,
운봉 비전마을에서 오늘 답사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지리산, 영재봉, 만복대, 고리봉, 세걸산, 바래봉 덕두산, 수정봉, 고남산 등이 감싸고 있는 남원
주천, 운봉 땅을 눈으로 보며 마음으로 느끼며 그들이 살아온 소리를 들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땅에는 백두대간의 정기가 흐르는 땅이요, 풍요로움이 가득 넘치는 그런 땅이었다.
화수마을 앞에서 동네에 사시는 아주머니와 둘레길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다 인월에서 나오는
시내버스를 탄 다음 남원에서 내린 후 전주행 직행버스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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